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배 (4)
* * *
“뭐, 아파트?”
전시장 한쪽의 VIP 쉼터.
박열호는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신이 나서 엄마를 끌고 구경하러 간 박선 대신, 마주 앉은 박건이 답했다.
“예. 동작구, 남향에 고층으로 골랐어요. 어머니가 한강뷰를 좋아하신대서. 입주자 엘리베이터도 네 대라 불편하진 않으실 거예요.”
“아니, 아니지, 고층이든 저층이든 무슨 상관이겠냐. 네가 활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웬 아파트를 우리한테······.”
“이번에 드라마가 잘 끝나서요. 그 동창 친구한테 보너스도 많이 받았어요.”
박열호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이마를 쓸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 아파트라니, 실감이 안 나는구먼.”
방금 전, 차를 바꾸자며 아들들에게 끌려나왔을 때도 기절하도록 놀랐다.
부인의 매장에서, 무려 벤츠 네 대를 한꺼번에 구매한다고 하지 않았나. 심지어 한영주는 그를 저쪽으로 끌고 가더니 속닥거렸다.
“잘 들어요, 박 소방장님. 평소에 타고 싶다던 모델 기억하거든요? 애들 고생한 돈이니까, 너무 욕심내면 혼날 줄 알아요.”
“어, 근데 타고 싶던 거랑 드림카랑은······.”
“이이가 진짜!”
“아이, 엄마! 어차피 큰 차이 없어, 아빠 편하게 보시게 해 드려도 돼. 모자라면 내가 보탤게!”
따끔하게 혼이 나던 아빠를 막내가 구원한 덕에, 평소 눈여겨봤던 모델보다 한 시리즈 업그레이드된 차종을 고르게 됐다.
그것만 해도 정신이 없는데, 서울 한가운데에 한강변 신축 아파트라니? 아들이 대성공한 것은 알았지만 깜짝 선물상자가 지나치게 크다.
박열호는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건아, 정말 괜찮겠냐?”
“예?”
“아직 계약 전이니까 취소할 수 있다. 아빠는 이런 거 없어도 돼, 요즘 어디 가서 너희 얘기 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동생은 형을 받치고··· 형은 동생을 챙기고, 내 아들들이지만 어쩜 이렇게 잘 커 줬는지 모를 정도야.”
“저랑 선이는 아버지 어머니가 키워 주셨죠.”
대꾸한 큰아들이 씩 웃었다. 인터뷰 때나 연기하는 작품에서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마세요. 이제 시작인데요, 뭐.”
“그래도 마음이 안 그러니까 문제지. 이 녀석들, 언제 이렇게 커서······.”
“여보,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고 잘 타고 다니면 돼요. 운전면허 다시 따느라 고생한 거 애들도 다 안다고요.”
어느 새 옆으로 온 한영주가 박열호의 손을 쥐었다. 말과 달리, 남편을 흘겨보는 눈빛은 다정하기 그지없다.
“보조장치도 좋은 걸로 다시 사 놨으니까, 출고하는 날까지 얌전히만 기다려요.”
“어, 당신이?”
“그럼 누가 샀겠어요. 뜯어보곤 모른 척은.”
“크흠, 흠! 택배상자가 쌓여 있으니까 궁금해서 그랬지.”
예전, 한창 어려울 때 박열호가 대리를 뛰려던 적이 있었다. 한영주와 아들들이 말려서 나가진 못했지만, 쭉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남편의 행색을 유심히 보던 한영주가 말했다.
“얘들아, 요즘 너희 아빠가 자꾸 어딜 가신다. 양복까지 차려입고 나가는데, 말을 안 해서 답답해 미치겠지 뭐니.”
“에이, 엄마 깜짝 놀라라고 이벤트 준비하시나 보지. 그런 건 좀 모른 척해 줘.”
“슬슬 여름인데요. 혹시 새 양복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어머니랑 같이 맞추러 가게.”
