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14화 (114/122)

번지는 불길을 잡으려면 (3)

* * *

상암동의 모 오피스텔.

좁은 거실과 닭장 같은 방 네 개가 전부인 작업실에서, 보조작가들이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만 요란하다.

이쪽에서는 자료조사를 하고, 저쪽에서는 대본 초안을 적고 있다. 거실의 벽걸이형 TV에서는 작업한 작품들이 24시간 방영된다.

“······휴우.”

막 한 씬을 마친 보조작가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다.

박봉, 노예, 아이디어 광산.

흔히 알려진 드라마 보조작가들의 대우다.

육체노동은 개발자들을 갈아넣는 게임업계의 ‘크런치’에 버금가는데, 정신적 스트레스 대비 받는 돈은 쥐꼬리인 경우도 잦다.

그에 비하면, 여기서 일하는 이들의 상황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작가의 성질머리야 둘째쳐도 보수는 제대로 줬으니까.

물론··· 그것도 며칠 전까지였다. 위대하신 사단장님의 심기가 불편해진 탓이다.

“나소희.”

가장 큰 작업실.

보조작가에게 대본을 받은, 숏컷에 잠자리 안경을 쓴 여진주가 입을 연다. 모 패션영화의 악바리 편집장을 빼닮은 인상이다.

“네··· 네?”

“새로 쓴 게 이거야? 전에도 말했지, 소설이랑 시나리오는 다르다고. 그런데 무슨 내레이션으로 벽돌집을 만들어 왔어?”

“그게··· 제가 법조물은 처음이다 보니, 작가님이 주신 로그라인으론 전개가 어려워서······.”

보조작가는 딸꾹질을 삼키며 대답한다. 끝을 새까맣게 칠한 여진주의 눈꼬리가 확 찌푸려졌다.

“어려우면 이딴 식으로 해도 돼? 아니면 뭐, 대충 쓰고 방송국에 각색작가 붙여 달랄 거야? 그럴 거면 그냥 짐 빼서 나가. 여 작가 밑에서 도저히 못 배우겠다고 인터뷰도 하고.”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내일까지 제대로 써 와. 최유리한테는 두 시까지 자료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JNBC 나종모 PD님께 연락이 왔는데요.”

“나 PD? 뭐라는데?”

“원작 작가가 클레임을 건다고, 다음 회차라도 각색을 좀 줄이자고 하셔서······.”

잘못 건드렸다.

저 멍청이··· 엿듣던 보조작가들이 절망하는 가운데, 여진주의 눈썹이 안경 위로 치솟았다.

“걸면 어쩔 건데.”

“······네?”

“어쩔 거냐고. 소송할 거야, 아니면 찾아와서 머리채라도 잡을 거야? 시나리오 작가는 나야, 억울하면 본인이 각색해서 계약하든가. 어디 책이나 팔아먹는 광대가 드라마판을 넘봐?”

보조작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들의 스승이자 고용주, 숨 쉬듯 히트작을 뽑아내는 저 악녀에게 밉보이면 다음날 책상이 빠진다.

“김유리, 문아름, 너희도 불만 있니?”

“아뇨, 없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뾰족한 고함에, 문밖의 보조작가들이 입을 모아 합창한다.

보조작가란 무임금 지망생의 다른 이름이다. 입봉의 꿈 하나로 버티는 이들에게, 여진주는 폭언을 퍼부을지언정 일당은 제대로 쳐 준다.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해. 고생도 안 해 본 것들이 징징대고 있어.”

여진주 하면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다. JNBC 초창기, 지상파 틈새에서 고전하던 종편채널을 어엿한 드라마 강국으로 키워냈다.

그녀가 상암동 사옥 기둥 하나쯤은 세웠다는 말이 있을 정도. 실제로 모 연예 잡지는 두 작가의 커리어를 비교하기도 했다.

[방송작가 VS 웹소설 작가, 둘 중 어느 쪽이 판정승 거둘까?]

