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배 (2)
* * *
“뭐야,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연습실이 있는 지하 층.
버튼을 눌러 놓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보컬 트레이너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옆의 동료가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몰라? 지금 위층에서 난리 난 거.”
“내가 어떻게 알아, 애들한테 시달리느라 밥도 못 먹었는데.”
“백정장군 쫑파티. 대표님 허락 맡고 라운지를 아예 통째로 전세 냈대.”
트레이너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네. 오늘 종방이었지!”
분야는 다르지만, 대표 배우가 두 명이나 들어간 대작이다. 고개만 돌리면 들리는 소식이 ‘백정장군’이니 웬만한 회사 직원들은 다 알았다.
“근데 다들 왜 올라가는 거야? 그쪽 파티면 백정장군 팀만 노난 거 아닌가?”
“회사에 있는 사람들 다 불렀다잖아, 와서 먹고 놀라고. 아깐 연습생 애들도 우르르 가서 사인 받고 갔다더라.”
어쩐지, A&R팀 인간들이 우르르 올라가던 게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보컬 트레이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박건 씨. 구신승을 잇는 대인배라니까.”
“김 쌤도 가, 샴페인은 한잔 마셔야지.”
“됐어, 안 그래도 매번 얻어먹는데 또 끼면 좀 그럴 거 아냐.”
동료 트레이너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래? 후회할 텐데?”
“뭐가, 왜.”
“저 위에, 지금 온갖 인간들 다 와 있거든. 퀸텀 종무식에도 안 나온다는 배우들까지.”
*
4층 라운지가 파티장으로 변했다.
곳곳에서 샴페인 뚜껑이 열리고, 들어온 선물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마지막 방송이 끝나기도 전부터, ‘백정장군’ 기사들은 포털을 지배했다.
[이천인, ‘조선의 혼’과 달려온 4개월··· 그가 남기고 간 것]
[KBC “게 섯거라” 눈부셨던 CVN의 독주]
[최고시청률 40.2%, 기타편성채널 중 최초··· 케이블, 지상파 합쳐도 수년만]
[자르마니 앰배서더, 가짜 학폭 논란, 파리패션위크··· ‘방점’ 찍은 박건의 행보]
[시대의 비극을 관통하는 대서사시, 백정장군은 평범한 시대극이 아니었다]
“아, 김 부장님. 감사합니다, 조만간 찾아뵙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토니픽쳐스요? 예, 예, 그런데 지금 저희 배우들 스케줄이 좀··· 천천히 미팅 잡으시죠.”
“지금은 종방연 중이라서요. 촬영이요? 죄송하지만 외부인 출입은 안 돼서, 홍보팀에서 몇 개 뽑아다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이 잘 된 것뿐이지만, 로만과 C&J가 DG와 조이너스를 완벽히 깔아뭉갰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승리한 기획사와 방송국의 위상은 백팔십도 달라진다. 팀장급 이상들에게 축하 전화가 미친 듯이 들어오는 이유기도 하다.
“야, 정나윤! 너 왜 여깄어? 지금 사무실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지······.”
“팀장님이 먹고 오래. 어차피 불판 알아서 깔렸다고, 급한 대응은 본인이 하신다던데?”
홍보팀 여직원이 무알콜 칵테일을 홀짝이며 대꾸한다. 공 팀장이 일당백을 자처해, 홍보실 사람들까지 다 내려와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영 작가, 한잔 받아.”
“적당히 드세요. 막촬 때 감독님 진상 부렸다는 소문 듣고 내가 다 창피했으니까.”
“어우, 그놈의 잔소리는 와이프보다 더해요. 그래서 무알콜로 가져왔잖아.”
작감도 배우들도, 쏟아지는 술잔을 받으랴 쇄도하는 축하 연락을 받으랴 정신이 없다.
특히 주연들의 휴대폰은 알람 폭탄이 떨어진다.
흑의사제 칸 존버방 : [박 배우, 진짜 축하해요! 김률이도 축하한다고 엉엉 울어!]
이장미 : [오빠 연락 받았어요? 지금 태 대표님이랑 김 감독님이랑 같이 있는데, 이 사람들 완전 취해서 난리야]
서희도 : [형 ㅠㅠㅠㅠㅠ 진짜 고생 많았어요]
개노답 삼남매 : [축하한다 박건! 경일고 최고의 아웃풋 ㄷㄷ]
성지호 : [하.. 나도 이천인인데... 엄마가 어른들 자리라고 못가게햇어요ㅜ]
그 밑으로도 함께 일했던 스탭과 배우들의 메시지가 한참이다.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 오는 속도가 훨씬 빨라, 숫자가 줄어들질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일일이 답장하며, 건은 작년 이맘때를 회상했다.
‘그때랑은 다르네.’
일전, 서울의 개 때에는 마지막 회차가 방영되고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전화가 오고, 광고 섭외가 몇몇 들어오긴 했지만, 축하와는 또 다르다.
