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05화 (105/122)

망나니와 소방관 (1)

* * *

“으쌰, 우리 건이 씨! 어화둥둥 박 배우!”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시 보니 얼마나 좋아? 역시 물 구린 충무로보다는 드라마판이지!”

“···혹시 구신승 배우랑 작업하셨습니까?”

나종모 PD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나는 구신승 씨랑 얘기해 본 적도 없는데··· 우리 둘 얼굴이 닮았나?”

“아닙니다. 제가 보낸 한우가 문제였군요.”

“아냐, 아냐. 그건 아주 잘 먹었어. 가족들이랑 구워 먹었는데 아버지가 감탄하시더라고, 소싯적에 축산물품질평가원 호랑이로 불리던 분인데.”

그들은 지금 JNBC 사옥 근처, 미팅이 예정된 고급 일식집 뒤에 서 있었다.

JNBC 쪽에서는 나종모 PD와 관계자 두엇이 왔고, 로만에서는 유준일 실장 대신 박선이 팀장 권한으로 참석했다.

이성철 본부장은 직접 전화를 걸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손대는 것마다 대박을 치는데, 배우 전속이라도 로드로 치긴 뭐하지. 이젠 선이 씨가 박 배우 계약도 케어해요. 어차피 유 실장이나 문 실장 없어도 잘했잖아.

이제 곧 작가 쪽 매니지먼트 사람들도 도착할 시간이다. 예전이었다면 잔뜩 긴장했겠지만, 지금 동생은 여유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하긴, 그간 산전수전을 다 겪었으니까.’

제 배우의 작품만 벌써 4개에, 계약 관련 미팅은 한 달에도 수십 번씩 잡힌다.

박건의 매니저가 우애 좋은 친동생임은 타 팬덤들마저 안다. 더 이상 선배에게 폭행당하던 유약한 로드매니저가 아닌 것이다.

셔츠 옷깃을 고친 건이 물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뭐··· 흙 안 퍼먹을 정도론 살았죠, 서울의 개 반타작 정도는 했으려나? 건이 씨 없는 나종모는 그냥 세모야. 동그라미 말고 세모.”

함께 찍은 작품 이후, 영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했던가. 나종모는 허공에 채점하는 시늉까지 하며 허허 웃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박선이 속삭였다.

“형, 피디님이 요즘 많이 힘드셨나 봐. 원랜 안 저러던 분이셨는데······.”

“한우가 상해서 그래.”

“응?”

박선이 갸웃대는 사이, 머리를 벅벅 긁은 나종모 PD가 담배를 꺼냈다.

“한 대만 좀······.”

“예, 괜찮습니다.”

“내가 원래 긴장을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혹시나 해서 한 갑 샀지. 충무로 배신자가 JNBC까지 말아먹을 거란 소릴 다 들었다니까.”

연기가 기침처럼 퍼져나간다. 건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처음부터 PD님이 맡으시려던 작품입니까?”

“아니, 난 건이 씨랑 망회돌 얘기도 그때 처음 들었어. 갑자기 윤 선배가 부르더니 여기 미팅 가라더라고, 국장님 지시라면서.”

“어째서요?”

“모르지. 작품 안 들어간 놈들이 몇몇 되긴 하는데··· 내가 예뻐 보였을 리는 없고, 건이 씨랑 친분 때문 아니겠어?”

일리 있는 얘기다. 감독과 연이 있는 배우는 대체로 호의적이니까. 오늘 미팅에서도 내심 기대하고 보낸 인선(人選)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왔더라도 같았겠지만.’

슬슬 들어갈 시간이었다. 나 PD는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일회용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불빛 비치는 앞뜰을 가로지르며, 박선이 중요한 정보를 물었다.

“아, 근데 그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신대요?”

“나도 몰라요. 닉네임만 알지.”

이쪽은 닉네임도 몰랐다. 작가 필명을 묻자 나종모 PD는 씩 웃었다.

“윤발이에요.”

“예?”

“윤발25, 그게 필명이라고. 어렸을 때 홍콩영화 좀 봤나 본데, 아마 내 연배쯤 됐겠지?”

*

나종모 PD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와, 진짜 박건이다!”

소설의 원작자, ‘윤발25’는 머리를 새빨갛게 염색한 청년이었다.