하면 윤발25는? 이쪽은 메가 히트작 하나, 그 외 작품들도 연타석 홈런을 치며 히트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방송물을 먹은 작가들은 콧대가 높다. 배우며 감독, 방송국 관계자까지 쩔쩔매는 인기 작가라면 더더욱.

“그만 가, 정신 사나워.”

여진주가 벌레 쫓듯 손을 내저었지만, 보조작가는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저기, 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다섯 셀 때까지 해. 하나, 둘, 셋······.”

“박건! 박건 배우가 직접 연락했었어요!”

방송가 사람들은 천년 묵은 이무기보다 눈치가 빠르다. 여진주는 알 만 하다는 듯 혀를 찼다.

“걔는 뭐래, 찾아오겠대?”

“아뇨··· 그냥 대본 정말 재밌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던데요?”

“······뭐?”

예상과 다르다. 여진주의 표정에 처음으로 의아함이 스친다.

이 바닥 청탁이라는 게 그렇다. 감독이 찾아오면 배우도 오고, 배우가 오면 감독도 온다.

소식통을 통해 박건과 윤발25가 촬영장에서 만났음은 알고 있다.

작가 쪽 청탁으로 뭐라도 부탁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쿨한 반응이다.

“···무슨 생각이지, 이 인간들?”

*

역삼동의 촬영 스튜디오.

한쪽 귀를 막고, 다른 한쪽에 스마트폰을 댄 박선이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는데, 혹시 생각이 있으신가 해서······.

“아, 예! 그런데 이번 주까진 일정이 꽉 차서, 한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회사랑 의논해 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대행사와의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하고, 박선은 목캔디 하날 까서 입에 넣었다. 와그작 씹자 싸한 박하향이 퍼져나간다.

이번에 친해진 최필립의 매니저, 김영태에게 전수받은 목 관리 비기다.

‘매니저 입이 배우 입보다 바쁘댔지. 신인 때는 인사하느라, 뜨고 나면 인사를 받느라.’

인기 배우의 매니저는 몸이 다섯 개여도 부족하다고 하던가.

이미 몸집이 너무 커져 버린 박건이다. 미팅에 스케줄 관리, 거기다 로드매니저까지 혼자 담당하려니 슬슬 한계가 온다.

“어휴, 이래서 로드가 따로 붙는 거구나.”

그래서인지, 최근 이성철 본부장이 지나가면서 운을 띄우기도 했다.

‘박선 씨, 아예 회사로 들어오는 건 어때요? 어차피 지금 맡는 일도 팀장급인데, 로드를 붙이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해서.’

박선도 이제 눈치라면 뒤지지 않는다. 후한 대우를 해 주는 대신, 유사시 형을 눌러 앉힐 카드로 쓰려는 의도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재계약이······.’

노중만 대표와 합의해 1년을 연장했다고 했으니, 내년 여름까지는 로만 소속이다.

EBC의 다큐멘터리와 첫방을 마친 망회돌, 원작자와 각색 작가의 불화까지··· 복잡한 문제투성이지만 오늘은 오늘의 일정에 집중해야 한다.

“매니저님, 커피 좀 드세요.”

누군가 음료를 내민다. 오늘 광고촬영을 위해 계속 미팅하던 여자 팀장이다.

“아,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근데 진짜 대박이에요. 이 쓰리 샷을 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오늘 스케줄이 아니라 팬미팅 같아요.”

진실의 미간이라 했던가. 엄지를 들어 보이는 팀장의 표정에 만족감이 흘러넘친다.

“팀장님 덕분이죠, 끝날 때까지 저희 배우들 잘 좀 부탁드릴게요.”

“물론입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로만의 세 배우가, 오늘은 ‘망회돌’ 촬영장이 아닌 다른 곳에 왔다.

무려 한조물산 스케줄. 유통 브랜드들의 정장 광고 겸 화보촬영을 위해서다.

‘···설마 여기랑 찍게 될 줄은 몰랐네.’

한조물산.

한조그룹의 60여 계열사 중 물산 부문으로, 브리오사와 나폴로··· 젠휴 등 수많은 명품과 준명품을 자랑하는 국내 패션의 최강자다.