‘전화번호부에 연락처도 많아졌고······.’
옛 동창들, 서승아와 배영호를 빼면 가족밖에 없던 번호부가 이젠 끝도 없이 내려간다.
이곳이 철왕국이 아니라는 실감은 이럴 때 불쑥불쑥 드는 것이다. 회귀하지 않고, 죽음도 없이, 그의 곁에 남은 무수한 사람들로써.
끝없이 회귀하면서 바랐던 소망이 바로 이것 아니었던가?
“어, 퍼핑돌즈다!”
“퀸텀도 같이 왔대요, 상암 찢고 복귀!”
그때, 라운지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환호성이 터졌다.
한동안 타 방송 1위를 수성하던 퀸텀과, 오늘 MBS 음방에서 1위를 한 퍼핑돌즈가 함께 등장한 것이다.
“지유 언니······!”
“진짜 축하해, 딱 겹경사 날 줄 알았어.”
“저희도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오늘 레전드다, 레전드. 어떻게 배우팀 아이돌팀 쌍끌이로 대박을 내냐.”
발랄한 탄성과 함께, 반짝거리는 무대의상들이 파티장으로 섞여든다.
친분이 있는 멤버 한 명은 이미 진지유와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는 중이다. 건은 재빨리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퀸텀 백금발은 장여빈, 퍼핑돌즈 긴 머리는 신채이··· 작년 시상식 특별무대는 퍼핑돌즈······.’
기억을 점검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그의 주변을 아이돌들이 둘러쌌다. 흘끗 옆을 보자 박선의 주변에도 매니저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두 팀의 리더들, 백금발과 흑발이 허리를 박력 있게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언니, 배우님이라고 해야지. 선배님 소리 싫어하신댔어.”
“아, 정말이네. 죄송합니다, 배우님!”
퍼핑돌즈 신채이가 옆구리를 찌르자 퀸텀의 장여빈이 냉큼 사과를 올린다. 같은 소속사라 그런가, 두 팀도 제법 친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음악방송들, 연타석 1위 축하드립니다. 선이가 보여줘서 무대도 보고 투표도 했습니다.”
“저, 정말요······?”
“꺅! 배우님이 우리 무대 봐주셨대!”
“어우, 시우한테 연락해서 자랑해야지. 혹시 사인 좀······.”
누가 아이돌 아니랄까 봐, 텐션들이 기본적으로 높다. ‘백정장군’ 스탭들도 회사 아이돌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
‘하긴, 전엔 학폭 루머 때문에 경황이 없었지.’
그 때는 다들 울상이더니, 오늘은 영락없는 또래 여자애들이다. 둘러싼 소녀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멤버가 불쑥 말했다.
“나중에 소진 언니 연기도 봐주세요! 레슨 쌤이 칭찬했다고 요즘 기세등등한데, 따끔하게 한 소리 들어야 돼요!”
“배우님한테 무슨 소리야, 바보야!”
“···죄송합니다, 막내가 아직 어려서······.”
“나중에 봐 드리겠습니다.”
“네··· 네?”
‘서울의 개’ 시상식에서 그들에게 인사했던, 흑발의 신채이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도 잘하는 건 아닙니다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요.”
“우, 우으으······.”
“언니! 울면 안 돼, 화장 또 지워지잖아!”
···실로 감정표현이 확실한 그룹이다. 리더의 케어에 익숙한 듯, 멤버들이 달려와 울먹거리는 신채이를 데리고 간다.
“또 인사드릴게요! 알럽잇, 퀀텀이었습니다!”
“예, 저는 박건입니다.”
아이돌들이 다른 곳으로 몰려가고 나자, 이번에는 키가 훤칠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까 도착해 이미 한 차례 사인회를 마친 구신승이다.
“축하해요, 박 배우님.”
“간식차랑 커피차, 보내 주신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구씨세가 공자님이 아니시군요.”
구신승은 못 들은 척 샴페인 잔을 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쭉 뻗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그, 혹시 지유한테 들으셨습니까?”
“아뇨. 자세한 얘긴 못 들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정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요즘 보는 게 있는데, 아주 푹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 셋이 나가면 엄청 재밌을 것 같았거든요.”
무협지에 판타지, 온갖 작품은 다 읽고 보는 사람이라 또 뭘 가져왔을지 모른다. 건은 적당한 대답을 골랐다.
“이제 드라마가 끝났으니, 쉬면서 골라 볼 생각이었습니다. 시나리오를 보내 주시면······.”
“아, 이게 시나리오가 아니라서.”
“예?”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우리 셋’이라고 했다. 눈동자를 굴리던 구신승은 빠르게 중얼거렸다.
“저기, 팀장님이 오시네요. 또 배우님 귀찮게 한다고 혼날 것 같으니, 자세한 얘기는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양 팀장이 도끼눈을 뜨고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배우가 사고를 안 치게 감시하기도 힘들겠군. 생각한 건은 짧게 인사했다.
