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 끝난 뒤 (2)
* * *
“와, 이거 순 사기 아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최필립 배우.”
“형도 이럴 줄 알고 오케이한 거지? 둘이 나 몰래 짠 거 같은데······.”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이름에 신이 들어가긴 하네.”
구신승의 펜트하우스.
저녁 스케줄을 위해, 배우를 데리러 온 양 팀장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VR 고글을 쓴 채 팔을 휘적거리는 구신승은 매번 보던 장면이다. 오늘은 옆에서 최필립이 씩씩거리는 중이란 점만 다르다.
“필립 씨도 계셨어요?”
“아, 양 팀장님. 내 얘기 좀 들어 봐요. 방금 이 형한테 제대로 속았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최필립이 헛웃음을 지으며 늘어놓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하나, 구신승이 어디서 방영 편성도 안 된 대본을 구해 왔다.
둘, 그 대본이 꽤 잘 빠져서 로만 대표 남배우 셋이서 배역을 놓고 겨뤘다.
셋, 공평하게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박건이 판을 싹쓸이했다.
“···기어이 얘기했네. 아직 방송국도 안 정해진 원작자 대본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 팀장은 책망하는 눈길을 구신승에게 보냈다. 그녀의 배우는 고글도 안 벗고 태연히 대꾸했다.
“뭐 어때, 좋은 원고 썩히는 것보단 낫지.”
“잘 하는 짓이다. 그렇게 계류된 대본 캐스팅작업 미리 하는 거, 언제는 이 바닥 놈들 평균이라 싫다며?”
“군자의 소신은 계절처럼 변하는 법.”
매니저와 배우가 다투는 걸, 최필립이 손을 흔들며 끼어들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열 번도 넘게 붙었는데, 박건 씨가 다 이겼다니까?”
“전부 다요?”
“그래요! 내가 한 번만 다시 하쟀더니 몇 번을 해도 괜찮다더라고. 이건 백 퍼센트 저 형이랑 짠 거야, 아니면 독심술사든가.”
평소 담당 배우가 제정신이 아니니, 이런 상황은 자주 겪었던 바다. 양 팀장은 토라진 배우부터 달래기에 나섰다.
“필립 씨, 예전에 신승이가 보내 준 만화에서 봤는데요. 동체시력이 높으면 가위바위보도 상대가 내는 걸 보고 낼 수 있대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해서 그렇지.”
“그래요? 독심술이 아니었나?”
“설마요. 그냥 운이 좋았을 수도 있고요.”
“운은 아니에요. 하긴, 백하니 업고 순간이동하는 걸 보면 사람 아니긴 하지.”
걔가 몇 킬로인데··· 중얼거리며 끄덕이는 걸 보니, 혼자 납득한 모양새였다. VR 고글을 벗은 구신승이 최필립을 토닥였다.
“받아들여라, 선창아. 네 업보다.”
그새 말투가 달라졌다. 최필립이 인상을 팍 찌그러뜨리며 손을 치웠다.
“이 인간은 왜 또 이래?”
“네 형도 못 알아보느냐. 그러다 할아버지 앞에서 불호령이 떨어진다.”
“미친, 배역 정해졌다고 과몰입 시작했네.”
냉소적이고 직설적이지만, 최필립 역시 연기에 진심인 배우다. 여태 집에 안 갔다는 건 합류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문득 양 팀장이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근데 신승이, 망회돌 대본은 또 어디서 구했어? 나한테는 소설 원작만 보라고 보냈잖아.”
구신승은 재벌가의 적통 후계처럼 대꾸했다.
“다 방법이 있다, 수연아.”
“···수연아?”
“아, 실수. 작중 배역 나이가 좀 많아서.”
언제 열을 냈냐는 듯, 차키를 챙긴 최필립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팀장님, 나 먼저 갑니다. 못난 형 너무 심하게 혼내진 말고요.”
“예, 회사에서 봐요.”
“허허롭구나. 동생아, 벌써 형을 버리는 게냐?”
“크··· 날씨 좋다. 오늘도 많이들 버십쇼.”
*
JNBC 국장실.
눈가가 거무스름한 윤제걸 CP가 국장실 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국장님.”