배우들의 의사가 확인되자마자 노 대표가 움직였다는데, 며칠 만에 미팅이 잡혔다.

‘망회돌’ 장소 협찬으로 첫 물꼬가 순조로이 트인 탓일까. 계약 조건도 썩 좋은 편이라 했다.

노중만 대표는 짧게 전했다.

‘우리 대표 선수들인데, 싸구려 브랜드에 우르르 내보낸다고 욕을 먹일 순 없지. 광고 감독도 몇 번 작업했던 베테랑이니 편할 거야.’

재벌집 삼형제가 재벌 계열사 광고를 찍는다.

기업은 가장 핫한 드라마의 타이틀급 홍보를, 배우들은 고가의 개런티와 이미지를 챙길 수 있으니 서로에게 윈윈이다.

거기다 로만의 3인방, 어떤 드라마도 주연급일 탑 배우들의 총출동 아닌가. 촬영장에 따라온 스탭이며 관계자의 머릿수만 백 명이 넘는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다음엔 박건 씨가 이쪽으로 걸어나오면서··· 중앙에 포커싱되는 느낌으로 한 번만 더 갈게요!”

대기업 광고를 수도 없이 찍었다던, 머리를 박박 민 감독이 신이 나서 외친다.

오늘 촬영 컨셉은 실내 패션쇼다. 촬영팀의 미술감독은 스튜디오에 실제 쇼 버금가는 세 갈래의 런웨이 세트장을 만들어 두었다.

‘망회돌’의 삼형제이자 로만의 3인방이, 촬영 레일 깔린 저곳을 쭉 걷게 될 것이다.

“스탠바이― 큐!”

텅스텐라이트와 HMI, 광량 센 스포트라이트들이 빛을 쏘는 런웨이 위로 세 모델이 걸어나온다.

선두는 박건, 왼쪽은 구신승, 오른쪽은 최필립. 실제 모델들만큼 길쭉한 미남들이 각양각색의 수트 자락을 나부낀다.

“······.”

탑 스타의 아우라는 본업이 아닌 곳에서도 발휘된다. 호흡과 눈빛으로 워킹을 커버하고, 그 위에 저마다의 연기를 덧씌운다.

‘이번엔 드라마 속 배역 느낌으로 가도 재밌을 것 같아요. 세 분 다 워낙 개성이 있으셔서··· 표현이 가능할까요?’

감독의 피드백은 완벽히 반영됐다. 구신승의 표정은 돌부처처럼 무감정하며,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최필립은 걸음걸이마저 사납다.

엄격한 큰형와 오만한 작은형의 사이는 이 세계의 주인공, 박건이다.

기업을··· 나아가 수십만 명의 운명을 짊어진 회귀자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나아간다.

전직 망나니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청색 수트에 휘감긴 다리가 쭉쭉 뻗자, 긴 런웨이가 금세 끝을 보인다.

곧이어 세 갈래의 길이 한 곳에서 모인다. 두 형을 흘끗 본 막내는 점멸하는 카메라의 붉은 불빛을 응시한다.

이 내가 돌아왔음을,

가문의 적 모두에게 전하라는 듯.

지켜보던 이들이 탄성을 삼킬 때, 감독의 사인이 요란하게 떨어진다.

“끝내줍니다, 오오케이!”

*

“미끼를 물까요? 여진주.”

스튜디오 대기실, 수트를 갈아입던 최필립이 물었다. 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죠. 우선 연락은 넣어 뒀는데요.”

“조심해요. 배우가 말만 걸면 발작하는 작감들이 있는데, 그 노친네한테 잘못 들이댔다 갈려나간 피해자가 꽤 되니까. 건방지게 자길 쥐고 흔들려 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유념하겠습니다.”

구신승이 셔츠 단추를 잠그다 말고 말했다.

“근데 여 작가님이 벌써 그 정도 연배셨나? 아직 정정하신 걸로 아는데.”

“몰라, 아직 환갑은 전일걸?”

광고 촬영은 벌써 끝났다. 워킹 속도와 시선 처리, 서로의 연기 호흡까지 리허설도 없이 맞아떨어진 덕이다.

