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나니와 소방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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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대이주.
세트장에서 세트장으로, 현장에서 다음 현장으로 뛰는 스탭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일부는 먼젓번 현장을 정리하고, 다른 일부는 미리 가 있는 팀과 연락하여 딜레이 없이 촬영할 수 있도록 회선을 맞춘다.
오늘의 행선지는 잠실이다. 이른 새벽인 지금, 상암동 JNBC 사옥부터 밟으면 30분 안쪽으로 주파가 가능하다.
차 시동을 걸던 스탭이 눈을 비볐다.
“와, 진짜로 여기가 촬영허가를 내줬다고?”
“그런가 봐. 살면서 한조타워 펜트하우스를 다 가 보네.”
“세트장 준비한 거 보면 원래는 안 떨어졌던 것 같은데··· 로만이 뭘 어떻게 했나?”
옆자리의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찐 재벌한테는 아무리 대형기획사라도 못 비비지.”
“그렇다고 PD님이 따오진 않았을 거 아냐. 거기 장소 협찬 안 주기로 유명한데.”
지상 층수는 140층, 높이는 무려 570미터에 달하는 한조타워.
그 최상층의 촬영허가가 떨어졌다.
다 합쳐 다섯 세대뿐인, 월세만 20억을 넘는 펜트하우스의 공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극중 은기학 회장의 거처이자 집무실, 선화타워의 펜트하우스 컨셉이다.
물론 세트장만으로도 촬영은 가능하다. 그러나 창밖에 고층뷰 CG를 깐 장면과, 실제 타워 최상층에서 찍은 장면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장소 섭외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모을 수 있는 것이다.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 드라마 최초의 한조타워 섭외, ‘선화’와 ‘한조’의 개연성]
[재벌물도 재벌물 나름, ‘하이페리온’은 못 따낸 장소 협찬을 ‘망회돌’은 어떻게 받았나?]
뒷이야기는 무성하나··· 나종모 PD를 위시한 수뇌부들은 안다.
박건이 C&J의 진규일 본부장에게 부탁하고, 진 본부장이 한조그룹에 연락을 넣어 섭외 허가를 받아냈다는 것을.
“혹시 모르지, 박건이 그 C&J 본부장··· 누구냐, 창진그룹 손자랑 동창이었다잖아. 거기다 부탁해서 허가 뚫은 거 아닌가?”
“큭큭, 너무 갔다. 재벌 나오는 드라마 찍는다고 현실감각까지 잃어버리네.”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정답을 추리한 스탭이 픽 웃었다.
“그치? 말도 안 되긴 해.”
*
한조타워 46층.
이어링을 낀 나종모 PD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형제와 마주 섰다.
타워의 특성상, 고층으로 올라가려면 무려 세 차례나 승강기를 갈아타야 한다.
“건이 씨가 먼저 올라가, 나는 여기서 감독님들 데리고 따라갈게.”
“예. 선이랑 가 있겠습니다.”
“아, 맞다. 그리고······.”
나종모 PD의 가느다란 눈이 찡긋 윙크했다.
“고마워.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별말씀을요. 같이 하는 작품인데.”
막상 섭외를 따낸 장본인은 무심하다.
잠실 한복판에 솟은, 까마득한 마천루를 올려다보면서 든 감상도 단순했다.
‘높이로는 용들이 더 컸는데.’
덕분에 동생과 스탭들만 신이 났다. VVIP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박선은 비명 섞인 탄성을 질렀다.
“와, 벽이 진짜 다 뚫렸네. 여기 사람들은 매일 이런 엘리베이터를 타는 거야? 고소공포증 있으면 어떡하지?”
“외부가 안 보이는 승강기도 따로 있대. 촬영에는 이것만 쓴다고 하더라.”
“역시 대기업··· 아니 재벌······.”
성품에 어울리지 않게도, 동생은 예전부터 놀이기구 동생은 예전부터 높은 곳과 놀이기구, 스릴 넘치는 레저를 좋아했다.
무섭지도 않은지, 승강기 발밑을 내려다보던 박선이 소곤거렸다.
“그럼 형, 정말로 진 본부장님이 섭외해 주신 거야? 한조그룹 회장님 설득해서?”
“비슷해. 그 친구 덕분이지.”
건은 적당히 긍정했다. 나 PD가 장소 섭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은 리딩 때 들었다.
같은 재벌 쪽 사람이니 혹시나 싶어 말해 봤는데, 정말로 긍정적인 답이 올 줄은 몰랐다.
-제작진 쪽으로 연락을 줄 거야. 편의도 최대한 봐 줄 거고.