“나도 온 거 보인다. 얼른 앉아.”
윤 CP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김백동이 다그치듯 물었다.
“어떻게 됐어, 하겠대?”
“예. 하겠대요.”
“뭐야, 정말로?”
“생각요. 생각해 보겠다던데요.”
“생각? 그거 미친 자식 아냐! 지금까지 시간을 줬는데 또 뭘 생각해!”
김백동 국장의 고함이 국장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 CP는 한쪽 귀를 막은 채 대꾸했다.
“구미가 딱 안 당긴다는 거죠. 지금이 제일 몸값 비쌀 때 아닙니까.”
영상판권 계약을 위해 작가와 접촉한 지 몇 달째. 처음엔 우호적인 것 같더니, 간을 어찌나 보는지 꼭 끌어안고 내놓질 않는다.
김백동 국장의 이마에 주름이 패였다.
“돈은 더 준다고 해. 제작비는 더 끌어다 쓸 수 있어.”
“돈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배우 캐스팅에 관여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캐스팅은 어차피 작감이 같이 하잖아. 최대한 반영해 준다고 하면 되지.”
윤제걸 CP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바닥을 몰라서 그런가, 어떤 배우들이 가능한지 듣고 결정하겠대요. 다른 쪽에도 똑같은 조건을 걸었을 겁니다.”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 속칭 망회돌.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대형 포털사이트 1위를 굳건하게 지키는 작품이다.
연재 중에도, 연재가 끝나고도 수많은 영상기획 스튜디오와 방송국이 접촉했지만 작가는 입을 꾹 다물고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바로 올해 초까지는.
“···어이가 없군. 그놈 얼굴은 봤어?”
“오늘 미팅은 진태가 갔습니다. 방송국 사람들 못 믿겠다고, 이 날씨에 마스크랑 목도리까지 끼고 나왔다던데요. 계약하면 그때 벗겠답니다.”
“정신머리 나간 놈. 하여간 펜대 쥐고 깔짝대는 놈들 중에 정상이 없어.”
욕을 하면서도 그만두란 말은 안 한다. 안 그래도 괜찮은 IP(Intellectual Property)가 귀해진 시대다.
방송가의 경쟁이란 본디 땅따먹기와 같다. 내가 못 먹으면 상대가 채 가는데, 휘두를 뻔했던 칼에 찔릴 때의 기분은 처참하다.
그렇기에 한 성깔 하는 김백동 국장이 당장 내버리라고 불호령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국장님도 아시는 거지. 이만한 떡밥이 달랑거리면 무조건 먹어야 된다는 걸.’
최근, JNBC 드라마국은 다소 잠잠했다.
나쁘진 않지만 좋지도 않다. 1분기는 백정장군과 하이페리온의 패악질에 새우등이 터졌고, 그 뒤 나온 후속작들도 화제성을 쪽 빨렸다.
물론 JNBC도 메이저한 케이블 채널이다. 제작비 수십 억, 수백 억이 넘는 작품들이 줄을 서서 하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송국의 문제는 항상 같다. 편성표 공백을 없애 줄, 걸출한 작품들이 드물다는 거다.
크흠, 크어흠! 김백동 국장이 불편한 헛기침으로 목을 풀었다.
“야, 제걸아.”
“그렇게 부르지 마십쇼, 벌써 무섭습니다.”
“무섭긴, 다 큰 사내놈이. 니가 갔다 와라.”
“제가 간다고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아쉬울 거 없어서 배짱 튕기는 양반한테.”
“그래도 해야지! 그게 YTS에, MBS나 SBC로라도 들어가면 어쩔 거야! 남현수 그놈이 옴니버스인지 뭔지 한다고 죽 쑨 걸 생각하면, 엉? 회사에 믿을 놈 하나가 없다.”
“남 CP는 감 다 떨어졌다니까요. CP 달고도 배우들 데리고 짝짜꿍할 줄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네가 가서······.”
김백동 국장이 또 한 소릴 하려는데 전화벨 소리가 푸르르르 울린다.
한때 직속 후배였던 데다, 정식 회의도 아니므로 이 정도는 허용 범위다. 김 국장이 눈짓하자 윤제걸 CP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지금 국장실입니다. 급한 용건 아니시면 나중에 주십쇼.”
