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나니와 소방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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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외곽 촬영장.
어렵사리 촬영 허가를 얻어낸 세트장에서, EBC 스탭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화재 씬을 CG로 할 것이냐, 실제 세트에서 진행할 것이냐, 두 의견이 한동안 부딪치며 말들이 많았던 탓이다.
마라톤 회의의 결과는 후자. 점잖은 성품의 감성욱 국장이 부드럽게 못을 박았다.
‘박건 배우가 백정장군 찍을 때, CVN에서 안전사고가 날 뻔했죠? 우린 그런 신생 케이블이랑 다르잖아요. 예산 편성은 걱정 말고, 배우 케어에 일절 문제없게 진행시키세요.’
국장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더더욱 어설프게 할 수는 없다.
안전장비를 종류별로 들이고 전문 스턴트팀도 세트 초기부터 기획을 함께했다.
그렇게 첫 촬영날이 된 오늘, 다른 종류의 문제가 제작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최영오 PD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얼굴들을 번갈아 보았다.
박건과 박선, 이 둘이야 익숙하다. 문제는 저 뒤쪽, 한가롭게 서 있는 연예인 두 명이다.
해외 투어를 마친 서희도와 요즘 한가한 변휘승이 현장에 놀러 온 것이다.
교육방송과 거리가 먼 아이돌, 서희도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EBC도 촬영팀 좋다. 카메라 대수도 많고··· 여긴 올 일이 없어서 몰랐네.”
“아이돌이면 모를 만도 하죠. 난 옛날에 여기서 제의 들어왔었는데, 다큐 하나 찍자고.”
“변 선배한테 다큐멘터리를요?”
박건이 묻자, 변휘승은 자랑스레 대꾸했다.
“어. 그때가 네 번째 열애설 터질 때였거든. 일반인 킬러라면서 언론이 나 쪼아댈 무렵. 스타극장 느낌으로 만들쟤서 바로 깠지.”
“알 것 같네요.”
“야, 표정에 경멸이 담겼잖아!”
제작진들과도 인사가 오간 뒤, 정일채 PD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두 분이 여긴 어떻게······?”
서희도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리 형 찍는대서 놀러 왔어요. 조금만 구경하다 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정말로 모큐멘터리 구성이라··· 구경하는 재미는 드라마 현장이 더 좋으실 텐데요.”
“망회돌? 거긴 유명한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화제가 안 돼요, 가 봐야 비교만 된다고.”
짬밥으론 최영오 PD보다도 높은 경력직답게, 변휘승이 옳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건이 아버님도 오신다잖아요.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 겸 들렀죠.”
오늘의 주인공은 주연인 박건도, 딸려 온 연예인 동료들도 아니다.
다큐 속 ‘박 소방교’의 아버지 역이자, 특별출연으로 잠깐 나오는 박건의 실제 아버지.
생전 처음으로 스크린 데뷔를 앞둔 박열호는 저만치서 박선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얘들아, 정말로 괜찮겠냐?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내가 빠지고 건이가 찍는 게······.”
“무슨 소리야. 대본 진작 다 나왔다니까. 아빠가 여기서 못 하겠다고 하면 대참사야.”
“선이 말대롭니다. 감독님도 계속 디렉팅해 주실 테니, 그냥 마음 편히 찍으시면 돼요. 어려운 씬들도 아니고요.”
박선이 딱 자르자 박건도 보탠다. 빠져나갈 길 없는 두 아들의 포위에, 박열호는 현역 때도 흘리지 않던 땀을 훔친다.
“이거, 애들 엄마한테 혼나겠는데.”
불의 길 : 소방 속으로.
EBC의 특별기획 모큐멘터리. 박열호의 특별출연을 처음 제안한 것은 담당 작가였다.
이왕 아버지 헌정 영상을 찍을 바에, 아예 뜻깊은 기획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혹시 아버님이 잠깐 출연하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대본을 고치면서 느낀 건데, 두 분이 같이 나오셔도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서요.’
건은 두말없이 끄덕였다.
‘흔쾌히 승낙하실 겁니다.’
예상대로 박열호는 기겁했지만, 결국 아들들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전례 없이 강경한 둘째 아들의 추진 탓이었다.
‘아빠, 나 듣자마자 아빠가 나가면 진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엄마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한 번만 찍자, 응?’
그리고 지금··· 완성된 대본에는 박열호의 비중이 소폭 늘었다.
처음은 단순 조연 역할이었지만, 특별편성으로 시간을 늘려 받으면서 작가진이 양념을 제대로 친 것이다.
민폐를 끼칠까 영 걱정스러운지, 박열호는 연신 중얼거렸다.