‘고마워. 쉽지 않았을 텐데.’
진규일은 직접 전화를 걸어 승인 소식을 전했다. 잠시 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맙다는 소린 처음 듣는군. 영감님이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는데, 영화 얘기에 껌뻑 죽는 어르신이거든. 괜찮겠나?
‘상관없어. 신세도 졌고.’
어르신의 정체는 듣지 못했으나, 회장이나 그 비슷한 위치의 누군가로 짐작됐다.
그런 자리를 거절할 필요는 없다. 추후 벌어질지 모를 전쟁에 힘이 될 테니까.
‘DG와 조이너스, 화약고나 마찬가지야.’
차인혁이라는 팔 한쪽은 잘라냈지만, 아직 거대 기획사의 체급은 건재하다. 이 판에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맞부딪칠 날이 올 것이다.
-문이 열립니다.
펜트하우스 내부는 이미 은기학 회장의 거처로 세팅되어 있었다.
룸 10개에 욕실 7개, 출입문만 5개가 넘는 300평형의 복층 공간.
면적만으로 세트장을 압도하지만, 배우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다. 서향으로 탁 트인 거실을 휘둘러본 최필립이 평했다.
“저 형네 집이랑은 비교가 안 되네. 역시 배우보단 재벌 팔자가 나아.”
“동생아, 내 집은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그냥 높은 아파트다.”
“그게 그거지. 언제는 돈 더 벌어서 한조타워로 이사 가는 게 꿈이랬으면서.”
건의 옆에 서 있던, 우종식 비서실장 역할의 김성운이 웃었다.
“로만은 가족 같은 분위기라더니, 소속 배우분들끼리 사이가 좋으십니다.”
“뭐, 그냥저냥이죠. 몇 명만 빼고.”
“몇 명이라면······.”
최필립의 말에 김성운이 흥미를 보였지만, 막 들어온 나종모 PD가 목소릴 높였다.
“자, 십 분 뒤에 바로 들어갑니다! 시간은 넉넉해도 빡빡하게 부탁들 해요!”
S#.6 선화타워 최상부(안)
선화타워 내부.
단 두 명을 태운 원통형의 승강기가, 상공을 향해 초고속으로 솟아오른다.
은한섬과 우종식 비서실장이다.
“우 실장.”
“말씀하십시오.”
“나는 왜 부른 겁니까?”
우종식 실장의 눈가가 미세하게 씰룩인다. 이 망나니가 웬일로 사람처럼 구냐는 표정이다.
‘그럴 만해, 워낙 난장을 쳐 놨으니.’
회귀 전, 은한섬은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폭언과 폭력은 예사에, 매일같이 환락의 파티를 일삼았다.
제 숙부들마저 들이박는 미친놈이 누구에게 존대를 할 리도 없다.
“말씀드렸다시피, 부사장 발령 때문일 겁니다. 집안의 경사를 함께 축하하자는 뜻이시겠지요.”
“···경사라.”
원작에서도 은한섬이 회귀한 시점은 20년 전.
그룹의 방산 계열사인 ‘선화쉴드’에 부사장으로 발령이 나던 시기다.
끝없는 복도를 지나 도착한 거실.
시티뷰가 한눈에 보이는 전면창 앞에, 길고 높은 식탁이 차려져 있다.
고용인들이 부지런히 오가지만 떡갈나무 의자에 앉은 사람은 셋뿐이다.
선화(鮮藥)의 왕좌에 허락된 것이 오직 은씨 가문의 핏줄뿐임을 의미하듯.
“늦었군. 우 실장을 보낸 게 한참 전인데.”
식탁의 우측, 입가를 닦은 은선인이 냉엄한 어조로 말한다.
삼형제 중 첫째이자 선화전자의 사장.
두 아들을 경멸하고 손자들은 아끼는 은기학의 설정상, 승계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다.
“밤새 달리기라도 했냐? 형이 의사 놈들 말 들으랬잖아, 약은 해도 섞어서 빨진 말라고.”
이번에는 식탁의 좌측, 둘째 형 은선창이 능글맞게 비아냥거린다.
첫째가 깐깐한 원칙주의자라면 둘째는 욕망에 찬 실리주의자다. 선화중공업 사장을 맡고도 괴팍하고 음흉한 성정을 채 못 버렸다.
회귀 전, 그룹을 분열시키는 데 일조한 머저리라는 소리다.
“지랄을 하네, 자기 빌딩에 프로포폴 공장을 차린 인간이. 팔자에도 안 맞는 중공업은 그만두고 의료원으로 꺼지지 그래.”