‘와, 버릴 게 없습니다. 진짜 형제들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로만은 사실 기획사가 아니라 모델 에이전시였던 거 아닙니까?’

감독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면서 콘티를 던져 버렸다.

아부가 아니다. 배우 셋이 생소한 컨셉의 광고를 찍는데 NG 한 번이 없었으니, 제작진 입장에서야 호들갑을 떨 만도 하다.

파리를 찢어 버린 박건은 물론, 모델 연기는 처음이라며 엄살을 떨던 구신승과 최필립도 수준급의 워킹을 보여 준 탓이다.

“다음 스케줄이 뭐더라··· 화보였나?”

“예, 이동 없이 바로 들어갈 겁니다.”

TV로 방영될 광고는 땄지만 아직 스케줄은 남아 있다. 다음은 같은 공간, 다른 컨셉으로 화보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눈을 굴리던 구신승이 씩 웃었다.

“헌데 둘째야, 말과 행동이 다르구나.”

“또 왜 시비야.”

“언제는 페이가 깎이니 같이 하기 싫다며? 오늘은 꽤 열심이던데.”

최필립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모르는 인간들 얘기고. 이깟 거 좀 덜 벌어도 지장 없어, 재밌는 걸 해야지.”

촬영을 하면서 알게 된 바, 최필립은 의외로 인간다운 면이 많았다.

단 친분 없는 스탭들에겐 철저히 사무적이다. 회사 직원들도 최필립을 어려워하는 걸 볼 때, 본인의 바운더리 안만 챙기는 스타일 같았다.

‘소속사 동료들이 괜찮아서 다행이야. 그 여배우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피곤했을 텐데.’

화려한 스타들도 결국 사람이다. 비즈니스와 자본으로 이뤄진 세계 속, 인간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갈증이 있는 것이다.

돌연 짧은 현기증이 뇌리를 스쳤다. 건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넌 우릴 믿지 않아.

―갑자기 무슨 소리지?

―변명할 필요 없어. 눈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동료들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소모품으로 여긴다는 걸 말이야. 예외라면··· 그래, 저 입 더러운 성녀 정도겠군.

그들은 세 번째 대악마··· 분노의 발몬에게 처참히 패했다.

놈은 지금까지의 상대와 격을 달리하는 괴물이었다. 격 낮은 자들은 먼지처럼 터졌고 강력한 영웅들도 피안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찾은 방법은, 동료들이 놈에게 분해되는 찰나를 노리는 것뿐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용사 나으리가 괴팍하고 정신 나간 악마광이면 좀 어떤가. 날 제물로 바친대도 상관없으니까,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최후의 4인 중 한 명, 마지막까지 싸웠던 ‘망나니’ 헌트는 칼자국 난 입술을 비틀었다.

―가서 쳐죽이라고. 악마든 인간이든.

“배우님들, 마지막 의상입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스탭들이 이동식 행거를 밀고 들어왔다. 최종 의상을 확인한 최필립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

“···이건 뭐야, 병정놀이?”

특별 주문 사항을 받아, 한조물산 디자인팀은 역사에 남을 걸작을 만들어냈다.

행거에는 척 봐도 코스튬 느낌의 제복과 은회색 흉갑, 로브(Robe) 형태의 벨벳 코트가 일상복들과 함께 걸려 있었다.

구신승이 견갑 안쪽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역시 퀄리티 좋아. 수트 위에다 입어도 안 무겁겠다.”

“어질어질하네··· 게임 광고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찍어야 된다고?”

“우리 막내 픽이라잖아. 화보 끝에 디렉터스 컷으로 들어갈 거라던데.”

그놈의 용사··· 궁시렁거리던 최필립은 걸린 옷들을 뒤적대다가 물었다.

“이거 중에 아무거나 골라도 되나? 박건 씨는 뭘로 할 거예요?”

이쪽이 입을 건 정해져 있다. 건은 흉갑과 털 달린 망토, 새까만 가죽바지를 골라냈다.

“늘 입던 걸로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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