“이게, 참··· 맞는 건지 모르겠다. 연기라곤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언감생심 TV라니, 방송국 분들한테 괜히 폐만······.”
“자, 삼십 분 뒤 스탠바이 하겠습니다! 배우님들은 이쪽으로 와 주세요!”
“아빠, 뭐 해. 배우들 부르잖아!”
이젠 도망칠 기회도 다 날아갔다. 등을 떠밀린 박열호가 분장실로 들어가며 울상을 짓는다.
“···오는 게 아니었는데.”
*
모큐멘터리(Mockumentary).
페이크 다큐멘터리 또는 다큐-코미디라고도 하는, 영화 및 TV 프로그램의 장르다.
허구의 상황을 마치 실제처럼 보이도록 찍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큐멘터리처럼 찍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소설적, 사실적 상황을 기반으로 할지언정 그 안에는 대본도 동선도 있다. 지금 최영오 PD가 들고 있는 콘티처럼.
[불의 길 : 소방(消防) 속으로]라는 원제답게, 극은 소방관들의 삶을 조명한다.
등장인물은 소방관 부자. 당연히 박건이 아들이고 박열호가 아버지다.
“스탠바이, 큐!”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온 드라마답게, 초인종이 눌리고 문이 열린다.
나온 사람은 수척한 얼굴의 청년. 들이미는 카메라를 보고 잠깐 놀란 표정이 됐다가, 이내 집 안으로 스탭들을 안내한다.
―뭐냐?
거실에서 들린 건조한 목소리에, 카메라가 돌아가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를 잡는다.
소방관 ‘박건’ 역할의 박건이 들릴 듯 말 듯 대답한다.
―방송국 사람들요. 오늘 온다고 했잖아요.
―그딴 거 찍지 말라니까. 모처럼 쉬는 날에, 쓸데없는 짓을 뭣하러······.
―알아서 할게요.
이내 제작진과 박건은 좁은 방에 들어가 마주 앉는다. 밖에서는 광대 같은 짓이라느니, 방송국 놈들을 왜 들이냐느니 투덜거림이 들린다.
창피한 표정이 된 청년이 눈을 내리깐다.
―신경쓰지 마세요. 아버지가 방송국 사람들을 싫어하셔서··· 그런데 어디까지 했죠?
세트 한쪽, 현장을 유심히 지켜보던 최영오 PD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실물로는 처음 접한 박건의 연기 때문만이 아니다. 저 밖에서 중얼중얼 투덜거리는, 배우의 아버지란 양반 탓이다.
‘연기한 적도 없다고 하더니. 아들이나 아버지나 순 타짜였잖아?’
박열호라고 했나. 한쪽 손이 없는 소방관은 왜 배우의 아버지인지 증명했다.
처음엔 어색했는지 몇 번 NG를 내더니, 순식간에 감정을 잡고 씬에 몰입한다.
무엇보다 일반인스러운 떨림이 없다. 불탄 장작처럼 갈라지는 목소리 속, 느껴지는 거라곤 지독한 회한과 허무뿐이다.
―휴일에 하는 일이요? 그런 거 없는데, 애초에 쉬는 날도 많이 없고··· 집에서 쉬거나 정 답답하면 놀이터로 가요.
―놀이터요?
―예. 이 앞에 시소, 거기 앉아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봐요. 비가 언제쯤 올까 생각하면서.
사람이 달라지는 건 숫제 아들이나 아버지나 똑같다. 드라마를 잘 찍는 도중, 왜 아빠를 데리고 여기 나왔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보라. 부자 사이에 패인 골을, 오브제며 편집 없이 톤과 표정만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거, 이왕 할 거 편성을 더 받아도······.’
세트 확장, 분량 추가, 회차 연장··· 최영오 PD의 머릿속에서 계산들이 빠르게 오간다.
이미 국장은 그들을 밀어주기로 결심했다. 15분짜리가 60분까지 늘어난 참인데, 그깟 회차 좀 늘리는 게 대수겠는가?
“컷! 좋습니다, 5분만 쉬고 다시 갈게요!”
목표는 4%. 금년도 최고시청률의 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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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마침내 첫방 전날.
망회돌 촬영장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와, 여기 죽이네요. 하이페리온인가, 그 짝퉁 드라마보다 훨씬 간진데?”
“···작가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왜요? 원래 크리에이터는 자기 고생을 누가 알아줘야 행복한 법이에요.”
철없이 환호하는 젊은 남자와 식은땀을 흘리는 정장 남자, ‘망회돌’의 작가 윤발25와 매니지먼트 직원이다.
