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나니와 소방관 (2)
*
“흠흠, 으흠흠흠······.”
박열호는 요즘 신이 났다.
얼마나 신이 났는가 하면, 원래 부르던 키에서 두 음정은 더 올릴 정도다.
새 차를 타고 출근하는 내내 열린 창으로 옛 가요가 흘러나온다.
-봄날아, 물결처럼 왔느냐··· 내 청춘을 머금고 돌아왔구나······.
들뜨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아들 둘이 모두 장성하여 큰 성공을 거뒀는데 어찌 어깨춤이 안 날까.
건강하게만 커 줘도 기뻤겠지만··· 큰 녀석은 한국 최고의 배우가, 작은 놈은 형만큼 유명한 매니저가 됐다.
‘밖을 나가면 알아보는 자식들이라니, 부모로서 이런 복이 또 없지.’
길(吉)한 일은 한꺼번에 몰린다던가.
집도 차도 좋지만 가장 보람찬 소식은 따로 있다. 오랜 공백을 깨고, 마침내 서울 외곽의 모 대학에 출퇴근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 시범강의를 마친 뒤, 학교 관계자는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박 교수님, 역시 현장 출신이셔서 디테일이 남다릅니다. 학생들 반응도 아주 좋고요.’
‘과찬이십니다.’
‘어우, 진담인데요. 은퇴하신 뒤 쭉 교육 쪽에서 계셨었나 봅니다. 이런 분을 이제야 모실 수 있게 돼서 영광이에요.’
그는 빙긋 웃기만 했다.
손 하나가 없으면 생각보다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식당 잡일 등 몸 쓰는 쪽은 물론, 대리기사나 택시기사도 어렵다.
장애인 면허증을 다시 따고, 운전적성 정밀검사를 마치고, 보조기까지 끼고 갔는데 운수업체 취업이 안 됐을 때는 허탈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지. 외팔이 기사는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것이 옳다. 반평생을 소방관으로 살며··· 인간의 두려움은 수없이 접하지 않았던가?
타인의 것이든, 스스로의 것이든.
“···이상, 불꽃연소와 작열연소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불꽃연소는 발염연소와 표면화재, 작열연소는 무염연소와 표면연소 및 심부화재로 구분되며······.”
오늘의 두 번째 수업.
무형관 강의동, 102호에 모인 소방방재학과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칠판 앞에서는 한쪽 소매 끝이 헐렁한, 쥐색 양복의 박열호가 슬라이드를 넘긴다.
“하여, 작열연소 중 훈소는 조건에 따라 불꽃연소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발견이 어려운데다 장시간 잠복 후 재발화할 확률도 있죠.”
화마의 구분을 설명할 때, 강의실 뒤쪽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지각한 학생인가? 수업을 진행하던 박열호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강의실은 어두컴컴하지만, 익숙한 실루엣을 알아보기엔 슬라이드 불빛으로 충분하다.
‘저 녀석이 왜 여길······.’
잠시 후,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빠져나가자 지각생이 슬그머니 일어선다.
청바지에 청남방. 대학 잡지의 표지에서 뛰쳐나온 차림의 박건이 싱그러이 웃었다.
“수업 잘 들었습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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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녹음이 굽어보는 산책로를,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걷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래요. 점심은 먹었나요?”
“예, 방금 먹고 나왔습니다.”
무형관 뒷길은 인적이 드물다. 마주친 학생 몇몇이 인사하지만, 선글라스를 쓴 키 큰 남성에겐 곁눈질만 건넬 뿐이다.
충무로의 탑 스타가 설마 여기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웬일이냐? 선이도 없이.”
“선이는 미팅이요. 요즘 일을 엄청 잘 해서, 조만간 다른 배우까지 맡게 생겼어요.”
캠퍼스 외곽으로 접어들며, 박건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박열호는 흐뭇하게 끄덕였다.
“그 녀석이 똑 부러지긴 하지.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유약한 줄 안다만, 네 동생만큼 강단 있는 놈도 몇 없을 거야.”
“저 때문에 항상 양보했으니까요. 이제부터라도 인정받아서 다행이에요.”
박건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햇살이 눈썹뼈에 맺혔다가 뺨을 타고 흘렀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다녀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딜, 군대에 말이냐?”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군대든, 다른 어디가 됐든요. 그럼 아버지도 지금보다 훨씬······.”
“그런 생각 마라, 일어날 일은 일어나.”
“아버지.”
“난 내가 정년까지 출동할 수 없을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간 은퇴했을 거야.”