다다미방의 문을 드르륵 열어젖히고 들어오더니 박건을 보고 탄성부터 올렸다.

“장난 아니시네요. 찍으신 작품들 다 봤는데 화면발 안 받는 거였어요.”

“감사합니다. 저도 작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종모 PD와 박선의 눈이 마주쳤다. 웬만한 배우로는 눈도 까딱 안 하고, 무엇보다 ‘방송쟁이’들을 불신한다는 귀띔을 들은 터다.

‘초장부터 반응 좋은데? 건이 씨가 방송가 치트키여서 그런가.’

‘그러게요. 둘이 잘 맞았으면 좋겠다.’

자길 손호윤이라고 소개한, 윤발25가 왜 우호적이었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인사가 오가자마자 출신을 밝힌 것이다.

“제가 엑스트라 일을 오래 했어요.”

“드라마 말입니까?”

“영화랑 드라마 안 가리고 했죠. 옛날엔 생활비가 항상 쪼들렸거든요. 그냥 알바보다 시급이 높대서 시작했는데, 방송국 놈들은 스탭이고 감독이고 갑질 쩔더라고요. 배우한테는 아예 사람 취급도 못 받았고.”

앞에서 듣고 있던 방송국 놈들이 저마다 헛기침을 흘렸다. 아예 다른 분야 사람이라 그런지, 말에 필터가 없다.

콧볼에 피어싱을 한 빨강머리가 씩 웃었다.

“서울의 개 때였나? 커뮤에 올라온 짤 보고 극호로 변했어요. 배우님 같은 사람 있었으면 대기하는 시간도 살살 녹았을 텐데.”

건은 고개를 짧게 숙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할 게 없어서 미리 가 있던 건데요.”

“에이, 좌우간 박건 이름 듣자마자 미팅 잡았어요. 원랜 MBS 쪽으로 넘길랬거든요, 형기웅은 무조건 꽂아 준다길래.”

관계자들이 시선을 주고받는다. 저 얘길 꺼내는 걸 봐선, 입찰 레이스 최종 승자는 그들일 가능성이 높다.

나종모 PD가 호탕하게 끼어들었다.

“아이고, 서로한테 좋은 날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씩들 받으시죠. 술이 안 식어야 시청률도 쭉쭉 올라간답니다.”

“근데 누구세요?”

“어어, 방금 명함도 드렸는데! 저 JNBC 나종몹니다. 세모 네모 말고 종모요, 하하핫!”

“···나 PD님, 제발 진정을 좀······.”

방송가에선 이런 일이 왕왕 있다.

자타공인 탑 스타가 한때 은혜를 입은 감독의 작품에 노 개런티로 출연하고, 구두쇠 투자사 대표가 배우 한 명 합류했다고 돈을 푼다.

개인적인 팬심의 힘이랄까. 지금 상황도 딱 그 짝이다.

“조건은 마음대로 하세요. 방송국도 먹고 살아야죠.”

“작가님, 그래도 원하시는 비율이······.”

“저 돈 많이 벌어요. 몇 푼 갖고 밀당하느니 드라마나 잘 찍어 주세요.”

불신이 호의로 돌아섰으니, 비즈니스는 날개 돋친 듯 진행된다.

곧 기획사, 방송국, 제작사까지 낀 술판이 벌어졌다. 윤발25는 내일도 신작을 연재해야 한다며 사이다만 홀짝거렸다.

얼굴이 불그레한 JNBC 홍보과장이 물었다.

“저, 작가님 필명이요. 왜 25입니까?”

“제가 글을 18살 때부터 썼어요. 처음엔 윤발18이었는데 벌써 25까지 왔네요.”

“엇, 그럼 윤발은요? 나 PD님이 홍콩영화 팬이실 거라고 하셨는데.”

“별 의미 없는데··· 그냥 이름 끝 글자랑 성을 반대로 한 거예요, 윤손은 이상하잖아요.”

윤발25, 손호윤은 텐션이 좋았다. 말이 좀 툭툭 튈 뿐, 기본적으로 유쾌한 성격으로 보였다.

실무는 함께 온 매니지먼트 담당자에게 맡겨 놓고, 본인은 회와 튀김을 해치우는 데만 집중하는 모습도 그랬다.

