축배 (1)
* * *
―놈을 찾아라, 황국의 신민들아.
로만의 라운지.
값비싼 블루투스 스피커가 사방에서 ‘백정장군’ 마지막 회 대사를 쏟아낸다.
대표 배우들의 열연을 감상하며, 이성철 본부장은 홀 안을 훑었다.
“와, 대박. 저거 찍은 게 월요일이었는데. 대본 못 외워서 대참사 나는 줄.”
“쪽대본 동수 형, 영 작가님 저 뒤에 계세요.”
“둘 다 조용히 좀 해. 그러다 들린다니까.”
손님들은 저마다 재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전, 노중만 대표는 모 제작사와 중요한 미팅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
대표실을 나가면서는 그에게 집주인 대리를 맡겼다.
‘손님맞이는 해야지. 온 사람들이랑 적당히 인사하고, 40% 넘으면 연락해.’
‘대표님도 끝나고 오시려고요?’
‘쫑파티에 얼굴은 비춰야지. 듣기론 우리 회사 배우들이 그렇게 술을 잘 먹는다던데.’
‘···그쵸, 하니는 빼고.’
종방연마다 작감을 박살내는 술고래들은 저쪽에 있다.
몇 자리 건너, 진지유와 박건이 뭔가를 소곤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로 진지유 쪽이 묻는 것 같았는데, 박건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표정이 뚱해져서 다리를 꼰다.
‘지유도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초창기 멤버니만큼, 이성철 본부장 역시 진지유라는 연예인을 잘 알았다.
아이돌 시절··· 3세대 걸그룹의 소녀가장 리더로, 그 이후 온갖 고난을 거쳐 배우로 정착하기까지, 사연을 아는 이들은 혀를 내두른다.
첫째는 저 악바리 정신에,
둘째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프로의식에.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은퇴했겠지, 더 나쁜 일을 겪었거나.’
눈부신 재능으로 탑 배우 반열에 올라섰으나, 이 본부장은 종종 안타까웠다.
완벽한 모습만 보이려는 저 강박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익히 아는 탓이다. 소속 연예인들 중에서도 두 여배우가 특히 그렇다.
―송 아가씨,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 사람이랑 약속했어요. 여러분은 자유롭게 떠나세요.
마침 송이설로 분한 백하니가 열연을 펼친다.
총포를 쥔 흰 얼굴을 바라보며, 이성철 본부장은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작품에선 유독 조용했군.’
백하니가 사고를 안 쳤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만··· SNS와 유튜브, 자르마니 런칭쇼에서까지 ‘백지랄’의 위명에 어울리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작품이 지옥까지 처박히든 말든 신경 안 쓰던 인간이, 갑자기 홍보를 한다? 돈 때문이면 말이 안 되고 동료의식이라면 더 안 된다.
그리고 본부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날 찾고 있었나?
장군탈을 쓴 이천인··· 박건의 쉰 목소리가 라운지를 압도한다.
송이설의 존재감과는 또 다른, 스크린을 찢어발기며 튀어나오는 지배력이다.
저 배우의 영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최필립과 구신승 등 대표 배우들은 물론, 로드부터 데뷔조 연습생까지 박건을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진지유가 직접 오디션을 보러 찾아가고, 두 번이나 특출을 자처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혹시나, 동료 이상으로 보는 거라면······.’
이성철 본부장은 조용히 웃었다.
희한하게도, 로만 엔터는 그 흔한 스캔들조차 좀처럼 나지 않았다.
누구와 엮이든 재미있을 것이다. 특히 박건, 온갖 악성 여론에 놀라우리만치 영향을 받지 않는 저 신인이 대상이라면.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닐 시 배우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이 노중만 대표와 그가 내건 슬로건 아니었던가?
이 본부장이 시선을 옮길 때, 화면에서 요란한 폭음이 연달아 터진다.
극은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독립군 놈들이다! 백정탈 행세를 하고 있다!
―전부 죽여서 가면을 벗겨라, 사로잡지 않아도 된다!
경성 곳곳에 나타났던 수많은 백정탈은 가면을 쓴 독립군 단원들이었다.