제작본부 쪽일까. 수화기 저편에서 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예, 예? 반문만 반복하던 후배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이기환이 목소리 같은데. 제작본부에 또 뭔 일이 터졌대?”
끊자마자 묻는 김백동 국장에게, 윤제걸 CP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답했다.
“···로만에서 연락이 왔다는데요? 혹시 망회돌 계약은 끝났냐면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떡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 김백동 국장의 눈빛이 번득였다.
“해. 거의 됐다고 하고, 누굴 줄 거냐고 해. 박건이면 좋고 구신승이나 최필립도 괜찮다고. 메인만 주면 나머진 우리가······.”
“전부 다 하고 싶대요.”
“뭐?”
“주연 삼형제 있잖습니까. 거기에 전부 들어갈 의향이 있다네요, 방금 말씀하신 세 명이.”
탐나는 작품이 있을 때, 소속사들이나 탑 배우들이 알음알음으로 ‘사단’을 짜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대표 배우급 셋이, 심지어 계약도 안 된 작품을 물망에 올렸다? 돈 냄새를 넘어 못 잡으면 내년까지 후회할 건수다.
“뭐 해, 당장 가! 로만이고 그 작가 놈이고 싹 모아다 중매를 서야 될 거 아냐!”
“···이젠 맞선까지 시키십니까?”
*
“그 상태죠?”
“말해 뭐해, 딱 봐도 그 상태네.”
박선이 넌지시 묻자, 공기형 홍보팀장이 냉큼 받았다.
유준일 실장 대신 따라온 문우재 실장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 상태? 그게 뭐예요?”
맞은편, 미팅을 온 배우는 대본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씩 웃은 공 팀장이 전구 갈듯 손목을 휙휙 돌렸다.
“아, 박건이라는 배우가 이렇게··· 어떤 포인트에 홱 돌아서 꽂히는 때가 있어요. 흑의사제 때부터 그러지 않았나?”
“형 데뷔작이 서울의 개니까, 처음은 느와르였죠. 그 다음이 마왕이었던 것 같은데······.”
“용사랑 악마.”
건은 여전히 대본을 보며 대꾸했다. 손가락을 꼽아 가면서 순서를 외우던 박선이 반색했다.
“맞아! 이번엔 망나니지? 유 실장님이 형은 재벌물 평생 안 찍을 거라고 하셨거든. 분명히 주인공 성격에 꽂혔을 거랬어.”
“아니, 망나니도 별로야.”
이곳은 일산, EBC 사옥의 미팅 룸이다.
교육방송공사답게, 인기 캐릭터 인형들이 로비뿐 아니라 내부 곳곳에 보인다.
하필 교육방송국 사옥에 방문한 것은 저기 있는 문우재 실장 덕분이었다.
‘어, 박건 씨! 혹시 다큐 쪽은 관심 없죠?’
‘망회돌’ 회의를 마치고 회사를 나오는데 인사만 몇 번 했던 실장이 불렀다.
‘다큐멘터리 말입니까?’
‘예, 찐퉁 말고 미니시리즈 느낌 페이크 다큐. 내가 잘 아는 EBC 관계자가 말 좀 전해 달라더라고요, 공익광고 느낌으로 경찰관이나 소방관 역할 맡으면 진짜 잘 뽑힐 것 같다고.’
두 형제는 서로를 바라봤다. 난감한 요청이라고 생각했는지, 문 실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됐어. 말만 꺼낸 거니까 난 그냥 갑니다. 이번 축하 선물은 준일이한테······.’
‘관심이 있습니다.’
‘······엥?’
그렇게 며칠 뒤, 문 실장과 공 팀장까지 동반해서 EBC로 미팅을 오게 된 것이다.
아이돌 쪽 스케줄 관리를 총괄한다던 문 실장이 싱글벙글 손을 비볐다.
“신기하네, 신기해. 하필 딱 두 분 아버님이 소방관이라니, 어디서 인터뷰한 적 없죠?”
섭외와 계약을 그렇게 잘 따낸다더니, 곧장 써먹을 궁리부터 한다. 건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예. 데뷔작이었나, 촬영현장에서 한번 얘기한 적은 있습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해요. 아주
“박 배우, 한번 믿어 봐요. 이쪽 문 실장님도 회사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해.”