아들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박열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최근에 그··· 모 대학 소방방재학과에서 연락이 와서, 강의를 해달라더라. 확정되고 나서 얘기하려고 그간 말을 못 했다.”
“우와, 아빠아아아!”
박선이 빽 소리쳤다. “선아, 여기 어머니 직장.” 형의 말에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눈은 기쁨을 못 감추고 굴러간다.
“여보, 정말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얘기 안 했잖아요.”
처음 듣는 소식이었는지 한영주도 놀란 표정이었다. 박열호는 멋쩍게 콧등을 문질렀다.
“미안하니까 못 꺼냈지. 가장이랍시고 네 엄마만 고생시키고, 이젠 아들들 덕이나 보는 것 같아서 좀 민망하다만······.”
“또 무슨 소리야, 아빠! 형이랑 내가 그렇게 불효자식인 줄 알아?”
“···그러니까,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은퇴한 소방관들을 외래교수나 겸임교수로 초청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오퍼가 돌고 돌아 결국 들어온 것 같았다.
어느덧 눈시울이 붉어진 한영주를 박선이 부둥켜안는다. 그때, 박건이 비장하게 선언했다.
“제가 너무 오래 떠나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효도하겠습니다.”
“어딜, 군대 말이냐?”
“단기복무인데 뭘. 형, 요즘 삼사 년은 시간으로도 안 친댔어.”
“그래도··· 체감이 길었어서요. 주말엔 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죠.”
“콜, 이번엔 막내가 쏜다!”
웃고 떠드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다. 휴대폰을 보는 박건에게 박열호가 물었다.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냐? 바쁘면 먼저 일어나도 돼.”
“아, 친구네 비서실요. 어떤 걸 사면 좋을지, 품목을 물어봐야 해서.”
“품목? 뭘 또 사려고?”
전역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톡을 보낸 박건이 빙긋 웃었다.
“예. 고마운 사람들한테 선물 좀 돌리려고요.”
*
JNBC 사옥 복도.
탑처럼 쌓인 꾸러미를 든 나종모 PD가 방송국 복도를 위태위태하게 걸어간다. 마주친 동료 PD는 그 위용에 놀라 묻는다.
“나종모, 그건 웬 거야?”
“보면 몰라? 투플짜리 한우 세트지.”
“그러니까 어디서 보냈냐고, 이 사람아. 또 어디서 청탁 대신 받아먹었어.”
“어허, 어디서 협잡질을! 무려 박건 대배우님이 보낸 선물이라고, 이게.”
JNBC로 데뷔한 신인이, 이젠 방송가와 충무로를 씹어먹고 선물을 보내 왔다.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 비단옷 대신 비단으로 감싼 고기를 보낸 격이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보탠다.
“부럽네, 부러워.”
“내가 데뷔시킨 신인은 술 먹고 전화해서 진상이나 부리는데··· 누군 앉아서 한우나 꿀꺽하고, 서러워서 살겠나.”
“그러니까. 완전 은혜 갚은 까치 아냐.”
“까치는 무슨, 나종모가 흥부상이긴 한데 박건은 용이지. 이무기가 승천한 거야.”
따라오면서 떠드는 동료들에게, 홱 돌아선 나종모가 으르렁댔다.
“이 인간들아, 저리 가! 우리 박 배우 선물은 한 짝도 못 주니까!”
“어유, 저 욕심 좀 보게. 내가 더러워서 안 얻어먹는다.”
“댁들도 신인 발굴을 하시든가. 요즘 국장님이 포스트 박건 찾겠다고 난리인 거 몰라? 연출이란 양반들이 말이야, 늘 새로운 걸 찾아야지.”
구구절절 맞는 소리긴 하다. 능력 있는 놈 입에서 나오니 재수가 없을 뿐.
득의양양하게 걸어가는 나종모 뒤로, 하이에나들이 아쉬운 군침을 삼킨다.