순사들과 가짜 백정탈들의 교전이 펼쳐지며, 총과 칼에 맞은 사상자들이 속출한다.
―뭐야, 애새끼잖아?
한 명을 붙잡아, 목에 칼을 들이대고 가면을 벗긴 헌병이 미간을 일그러뜨린다.
그 말대로다. 기존 독립군이 아닌, 이정녕의 연설에 감화된 경성 내 조선인들도 무기를 지급받아 참전한 것이다.
타앙―!
그 순간, 요란한 폭음이 들리며 헌병의 이마가 뒤로 젖혀진다.
하얀 연기가 걷힌 곳··· 저 멀리 담장 위에서 화승총을 든 송이설이 재장전한다.
이때까지 몇 놈을 죽였는지, 고운 얼굴은 화약 그을음이 묻어 온통 거무스름하다. 가지런한 눈썹이 좁혀지며 2각(刻) 전을 회상한다.
―천인, 도망쳐야 해요. 경성독립군과 조선인들이 시간을 끌어 줄 때, 어서······!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난 송이설과 이천인.
그러나 저 백정탈은 그녀의 애타는 부탁에도 금이 간 도끼자루를 들어올린다.
―나는 내가 죽인 이들을 기억하오.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수없이 목을 친 왜경들,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들, 저 사악한 총독부의 하수인들과 천황에 미친 사무라이들··· 그들의 피가 이 두루마기에, 더럽혀진 손 곳곳에 배어 있지. 집행자의 삶을 선택한 이상, 내 죄에서 도망칠 수는······.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예요!
처절한 외침이 이천인의 말을 끊는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칼과 총을 들지 않으면 족쇄에 매여 노예가 되는데, 그래서 누군가를 해친 게 잘못인가요? 그렇다면 나는 얼마든지 죄인이 되겠어요.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죄를 씻을 거라고요.
이천인이 복수를 위한 야차(夜叉)의 삶을 살아왔다면, 송이설은 인고의 삶을 살아왔었다.
그녀 역시 사대부 가문 여식이라는 굴레에 짓눌려 온 희생자인 터.
비극의 역사니, 그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던 이들도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나.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소. 하지만 애써 보리다, 강을 건너 나들목까지만 간다면 평양행 기차에 탈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다시 한 번 키스씬. 입을 맞추는 두 남녀에서 전환된 화면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깥을 연달아 비춘다.
―황우회 놈들이, 언제 여기까지······.
경성의 저잣거리에서 이정녕이 쓰러진다. 경성독립군 대장을 죽인 황우회의 리더, 슈헤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말에 올라탄다.
그리고 마침내, 평양행 기차를 기다리는 건널목에서 마지막 격전이 벌어진다.
―나는 배자현이라고 합니다. 전령을 받아, 만주의 식구 몇을 모아서 왔소.
만주의 여성 독립투사, 배자현 역을 맡은 진지유는 나오자마자 모두를 사로잡는다.
살아날 수 있는가? 송이설과 이천인의 눈빛에 희망이 스쳤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적들이 나타난다.
―백정탈, 게 섯거라!
―저 끈덕진 놈들이 언제 여기까지······!
송이설이 경악하는 사이, 악귀 가면을 뒤집어쓴 슈헤이가 검을 뽑아 달려든다.
남은 화약은 없다. 배자현이 데리고 온 만주의 독립군들과 이천인, 송이설까지 적들과 엉겨붙어 칼부림을 벌인다.
빠아아아앙―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와중, 기차가 귀청을 찢는 경적과 함께 나타난다.
동시에 먼 곳에서 횃불이 밝혀지며 군복을 입은 일본군이 나타난다. 총독부의 경무국장, 도쿠로 신지가 죽기 전 부른 증원 부대다.
―어서 가, 지금이 아니면 못 가!
피 끓는 외침에, 배자현과 독립군 장정이 송이설을 끌고 기차가 들어오는 철길로 간다.
이천인 역시 사무라이들의 검을 받아내지만 적이 너무 많다. 반이 날아간 오니 가면 뒤쪽, 슈헤이는 광기 어린 얼굴로 웃어젖힌다.