맞장구를 친 공 팀장이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그나저나··· JNBC 쪽에선 오늘 내로 답신을 준다던데, 그거 괜찮겠어요?”
“어떤 것 말입니까?”
“그, 팟 하는 스파크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해 봐야 알 수 있다면서.”
‘회색도시 팀장님’ 때 워낙 화제가 돼서 그런가, 이제 회사 사람들 모두가 그의 작품 선택 기준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혹시나 계약 이후, 합기가 안 느껴지면 작품을 못 찍겠다고 할까 걱정하는 거겠지.’
죽음마저 거듭되면 익숙해진다 했었나.
이젠 시나리오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이 온다. 마치 대악마들의 지근거리에 당도하여 그 회차의 명운을 점치던 순간처럼.
‘이번 시나리오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필요한’ 작품이다.
작품 도중··· 철왕국의 용사행과 조응(照應)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옛 권능이 더욱 맹렬히 타오른다는 사실은 진작 깨달았다.
하물며 회귀가 아닌가. 한 번 이상 죽어 본 인간으로서, 저 배역은 놓칠 수 없다.
“괜찮을 것 같던데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찍어 볼 생각입니다.”
“오, 이렇게까지 적극적이라고요?”
공 팀장이 휘파람을 불 때, 미팅 룸 문이 열리며 작가진과 관계자들이 들어왔다. 문 실장도 마주 일어서면서 손을 흔들었다.
“최 PD님, 박 작가님!”
“아이고, 문 실장님, 귀한 손님들이랑 같이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박건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영오 PD는 둥글고 선한 눈매의, 딱 교육방송에 어울리는 인상의 사내였다.
양쪽 관계자들 소개가 끝나자 본격적인 미팅이 진행되었다. 계약 여부와 굵직한 컨셉들을 정하는 자리인 만큼, 안건이 많았지만 대부분 로만에 맞추는 쪽으로 흘러갔다.
애초 모시기 힘든 몸이다. SBC 쪽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만 해도 좋은 아이디어라며 박수를 치면서 감탄했다.
“어쩐지··· 아버님이 소방관이셨군요. 기회가 되시면 한번 모셔도 영광이겠습니다. 이런 모큐멘터리는 진정성이 또 엄청난 무기거든요.”
“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그럼 편성 예정일이랑 기획해 둔 스토리는······.”
오가던 이야기들이 순조롭게 끝나고, SBC 쪽 관계자들은 흡족한 얼굴로 떠났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들어온 연락들부터 확인하던 박선이 외쳤다.
“형, 유 실장님한테 연락 왔어! JNBC 쪽이 거의 판권 따냈다고, 원작자랑 배우랑 삼자대면으로 미팅하고 싶대.”
“잘 됐네. 구신승 씨랑 최필립 씨도 같이?”
“어, 그건 모르겠고··· 일단 형을 언급하긴 했나 봐. 작가도 꽤 적극적이었다는데?”
문 실장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끼어들었다.
“완전 가져온 것도 아니고, 거의? 이거 냄새가 딱 나는 게, 오케이 못 받아서 자기들을 우리한테 끼워 팔려는 것 같은데······.”
“김백동 국장이 은근 머리를 잘 굴리잖아요. 일단 가 보고, 분위기 봐서 더 받으면 되죠.”
매니저 실장과 홍보팀장이 머리를 맞댔지만, 정작 배우는 별생각이 없었다.
‘설득도 대신 해 줄 수 있는데.’
계약이 덜 된 게 무슨 문제겠나. 작품만 찍을 수 있으면 얼굴마담 역할도 대환영이었다.
방송국 로비를 지나며, 휴대폰을 본 박선의 표정이 갑자기 확 밝아졌다.
“방금 또 연락 왔거든? 담당 PD님도 우리가 아는 분이시래!”
“아는 분?”
“응. 올해도 레전드 욕탕 씬 찍자시던데, 영화 같은 거 찍지 말고.”
저렇게 말할 사람은 한 명뿐이다. 건은 미묘한 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보았다.
“설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