숨 쉬듯 흘러나온 폭언에, 은선창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 천한 데릴사위 핏줄 주제에······.”
“그쯤 하거라. 형제끼리 우애를 돈독히 하라고 그리도 일렀거늘.”
쫘악, 통째로 구운 양갈비가 강건한 손아귀에 찢겨나간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마주 쏘아붙이려던 은선창의 입이 닫힌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저 거인(巨人) 앞에서는 고양이를 만난 쥐 신세기에.
“이젠 할애비 앞에서 서로 물어뜯는 게냐?”
식탁의 가장 상석.
실내복 위에 뱅골호랑이 가죽을 걸친, 백발의 노인이 안광을 번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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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할아버님.”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랑 한섬이가 물어뜯다뇨? 저희는 큰형보다 돈독한 사입니다.”
구신승이 즉각 사죄하고, 최필립도 히죽 웃으며 받아넘긴다.
대사가 길지도 않은데, 과연 대표 선수들답게 텐션부터가 다르다.
“일가는 뭉쳐야 한다. 아랫것들뿐 아니라 윗놈들도 어울릴 줄을 알아야 해. 분붕이석(分崩離析)에 사분오열(四分五裂)이라.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저 밖의 들개 무리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게야, 알겠느냐?”
로만의 탑스타들도 탑스타지만··· 극의 백미는 단연 은기학 역의 석필호다.
한동안 길렀다던 백발은 어깨에 걸친 뱅골호랑이 가죽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고대 헬라(그리스)의 사내들처럼 야만적인 활력이 넘치는 노인. 여태까지의 ‘회장님’들과는 다른 재벌 총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이어, 제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한섬이 너도 그만 앉아라.”
“아, 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이번에도 최필립이 경망스럽게 끼어든다.
“그러게요, 저도 궁금합니다. 드디어 우리 막내가 검찰에 소환되는 날인가요?”
“은선창, 한 번만 더 할애비 이야기를 막으면······.”
“앗, 실례했습니다.”
배다른 둘째 형이 입을 다문 뒤, 어머니를 잃은 막내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날.”
“음? 뭐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잠이 덜 깨서.”
대강 얼버무리며, 건은 생각한다.
‘꼭 다시 전이된 기분인데.’
역시 작가의 실력이 좋다. 그와 함께 철왕국에 끌려갔던 것도 아닐 텐데, 주인공이 느낄 감정을 제법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회귀한 경험이 있을 리는 없고··· 그냥 상상력이 좋은 건가?’
물론 재벌가 망나니와 용사는 다르다. 이를테면 철왕국에서 첫 죽음을 맞고 회귀했을 때, 박건―고드는 칼을 뽑아들었다.
―여기 길리언이라는 자가 있나?
―아, 동문 수문장 길리언 말씀이십니까?
―신전 근처로 얼씬도 못하게 해. 보이면 용사고 뭐고 그놈부터 죽일 거다.
성녀의 수명을 십 년 깎았으니, 자신이 용사의 자질을 판가름하겠다고 했던가.
신전을 나오자마자 ‘대련’을 제안한 거구의 사내에게 그는 머리가 터져 죽었었다.
‘한 번에 성검이 날아갔고, 두 번째에 두개골이 박살났지.’
오래 놀랄 여유는 없었다. 끔찍한 회귀의 감각 속에서, 건은 받아들였다.
자신이 이세계로 전이됐고··· 용사의 업을 완수할 때까지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그를 쳐죽인 미래의 동료를 통해.
“오늘 너희를 한 자리에 부른 건, 막내의 방산 부사장 임명 때문이다. 이걸로 저 철부지가 정신을 좀 차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 선창이 놈이 못된 짓을 할애비 눈치 봐 가며 줄였던 것처럼.”
“아이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칭찬 아니다. 이놈아.”
그리고 지금 역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저놈부터 죽여야 하나?’
‘할아버지를 죽여야 하나?’
회귀는 때때로 불편한 진실을 제공한다.
박건을 죽인 자가 수문장 길리언이었다면, 은한섬의 어머니 은재영을 살해한 흉수는······.
“왜 그러느냐, 한섬아. 속이 안 좋은 게냐?”
막내딸을 누구보다 아끼던 아버지였다.
“별 건 아니고. 어제 꿈을 좀 꿔서요.”
“꿈이라면······.”
“이 망할 그룹이, 통째로 사라지는 꿈을.”
속내를 숨긴 노인의 눈과, 칼을 품은 청년의 눈이 운명처럼 얽힌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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