―죽어라, 열등한 가축! 우리 군부의 번영을 위한 거름이 될 지어니······.
타앙!
그때, 둑 위에서 날아온 총알이 슈헤이의 목을 뚫는다. 돌아보니 손을 부들부들 떠는 총독의 셋째딸, 하루카가 서 있다.
이천인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자신을 배신한 조선인을 살리기 위해 일본인을 살해할 만큼.
―여기예요, 어서!
미리 무슨 수를 써 놓았는지, 멈춘 열차에 올라탄 송이설이 외친다.
이천인의 시선이 저만치 멈춰 선 열차를, 이제 목전까지 몰려온 군인들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백정탈은 걷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곳이 아닌, 총검을 뽑아든 채 달려드는 적들에게로.
―안 돼, 천인! 제발······!
절규하며 뛰어내리려는 송이설을 독립군 단원들이 붙든다. 여기서 시간을 벌지 않는다면 군인들도 기차를 세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체포당한다. 남은 이들이라도 살릴 수단은 하나뿐이다.
―썼던 탈은··· 언젠가 벗겨지기 마련이지.
강바람을 맞는 이천인의 맨얼굴에는 백정탈도, 장군탈도 없다.
이내 그는 옛 장수들처럼 두 팔을 뻗는다. 날이 다 빠진 도끼, 검면이 잔뜩 금이 간 도살용 식칼이 횃불의 빛을 빨아들여 일렁거린다.
―거짓된 신분을 연기하며, 더럽고 추악한 피와 먼지를 이 두 손에 묻혔다. 죽여야 하는 민족의 원수들을 수없이 베었으니······.
20부작에 달하는 극에서 처음으로, 청년의 피 묻은 입가가 올라간다.
―후회는 없다.
조선의 혼이 불꽃처럼 타오를 때,
비명 같은 총소리가 울린다.
*
같은 시각, 상영회가 열리던 본가.
아들의 죽음만 벌써 두 번째인 부모의 원성이 기어이 터졌다.
“아니, 설마 또? 왜 우리 아들은 맡는 역할마다 죽는 건데?”
“이 모진 양반들아, 천인이 살려내라!”
“쉿, 아직 안 끝났어요. 광고 안 나오잖아요.”
퍼뜩 정신을 차린 한영주가 남편의 폭주를 막아선다. 박열호도 찬물로 목을 축인다.
첫 시작부터 비극이었고, 그랬기에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나야 한다······.
영도은 작가는 아픈 시대상을, 본인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담아냈다.
잠시 후. 암전됐던 화면이 ‘3년 뒤’라는 자막과 함께 눈보라처럼 밝아진다.
―어이, 그쪽 좀 제대로 잡아!
―총리대신님이 이제 곧 도착하신다, 모자람 없이 준비하도록 해!
이곳은 경성이 아닌 상하이. 두툼한 털코트를 입은 일본군 군인들이 사열식을 준비한다.
눈 쌓인 철길이 내려다보이는 4층 벽돌집에서, 한쪽 창문이 열리며 총부리가 나온다.
창밖에서부터 총부리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 앵글이 장총을 겨눈 주인공을 비춘다.
검은 머리를 질끈 묶고 탄약대를 두른, 송이설의 허리춤에서 익숙한 가면이 흔들린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듯한 갈색 백정탈이.
“······.”
다시 한번 화면이 암전되고, ‘지금까지 백정과 장군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떠오른 뒤 광고가 흘러나왔다.
그때껏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홍보실에서 막 내려온 듯한, 스마트폰을 쥔 공기형 팀장도 눈만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침묵 속에서, 박선은 형을 쳐다보았다. 박건은 팔짱을 낀 채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연기가 불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잊었던 무엇인가를 기억해낸 표정 같기도 했다.
“모두들.”
경성의 백정이었던 청년이 배우로 돌아온다. 모양 좋은 입매가 화면 속처럼 빙긋 웃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쏟아지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명장면과 명대사를 남긴 ‘백정장군’이 막을 내렸다.
최고시청률 40.2%.
첫 회차부터 마지막 회차까지, 무려 20%가 넘는 시청률을 등반한 대장정의 마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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