“2차, 3차 유통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무조건 멀리로 팔아야죠. 망회돌이 대만이랑 일본에서도 열풍 아닙니까. K-웹툰에 이어 웹소설이 강세니까, 본 채널 방영 끝나자마자 한 50개국만 후공개해도······.”

건은 다다미룸 안을 슬쩍 훑었다. 옆자리의 나 PD부터 저 멀리 JNBC 관계자들까지, 다들 일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작가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서,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던 윤발25가 고개를 들었다.

“네, 신작 결말 가르쳐 드릴까요?”

“아뇨. 혹시 철왕국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원작 작가는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철왕국······? 모르겠는데요, 딱 판타지 배경 느낌이 나는데.”

“그렇군요. 헷갈렸나 봅니다.”

새삼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회귀를 썼다고, 드마마 원작자가 그와 같은 차원전이를 겪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눈을 굴리던 윤발25가 물었다.

“근데 배우님, 원래 이쪽 장르를 좋아하셨어요? 바로 출연 결정하셨다기에 놀라서. 저도 1억 뷰 찍기 전에는 서브컬쳐 취급 엄청 받았었거든요.”

“주인공의 두 번째 삶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 회빙환 취향이셨구나.”

익숙한 맛이 또 좋죠, 이해했다는 듯 윤발25가 중얼거렸다. 건도 마주 끄덕였다.

“두 번만 살아도 된다니, 부럽기도 했고요,”

“예?”

“아닙니다. 저희 회사에 구신승이라는 배우가 있는데, 그 선배가 이번 작품을 추천했습니다. 같이 나가자면서요.”

“들어 본 것 같아요. 유명한 사람 아닌가?”

“나중에 한번 대화해 보시죠. 작가님이랑 잘 통할 겁니다.”

*

“한답니다.”

윤제걸 CP가 말하기 무섭게, 들고 있던 휴대폰의 주인이 바뀌었다.

두툼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낚아채 간 김백동 국장은 공치사부터 남발했다.

“종모냐? 잘했다!”

-어, 예··· 국장님도 같이 계셨네요.

“그래, 아무튼 종모 인마! 너만 믿고 있으니까 그놈 잘 컨트롤해서, 박건 그 친구랑 또 작품 하나 만들어 봐!”

-술은 제가 마셨는데 국장님이 더 취해 보이십니다. 윤 선배랑 한잔 하셨습니까?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밝다.

아래 CP들을 다 패스하고 저놈을 보낸 김백동의 선택이 옳았다는 뜻이다.

“캐스팅 쪽은? 원하는 게 있대?”

-원하긴요, 로만 3인방이 다 올 기세던데요. 잘하면 특전대 라인업 꾸릴 수 있겠습니다.

자세한 보고는 내일 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윤제걸 CP가 말했다.

“역시, 나 PD를 보내길 잘했습니다. 박건이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챙기는 성격이라더군요.”

“은혜를 안 잊는 놈들은 원수도 안 잊어. 근데 뭐, 박건 신인상을 뺏어서 장지훈이한테 줘? 두고두고 기둥뿌리 뽑힐 일이지.”

“예? 신인상이요?”

김백동 국장은 거칠게 손을 저었다.

“그냥 하는 얘기야. 계약했다니까, 가서 각색할 작가나 알아봐. 바로 대본 뽑힐 수 있게 새끼작가들 빵빵한 양반으로.”

“한선주랑 은희욱은 다른 작품 쓰고 있다고 했고··· 아, 최근 여 작가가 한가한 것 같았습니다.”

“여진주?”

김백동의 표정이 묘해진다. 숙수가 한 상 거하게 차려서 내온··· 그러나 독이 있을지 모를 복요리를 마주한 얼굴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라도 곱다. 이내, JNBC 수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뭐, 현장에선 좀 다투는 것도 맛이지.”

*

박건의 다음 행보가 떴다.

재벌물, 그것도 웹소설 원작이다. 쉬지 않는 ‘시청률 고래’의 폭주에 타 방송국 관계자들은 원성만 터뜨릴 뿐이다.

“미친··· 또 찍는다고? 백정장군 끝난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상업영화 한 편을 반년에 해치우는 괴물이야. 두 달이면 많이 쉬었지.”

“채널이랑 시간대는? 제발 우리 쪽 신작이랑 겹치지만 마라.”