나종모 PD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원작자를 환대한다. 계약서에 사인한 이상 방송국이 절대 갑이지만, 이왕이면 원만한 관계가 좋다.
“아이고, 작가님 오셨습니까. 첫촬 때도 연락드렸는데 그때 오시지 않고서.”
“하필 그날 강의가 잡혀서··· 그래도 원고 다 마감하고 왔어요. 사흘간 자유라고요!”
그새 또 색을 얹었는지, 새빨갛던 머리가 어두운 클래식블루로 바뀌어 있다.
파랑머리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와, 진짜 구신승이다··· 어어, 저쪽엔 최필립 배우 아니에요?”
“안녕하십니까, 구신승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필립이라고 해요.”
구신승과 최필립, 그 밖의 배우들도 원작자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작가로서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윤발25는 악수를 교환하다가 문득 말했다.
“제가 대본 리딩을 못 가서 너무 아쉬웠거든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뭘 좀 가져왔어요.”
그때, 저 멀리서부터 술렁거림이 퍼진다.
웬만한 배우보다 더 버는 작가가, 자기 작품 촬영장에 맨손으로 왔을 리 없다. 스탭들을 먹이겠다며 출장 뷔페 서비스를 불러온 것이다.
금세 잔치판이 벌어졌다.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음식을 잔뜩 퍼담은 스탭들이 지나가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다들 고생하시는데 감사는요. 이걸 밥차라고 하나? 저는 못 와도 자주 보낼 테니까, 앞으로 잘 좀 부탁드려요.”
“거참, 육십 평생 작가님한테 얻어먹긴 또 처음이네. 우리 회사는 뭘 하나 몰라.”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뒤에서 드리워진다. 회장님 분장을 마친 석필호의 등장이다.
자신의 소설에서 뛰쳐나온 캐릭터에, 윤발25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어어··· 은기학 회장!”
“그 배역을 맡은 석필홉니다. 좋은 작품 써 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더 감사하죠. 상상했던 은기학이랑 완전 찰떡인데요.”
“허허,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환담을 나누던 석필호가 떠난 뒤, 접시 두 개에 음식을 산처럼 쌓은 박건이 다가왔다.
“잘 먹겠습니다. 어제 다른 촬영장에 가느라 구신승 배우 밥차를 놓쳤거든요.”
“우와, 그걸 다 드세요?”
“예. 조금 양이 많은 편입니다.”
대답한 박건은 고개를 돌렸다.
나 PD는 유명 호텔의 파티용 홀을 촬영장소로 섭외했다. 라운지 한쪽엔 바(BAR)와 DJ 부스, 심지어 실내 수영장까지 있다.
오늘 씬은 돌아온 망나니, 은한섬이 방탕한 부잣집 자제들을 참교육하는 장면이다.
“오신 김에, 촬영도 좀 보고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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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식사가 끝났다.
다음 촬영을 기다리는 도중, 윤발25에게 슬쩍 다가온 박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작가님. 나중에 사인이랑 사진 좀 부탁드릴게요. 저희 형이 엄청 좋아하거든요.”
“에이, 띄워 주지 마세요. 저처럼 연예계 경험 없는 사람들은 그런 말 다 믿어요.”
“아니에요! 저 형이 평소에 책을 막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작가님 소설은 밤을 새 가면서 읽더라니까요. 용사와 마왕인가? 한창 게임에 빠졌을 때도 안 그러던 사람이.”
“···진짜로요?”
자기 작품 팬이라는데 싫어할 작가는 없다. 흥미를 보이는 윤발25에게 박선이 손짓, 발짓 동원해 설명했다.
“당연하죠. 작가님 만나면 물어볼 게 많다고 어찌나 난리든지, 이따 쉴 때 팬미팅이라도······.”
“스탠바이, 큐!”
중요한 얘기가 오가려던 차, 나종모 PD의 스탠바이가 촬영을 재개시킨다.
*
S#.14 호텔의 VIP 파티장(안)
회귀 직후, 은한섬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선화쉴드 부사장에 취임했다.
임원 1 : 은한섬이 할까? 곧 죽어도 일은 안 하겠다고 하던 망나니가?
임원 2 : 에이, 아니지. 아마 금방 접고 또 외국이나 나갈 거야.
관계자들의 예측은 정확했다. 실제로 은한섬은 기업 운영엔 관심이 없었고, 전생에서는 취임식 때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선화쉴드의 임직원이 모두 모인 취임식에서, 신임 부사장은 폭탄선언을 터뜨렸다.