[은혜 갚은 박건··· 이 배우가 특별하다]
[‘루머파쇄기’의 비결은 미담 제조? 박건의 보이지 않는 선행들]
[“나는 결코 은원을 잊지 않소.” 극의 명대사를 직접 보여주는 ‘갓건’식 행보]
‘백정장군’ 종영 일주일째.
박건의 보은은 새로운 화제가 되었다.
당시 함께 극을 찍던, 백여 명의 스탭들에게 고가의 패딩과 운동화를 선물한 것이 시작이었다.
나종모 PD와 은희욱 작가 등 ‘서울의 개’ 때 본인을 등용해 준 멤버들과, ‘흑의사제’며 ‘회도팀’의 제작진에게도 고급 한우 세트가 날아갔다.
사전미팅 중, 깜짝 선물을 떠안은 황창재 PD는 어안이벙벙해져서 눈만 끔뻑였다.
“회도팀 때 내가 한 게 없는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건가?”
옆의 유호영 AD가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당연히 안 되죠, PD님 ‘적당히’ 병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러니까 그거 그냥 다음 회식 때 푸세요.”
“미안하다, 호영아. 나도 고기 좋아해.”
그런가 하면··· 사적인 선물도 있었다.
DG와 혈투를 벌이던 시절, 학폭 루머 때 발 벗고 나서 준 동료들에겐 백만 원을 훌쩍 넘는 와인 박스가 전달됐다.
“무통 로칠드? 역시 마실 줄 알아. 이건 내일 아침에 다 끝내야겠다.”
“형님, 편지도 있습니다.”
매니저가 건넨 편지를 읽던 변휘승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과도한 음주 및 부적절한 여가 생활은 은퇴를 앞당기므로 주의 요망······. 야, 이건 덕담이 아니라 그냥 잔소리잖아?”
“형님한텐 덕담 맞으니까 새겨 들으십쇼. 다 맞는 말만 적혀 있는데요.”
“···종필아, 넌 누구 매니저냐?”
*
로만 엔터테인먼트 사옥, 8층의 빈 회의실에 ‘박건 사단’이 둘러앉았다.
“팀장님이 아아에··· 실장님이 라떼셨죠? 샷 두 번에 시럽 한 번!”
“아이고, 감사합니다.”
재빠른 손들이 트레이에서 커피를 골라 간다. 유준일 실장이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좀 쉬어도 되는데, 우리 박 배우님은 너무 부지런하단 말이죠. 커뮤니티에서 폭주기건차라고 불리는 거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보내 줄게요. 그··· 이건 짤방이랑 같이 봐야 진짜로 웃기거든요.”
옆에서 피식대던 공기형 팀장이 물었다.
“실장님, 그거 홍보팀이 보낸 거죠?”
“예. 제가 커뮤니티 망령이라, 웬만한 짤엔 안 웃는데 저항 없이 터졌잖아요.”
오늘은 배우의 요청으로, 차기작 확보 및 활동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자리다.
유 실장과 박선이 추려 가져온 시나리오들만 회의실 책상에 한 무더기가 깔려 있다.
커피 절반을 쭉 마시며, 건은 생각했다.
‘···이래도 돈이 남네.’
옛 스탭들, 지인이라 할 만한 배우들, 늘 고생하는 회사 직원들에게까지 선물을 돌렸지만 계좌 잔고는 여전히 빵빵하다.
‘백정장군’이 회차당 1억 이상씩 꽂아 준 것도 있고, 자르마니 앰배서더의 글로벌채널 광고료가 파리에서 터진 탓이다.
부모님의 이사와 신차 출고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아쉬운 거라면 딱 하나, 정작 중요한 사람 둘에게 선물을 못 전했다는 사실이었다.
[박건] : 백하니 씨
[백하니] : ?
[박건] :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습니까?
[백하니] : 없어요보이면다사서
[박건] : 먹고 싶은 건요? 아는 배우는 와인에 환장하던데요.