“JNBC 월화. 나종모 저 운 좋은 놈, 어쩌다 거물 신인 데뷔작을 맡아서······.”

[박건, ‘망회돌’ 출연 확정··· “웹소설 원작은 처음이지?”]

[조선의 독립투사, ‘백정’에서 재벌가 ‘망나니’로 변신 아닌 변신]

[웹소설 신드롬 일으킨 ‘망나니 재벌 3세’, 안방극장에서도 고공행진 이어갈까]

[로만 남배우 ‘빅3’ 동시 출격 예고··· 원작의 재벌 삼형제 캐스팅에 관심 집중]

대형 포털 사이트, 그중에서도 연예란 기사는 불판이 식을 일이 없다.

배우든 아이돌이든 마찬가지다. 팬덤끼리의 싸움과 그 틈을 노린 분탕꾼, 인신공격부터 박고 보는 악플러들의 전쟁터인 것이다.

오늘 1위를 차지한 박건의 기사에도 반나절 만에 댓글 수백 개가 달렸다.

-꽃보다 박건. 반박시 똥멍청이 (Best)

└여기서까지 주접은 좀....

└└보기싫으면 나가주세요

-오 ㅋ 갑자기 재벌물을 찍네요

└하이페리온 부관참시 ㅋㅋㅋㅋㅋ 니들 재벌물 구렸으니 본인이 보여주겠다 이거임

-개인적으로 검사나 판사.. 법정드라마가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숩아숩^^

└또와르 또릴러 또찰 또검 멈춰!

└└근데 또 찍네... 다른 배우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배우가 작품 한다는데 왜요?

└└└└동종업계면서. 동업자정신이 없음. 양보할줄도 알아야지. 저만잘나가면 다인가.

“예, 잘 봤고요. 이제 애꿎은 배우 그만 패고 현생이나 살러 가십쇼······.”

박건의 1세대 팬, 이제 ‘열혈건이’ 팬카페 스탭까지 맡고 있는 한지영은 쓴 댓글을 등록했다.

“하, 내려도 내려도 계속 나오네. 남 잘되는 거 보기 싫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말과 달리, 별달리 짜증스러운 기색도 없다. 서당 개도 이 년이면 천자문을 떼는 법.

데뷔 초 박건의 팬덤은 적이 많았다. 한줌일 때부터 험한 싸움을 거듭하다 보니, 저 정도 악플엔 콧방귀도 안 나오게 된 것이다.

“연예투데이, 스포츠매일, 얘네들은 이제 좀 잠잠해진 것 같고······.

한때 끈질기게 비난성 기사를 쏟아놓던 신문들도 요즘은 조용하다. 한지영은 모니터링을 멈추고 충전 중이던 스마트폰을 뽑았다.

띠링, 화면이 밝아진다. 아티스트의 팬질을 자유로이 하는 오픈채팅, 일명 ‘안고독방’이다.

팬카페 회원들은 물론 그녀의 친구 몇몇도 익명으로 들어와 사담을 나눈다.

듣기로는 로만 관계자도 있다는데, 가끔 제법 정확한 정보가 공유되기도 한다.

[◆안고독한 박건방◆]

494/500

[겁없는 반달가슴건] : (인증샷 사진)

[겁없는 반달가슴건] : (인증샷 사진)

[겁없는 반달가슴건] : 모아보내기 죄송요 ㅠㅠㅠㅠ EBC 앞에서 팬들 사인해 줬다는데 아시는 분?!

[용사님나가신다] : 오잉 채널은 JNBC일 텐뎅

[북극건] :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우연히 지나가다 해 준 거 아닐까요?

[건건펀치] : (자르마니 촬영현장 사진)

[얼굴천재천만배우] : 와 그와중 새광고 존잘...

[스캔들메이커(희망중)] : EBC였으니까 왠지 다큐 찍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 모큐멘터리나

[스캔들메이커(희망중)] : 얼른 오피셜 떴으면 좋겠다 ㅎ.ㅎ

[스캔들메이커(희망중)] : (어린이용 플라스틱 삽 사진)

[스캔들메이커(희망중)] : 소녀... 이곳에 눕겠습니다...

[건지영건치영] : 스메희님 저 삽은 볼수록 진심 같네욬ㅋㅋ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