―오늘부터 이 회사 부사장으로 오게 된 은한섬입니다. 낙하산이라고 마음껏 욕하되, 본인들 밥그릇 지키려면 죽을 각오로 뛰어야 할 겁니다. 곳간만 축내는 벌레들은 자리가 없을 테니까.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 다니던 개망나니다.
거기다 부사장 직함까지 얹혔으니 범이 날개를 단 격. 모두가 바짝 엎드린 와중, 부사장실에 앉은 회귀자는 다음을 준비한다.
은한섬 : (입술을 비틀며) 내가 사고를 치기만 기다리고 있겠지, 머저리 같은 것들.
본래의 그는 부사장직에 오르자마자 회사의 폭군으로 군림하며 사고를 쳤다.
월급쟁이 사장을 괴롭히고, 안 그래도 흔들리던 선화의 방산을 더 축소시킬 만큼.
은한섬 : 하지만··· 이젠 달라. 믿어도 될 놈과 뒤통수 칠 놈, 죽여 없앨 놈들을 다 아니까.
장면이 바뀌어 파티장 안.
보랏빛 조명이 비치는 고급스러운 라운지,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잔을 들고 거닌다.
남자 1 : 은한섬? 그 망나니가 할아버지 회사에 들어갔다고?
남자 2 : 사장도 아니고, 방산 부사장직이라더라. 완전 낙하산이지.
여자 1 : (회상하듯 몽롱한 눈빛으로) 그래도 한섬이 오빠가 얼굴은 천재잖아.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그 외모면 참고 살 수 있어.
남자 2 : (질색하며) 지랄, 너도 그 새끼 집안 보고 좋아하는 거잖아. 말이 한국 3대 그룹이지, 선화가 요즘 휘청거린다는 소리도······.
퍽, 순간 가해진 충격에 험담을 늘어놓던 포마드 머리가 비틀거린다.
어떤 새끼가··· 뒤를 돌아본 남자의 입이 접착제를 바른 듯 딱 굳는다. 방금까지 물고 뜯은 뒷담화의 주인공이 나타났기에.
은한섬 :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 가서 네 아빠 철물점이나 도와. 등골 빼먹는 기생충아.
‘삼영철강’ 사장의 아들은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눈을 내리깐다.
나종모 PD가 조연급과 단역들 캐스팅에 악역 전문 배우의 비중을 높인 이유가 있다.
회귀 이전 은한섬이 어울리던 이들··· 혹은 알던 이들 중,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선화그룹을 무너뜨리려는 적들이 숱한 탓이다.
“어, 한섬이 아냐?”
수영장 앞, 비키니 입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왕처럼 거들먹거리는 놈이 걸어온다.
이번에는 체급이 좀 맞다. 재벌 순위 10위권, 서창그룹의 후계 중 한 녀석이다.
“전화는 받지도 않고,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
약과 술에 취한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대마를 얼마나 빨았는지, 목 부근이 짧게 경련하는 틱 증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난 네가 감금당한 줄 알았다, 응? 너희 집 꼰대 노인네한테 붙잡혀서. 그 병신 같은 총 파는 회사엔 또 무슨 일로······.”
“야.”
“어?”
남자가 멍하니 되물은 순간, 그의 몸이 붕 떠올라 수영장 한복판에 떨어진다.
첨벙! 물보라가 요란하게 일고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솟는다. 다가간 은한섬이 놈의 가슴팍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야, 재광아!”
“누가 좀 들어가 봐, 저 새끼 졸라 취해서 수영도 못 해!”
난리가 난 와중, 선화의 망나니는 아무렇지 않게 수트에 튄 물방울을 턴다.
“약쟁이 새끼가. 누구 앞에서 선화를 욕해?”
“-컷! 좋아요, 다음 갑시다.”
이번에도 원 테이크로 찢었다. 흡족한 표정의 나종모 PD가 메가폰을 내렸을 때였다.
짝, 짝, 짝짝짝··· 뜬금없는 박수소리가 카메라들 뒤쪽에서 들려왔다.
“브라보, 박건! 나이스, 최필립!”
사람들이 돌아본 곳에는 파랑머리 원작자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윤발25와 함께 왔던 직원은 사라졌다. 대신 박선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픈 표정으로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 작가님··· 이건 커튼콜이 아니라 그냥 씬 하나가 끝난 거······.”
“저걸 보고 어떻게 가만있어요! 오늘은 다 같이 좀 외칩시다. 화이팅, 망회돌! 멋있다, 윤발25!”
엉겁결에 치기 시작한 박수가, 웃음과 함께 촬영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헛웃음을 짓던 나종모 PD가 중얼거렸다.
“저 양반, 분위기 하난 잘 살리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