박건의 시선이 빈 소매에 머물렀다.
불타 절단한 손, 저 오른손은 그들 가족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지독한 부채감이다.
잃은 손과 망가진 호흡기, 화마와 싸우며 입은 후유증은 완벽히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가 없었다면 그 역시 이겨내기 어려웠을 터였다.
“건아, 아까 수업에서도 들었잖냐. 소방관은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 나보다 더한 부상으로 은퇴한 대원들도 많단다.”
그들의 가정이 변한 이유기도 하다. 과묵한 장남과 손을 잃은 아버지 대신, 나머지 가족들이 의식적으로 더 밝아졌다.
팔불출 남편와 잔소리꾼 아내, 여태 반말을 쓰는 막둥이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박건은 대답 대신 불쑥 말했다.
“아빠, 저 다큐멘터리 찍어요.”
박열호는 앞의 단어에 더 놀랐다. 고등학교 진학 전부터 아버지라고 부르던 큰아들이다. 둘째랑 같이 다니더니 물들었나?
“드라마라더니, 그새 바뀐 거냐?”
“그건 JNBC, 새로 찍는 다큐는 EBC요. 소방의 날 65주년이라고, 소방관 소재 모큐멘터리로 갈 것 같아요.”
“11월까진 한참 남았는데?”
“불이 겨울에만 나나요, 뭐.”
전역 후, 한동안 괴상하던 말투도 이젠 제법 또래 같아졌다.
‘주변에 아이돌이랑 배우가 많다더니, 좋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야.’
속 깊은 건 아들들의 공통점이라지만, 박건은 너무 철이 빨리 들었다.
그의 강직함을 쏙 빼닮은 첫째 아닌가. 부조리에 맞서 싸워 줄 수 없었던 아들의 고교 시절도 마음에 걸렸다.
창진그룹의 손자 덕에, 그 구의원 아들놈이 뒤늦게나마 대가를 치렀다지만······.
“···까, 아빠도 한번 놀러오세요.”
박열호는 멈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처음 듣는 말이 들려서였다.
“음? 촬영장에 말이냐?”
“예. 오셔서 연기 자문이나 피드백을 주셔도 좋고요. 아마추어가 아무리 잘 따라한대도 전직 소방장만 하겠어요.”
아들은, 이제 자신의 세계로 아버지를 초대한다.
*
“야, 공고 떴다!”
한예대 연영과 과방.
고학번 학생들이 공고가 뜬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맞댔다.
“망회돌? 캐스팅 목록도 나와 있어?”
“쟤는 잠 덜 깼냐? 로만 3인방 확정이라고 오피셜 뜬 게 언젠데.”
“미친, 셋 다 쌉연기파들이잖아!”
한 여학생이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한창 소속사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중이었다.
“얼굴··· 아니, 연기만 봐도 도움이 되지. 오디션 때 한 명이라도 와 줬으면 좋겠다.”
“아서라, 멘붕해서 입도 못 뗀다.”
오디션 날짜가 공개됐다.
돌아오는 월요일, JNBC 사옥 스튜디오 3번.
당연히 배역 목록에 주연은 없다.
매번 카메라테스트를 본 박건이 특이한 경우일 뿐, 하다못해 10분짜리 웹드라마라도 주연급은 수면 아래서 결정된다.
방송국과 투자사, 소속사와 작감, 몸값 높은 모 배우들의 입김에 의해.
“그래서, 팀은 어떻게 꾸릴 생각이냐?”
옥상의 흡연장. 담배에 불을 붙인 윤제걸 CP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나종모 PD는 고개를 젓는다. 새 작품에 들어가기 전, 다시 전자담배로 갈아탄 참이다.
“원작자 쪽에서도 별 디렉션이 없어서요. 주조연들 짱짱하게 데려오고, 나머진 주머니 사정 봐서 잘 하는 애들로 뽑아야죠.”
“여 작가는?”
“알아서 하라던데요. 작업 중인 대본도 많으니까 일일이 물어보지 말라고.”
“어이고, 다 밑에 애들 시키면서 유난은··· 괜히 참견 안 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이러면 제작진 입장에서야 반갑다.
작품 팔아 놓고 난리치는 원작자, 각색을 명분으로 캐스팅에 참견하는 작가와 작업하고 나면 멀쩡하던 머리숱이 후두둑 빠진다.
“그날 같이 들어갈 테니까, 잘 뽑아 봐. 국장님이 나종모 팍팍 밀어 주라더라.”
“흠, 선배가 오면 좀 걱정되는데.”