[백하니] : 누구놀려요?
[백하니] : 술병나서수액맞고왔는데
[백하니] : 진지유한테병원비청구나좀해줘요
사고가 날 뻔했던 게 신경 쓰여 보냈는데, 영 반응이 좋지 않았다.
두 번씩이나 특출을 해 준 쪽도 마찬가지다. 영상통화를 건 진지유는 쿨하게 대꾸했다.
‘저 돈 잘 벌어요.’
‘알고 있습니다. 이건 서울의 개 때부터 도와주셔서, 고맙다는 뜻으로······.’
‘원래 선배가 사는 거랬어요. 후배님은 나중에 집들이나 초대해 주세요, 이상한 선물로 찬스 낭비하지 말고.’
‘집들이요?’
‘서희도 씨가 다 얘기했어요. 남자들끼리만 신나게 놀았다던데, 저한텐 연락도 없었으면서.’
한쪽은 필요가 없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준다고 한다.
‘40% 돌파 기념’ 선물이라며 진지유에게서 명품 재킷이 왔을 때는 다소 난감할 정도였다.
‘···고생도 안 했는데, 이걸 받아도 되나?’
고민하는 그를 두고, 이미 저쪽에서는 회의가 한창이다.
공기형 팀장이 말아 쥔 대본뭉치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꼭 새 작품이 아니어도 되는데. 지금 예능 쪽에서도 블루칩을 넘어서 블랙칩 수준이라, 말만 하면 어디든 다 나갈 수 있어요.”
“배우돌 체육대회가 요즘 좀 핫하던데.”
“에이, 박 배우가 나가기엔 급이 안 맞죠. 굳이 몸 쓰는 예능을 할 필요도 없고.”
“아마 재밌어하긴 할 거예요, 형이 토크보다 활동적인 걸 좋아해서.”
흠, 소리를 낸 유준일 실장이 앞의 시나리오 더미를 휘둘러봤다.
“뭐, 예능이야 천천히 골라도 되고··· 그보단 작품이 문제네요. 이걸 건이 씨가 다 보려면 제 3의 눈을 떠야 되겠는데?”
“심안 같은 거?”
“그렇죠, 더 좋은 건 속독안 쪽.”
아저씨 둘이서 낄낄대는 사이, 박선이 다른 시나리오 하나를 골랐다.
“형, 이건 어때? 어제 줬던 MBS 법조물인데, 주연 자리 비웠으니까 언제든 오디션 보러 오래.”
‘회도팀’을 들어갈 무렵이었나. 작품을 찍기 전, 카메라를 켜고 일명 ‘느낌’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회사에도 알렸다.
논의 끝에, 작품마다 비공식 오디션을 거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매번 현장을 뛰면 탑 배우의 체면이 상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읽어봤어. 느낌이 괜찮긴 한데.”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건은 덤덤하게 말했다.
“구신승 배우가 뭔가 같이 하고 싶은 눈치여서요. 연락을 준댔으니,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아, 설마!”
의외의 인물에게서 반응이 왔다. 공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중얼거렸다.
“갑자기 기억이 확 나네. 아마 지난달 초 같은데, 구 배우가 나한테 웬 시나리오 하나를 읽어달라고 가져왔거든요.”
유 실장이 물었다.
“홍보실로요? 다른 실장들이나 본부장님이 아니라?”
“예. 심지어 시나리오도 아니었어요. 무슨 웹소설이라고 했는데, 제목이 망회돌이랬어요.”
“푸큽, 망회돌이 뭐야. 무슨 돌멩이예요?”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의 줄임말이라는데, 웃기죠? 그땐 일이 바빠서 못 보다가······.”
함께 웃던 공 팀장의 말이 문득 끊겼다. 대본을 쥔 유 실장도, 제목을 검색하던 박선도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툭,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진 컵에서 커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건은 놓친 컵을 주워들고 물었다.
“···방금 회귀라고 했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