“예. 여러 모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제가 꼬드기는 입장인데. 너무 늦게 뇌물공세 시작한 것 같아서 걱정이죠.”
싱긋 웃은 구신승은 돌아서려다 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혹시 오면서 봤어요?”
“누굴······.”
건이 되물을 때, 문득 주변이 고요해졌다. 돌아본 구신승도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러섰다.
이내 술잔을 든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다.
뒤따르는 본부장과 함께, 라운지를 가로질러 온 노중만 대표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때 우리가 옳았군.”
일 년 전의 한정식집이 문득 스쳤다. 두툼한 손을 마주 쥐며, 건은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저희 둘 모두.”
*
로만 엔터테인먼트, 14층 대표실.
대리석 탁자의 찻잔에서 김이 오른다. 아래층의 파티에 얼굴만 비춘 노중만 대표는 다른 손님을 맞고 있었다.
“왜, 아래층엔 안 가 보고.”
앞에 앉은 사람은 ‘백정장군’의 두 주역 중 한 명이다. 백하니는 질색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거길 왜 가요? 저 왔다고도 말하지 마세요, 보기 싫은 얼굴들 잔뜩 있으니까.”
“박 배우는 반가워할 텐데.”
“···쫑파티는 했으니까 상관없어요. 아쉬우면 따로 술이라도 사겠지.”
말투는 그대로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노중만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표정에 항상 묻어 있던 짜증과 권태, 경멸이 몇 꺼풀은 녹아 사라졌다. 마치 수십 겹을 쌓았던 방송용 메이크업을 지운 것처럼.
처음 연을 맺은 이후··· 이렇게 민낯에 가까운 백하니를 본 적이 있던가?
“아무튼··· 이유 없이 들르진 않았을 테고. 할 말이 있으면 해.”
“진지유.”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온다. 백하니는 다음 작품 조건이라도 묻는 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혹시 박건이랑 뭐 있어요? 둘이 사귀는데, 대표님이 홍보팀 싹 돌려서 입 막는 중이라거나.”
“백 배우한테서 다른 사람 얘기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광고 때문에 그래요. 나랑 연기한 배우가 바로 열애설 뜨면 몸값 떨어지니까.”
광고고 몸값이고, 회사에 맡기곤 일절 관심을 안 갖던 것이 눈앞의 배우였지만··· 잠잠한 폭탄을 찌를 필요는 없다.
그는 지적하는 대신 팔짱을 꼈다.
“글쎄,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
“관심 있는 줄 착각할 거 아녜요. 그럼 볼 때마다 귀찮아져서 짜증나요.”
“박 배우가? 연예계가 뒤집어져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던데.”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세요?”
톡 쏘듯 대꾸한 백하니가 시계를 봤다. 목적한 바를 이뤘는지, 이만 일어나겠다는 의사가 온몸에서 풍겨나온다.
“재계약이나 잘 해 봐요. 대표님 특기 있잖아요, 저점에서 잡아서 안 놓는 거.”
“안 놓는다고 안 갈 사람이 아니라서.”
“그럼 뭐, 다른 데 뺏기든가. 진규일인가 하는 인간은 회사 기둥뿌릴 뽑아 줄 기세던데.”
“백하니. 너도 알겠지만 돈이 다는 아냐.”
백하니는 들은 척도 않고 일어섰다. 회사에 볼일이 있을 때면 늘 그렇듯, 매니저 없이 홀로 온 참이었다.
대표실 문을 나설 때였다. 웃음기를 머금은 노 대표의 목소리가 툭 날아들었다.
“곧 재계약이니, 가지 말라고 해 봐. 좋은 동료들이 있으면 또 모르지.”
*
파티는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야근하던 팀들은 물론, 촬영을 마친 최필립까지 넘어와서 사람은 계속 돌고 돌았다.
이 정도 겹경사는 소속사에서도 흔치 않다 보니, 아예 비공식 야유회가 열려 버린 것이다.
건은 라운지 한쪽에서 또 한 명의 대표 배우와 술잔을 부딪쳤다.
“신승이 형이 그랬다고요?”
“예. 뭘 보내준다고 하셨는데, 혹시 최필립 씨도 아는 게 있나 해서 여쭤 봤습니다.”
셋이라는 말에 혹시나 싶어 물어봤지만, 이쪽도 처음 듣는 눈치였다.
최필립은 샴페인을 따르며 으쓱했다.
“나야 모르죠.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게 빠른데, 꼭 이럴 땐 없어진단 말야.”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은 그 이상한 말투도 안 쓰시던데요.”
“어, 진짜요? 그럼 그 형이 비즈니스를 한다는 건데··· 뭐 하나 같이 찍고 싶어졌나, 지금이라도 박건 씨 코인 타려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예 무음으로 바꿔 놓은 문자나 메신저가 아니라 진동이다.
[경일고 진규일]
최필립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축하해. 종방연 중인 것 같은데, 끝나고 잠깐 괜찮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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