“네 밥그릇 안 뺏는다, 자식아!”
16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다. 분량이 많은 만큼 인물들도 많고, 은씨 삼형제와 회장을 제외해도 주연급 조연은 넘쳐난다.
배우들이 치열하게 연습하는 동안, 이곳저곳으로 캐스팅 시나리오가 날아갔다.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 푸힛, 뭐 제목이 이래?”
모 광고촬영장 대기실. 태블릿 PC로 해외직구에 한창이던 여배우, 최양영은 겉장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매니저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요즘 웹소설은 다 이렇대. 그나마 이 정도 제목이면 멀쩡한 거야.”
“그래도오, 너무 웃기잖아. 채널 돌리다 나왔으면 신기해서 보긴 하겠다.”
“제목은 웃긴데 내용은 괜찮아. 로만 남배우 삼인방이 다 나온다는 드라마가 이거더라고, JNBC에서도 꽤 밀어줄 모양이던데.”
오늘 광고 컨셉도 ‘유혹’이다. 길게 뺀 아이라인에, 치크를 볼이 아닌 눈가에 터치해 고혹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몇 장을 읽던 최양영이 울상을 지었다.
“뭐야, 또 나쁜 년? 나 이번에도 악역 하면 사우나에서 달걀 맞을 텐데······.”
“달걀은 데뷔작 때부터 맞았잖아. 광장시장에서 식사하시던 할머님한테.”
“오빠, 너무 바른말만 하면 여기가 떨어진대. 사과처럼 똑.”
긴 손가락이 매니저의 목을 스친다. 진심 아닌 농담에, 대수롭지 않은 동작인데도 도발적인 매력이 뚝뚝 떨어진다.
괜히 악녀 넘버원이니, 연예계 최고 불여우니 하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내 목 떨어지면 불편한 건 최영이고.”
극 속에서는 천하의 나쁜 년이지만, 실제 배우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다. 그녀를 잘 아는 매니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할 거야? 며칠 전에 대표님이 제로픽쳐스 영화도 하나 잡아 주셨던데.”
“흐응··· 어떡할까. 두 작품 다는 안 되겠지?”
“그러다 박건한테 돌 맞는다.”
매니저가 헛웃음을 지은 순간, 대본을 바삐 훑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빛난다.
“좋아, 그럼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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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한테도 왔나?”
한편, 서울과 멀리 떨어진 충남.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수상 방갈로에도 대본은 날아든다.
60대쯤 됐을까··· 흰머리 섞인 세 사내가 나란히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나는 안 왔어. 백장협이보다는 석필호란 얘기지, 나 PD가 원래 피도 눈물도 없거든.”
원로배우 백장협의 옆에 앉은, 고집스러운 인상의 사내가 흐물흐물하게 웃었다.
“칭찬인지 멕이는 건지 모르겠군.”
“멕인다고?”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이야. 아닌 척 하면서 놀린다는 게지.”
“···나잇값 좀 하게, 이 환갑아.”
‘회장님’ 전문 배우 석필호.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틀어 대한민국에서 재벌 회장님 역할만 수십 번을 한 베테랑이다.
그 옆에서는 김인룡 감독이 껄껄 웃는다. 칸을 세 차례나 다녀온 거장과, 두 원로배우가 모처럼 오래된 교분을 즐기는 중이다.
“석필호 젊게 사는 건 우리 연배 사람들이면 다 알지. 이번에도 회춘하러 갈 것 아닌가?”
“아직은 몰라. 답을 안 줬거든.”
“웬만하면 같이 찍어. 내가 말했잖나, 거기 박건이라는 친구가 아주 물건이라고. 까마득한 후배한테 진중한 맛을 좀 배워 오게.”
석필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어렸다.
“백 늙은이 칭찬이 끊임없군. 자네 안사람 얘길 좀 그렇게 해 봐.”
“허어, 석 회장한테 듣을 말은 아닌데. 방랑벽 철부지가 누구한테 설교를······.”
그때, 석필호가 쥔 낚싯대가 커다랗게 위아래로 물결쳤다.
“어어, 물었다!”
“천천히 당겨, 엄청 큰 놈일세!”
골프보다 낚시를 즐기는 이들답게, 양옆에서 소년 같은 외침이 솟는다.
드러난 반팔 소매 밑, 60대라고 믿기 어려운 전완에 핏줄이 선다. 이내 석필호가 낚싯대를 잡아채자 큼지막한 우럭이 공중을 유영하며 빛살을 뿌린다.
“거, 제대로 월척이구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