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는 불길을 잡으려면 (5)
* * *
구신승의 집.
집주인의 취미가 요리라는 점을 증명하듯, 주방에 마련된 미니 바부터 인테리어가 호화롭다. 한쪽의 아일랜드 식탁에도 값비싼 위스키가 몇 병이나 보인다.
가정용 물담배 호스가 널브러져 있고, 채 사라지지 않은 연기가 집안을 떠다닌다.
구신승과 최필립, 사람 많은 곳을 꺼리는 ‘집돌이’들의 소박한 취미 생활이다.
“그만 마시고 가라. 내일 촬영도 있으면서.”
맨정신인 구신승과 달리, 이쪽은 벌써 반 이상 취했다. 최필립은 집게로 얼음이 담긴 버킷 안을 휘저었다.
“현실 연기 몰라? 어차피 술 먹고 진상 떠는 씬인데, 술 냄새 좀 풍기면서 가도 돼.”
“그러다 기사 떠야 정신을 차리지.”
“우리 회사 무시하지 마, 백하니 개진상도 틀어막는 게 로만 홍보팀이야.”
알아서 하든가, 중얼거리며 손을 뻗은 구신승은 커피포트 전원을 눌렀다.
하는 양을 지켜보던 최필립이 불쑥 말했다.
“괜찮을까 모르겠네.”
“누구, 내일 최필립 뱃속?”
“···박건 씨 말이야. 그렇게 인터뷰를 박았으니 백 퍼센트 작가 귀에 들어갈 텐데. 비중 줄이고 캐릭터 아작내면 모양새가 더러워져.”
달칵. 찬장을 열고 컵라면을 꺼내면서, 구신승이 대꾸했다.
“근데 인터뷰는 왜 했냐, 밉보이면 네 분량도 같이 잘릴 거 알면서.”
배우들은 수많은 가면들을 쓴다. 컨셉도, 비즈니스도 아닌, 동종업계의 동료와 느슨하게 취한 지금이 가장 민낯에 가깝다.
위스키 잔을 든 최필립이 히죽 웃었다.
“하나가 아니라 셋이면 얘기가 다르지. 여진주가 암만 지랄맞아도 주연들 삼형제를 다 자를까.”
“그래. 계산 참 잘하네.”
“농담이고, 박건 씨가 좀··· 이쪽 인간 안 같아서 신기하잖아. 그 원작자도 봐,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사람한테까지 의리를 챙기고.”
탑 배우 2년 차, 사람 하나가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아무리 겸손한 이라도 인기의 맛을 보면 태도가 달라진다.
스탭은 수십 명씩 붙고, 팬들은 구름같이 몰려들고, 눈짓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전능감에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회사가 대체로 그렇긴 한데··· 어디까지 한결같을지 궁금하긴 해.”
“나중에 술이나 먹자고 하던가. 백이랑 진도 불러서, 진짜 헬파티 열면 재밌겠어.”
우욱, 백하니? 이름을 듣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리던 최필립이 문득 웃었다.
“그래, 진지유가 특출도 몇 번을 나갔지. 기자들이 걔 진짜 성격을 알았으면 지금처럼 못 넘어갔을 텐데, 이래서 이미지메이킹이 중요해. 모두에게 사심 없이 친절한 여배우.”
“확신하긴 일러. 천하의 최필립이 후배한테 우호적인 것도 신기한데 뭘.”
“뭐, 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니까.”
최필립은 어깨를 으쓱이고 잔을 비웠다. 이내 주방에 매콤한 냄새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김치를 꺼내, 컵라면과 젓가락을 챙겨 온 구신승이 말했다.
“난 다른 게 궁금하던데. 우리 해결사가 방송 노괴도 설득할 수 있을지.”
“뭘? 누굴 설득해?”
“말 안 했나? 박건 씨가 오늘 여진주랑 만난다던데?”
툭, 최필립의 팔꿈치에 버켓이 쓰러졌다.
얼음들이 식탁을 굴렀지만, 집주인은 본체만체하며 자기 컵라면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최필립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 참, 일관성 있게 빠꾸가 없네.”
*
홍대, 유명 방탈출 카페.
지하로 내려가면 나오는 카운터에서, 여직원들이 입을 가린 채 속닥거린다.
“맞지?
“맞아. 501호, 마왕성 대모험 방.”
“와, 실물로 보니까 중저음 개미쳤다··· 스케줄 없을 때 혼자 놀러 왔나 봐. 나올 때 사진 찍어 달라면 해 주려나?”
“그러다 사장한테 잘릴걸.”
“뭐래, 지도 넋 놓고 얼굴만 봤으면서.”
가장 한가한 오후 시간.
룸의 앞뒤 타임을 전부 예약한 사람이 연예인, 그것도 박건일 줄이야.
‘문이 닫히면, 안에서 열어달라고 하기 전까진 못 나오는 게 맞습니까?’
‘예, 여기 마이크가 다 연결돼 있어서요! 절대 갇히거나 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아예 자물쇠가 있으면 좋은데··· 알겠습니다.’
직접 열쇠를 받아가면서, 규칙을 듣는 모습조차 일반인 팬에겐 평생 못 볼 경험이다.
게다가 팬서비스도 좋다지 않나. 사인에 사진까지 해 달라고 할지, 직원들이 행복에 겨운 고민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 501호가 어디죠?”
척 봐도 성깔깨나 있어 보이는, 숏컷의 중년 여성이 카운터 앞에서 물었다. 포스에 눌린 직원이 떠듬떠듬 답한다.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아, 근데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됐어요. 그 사람이 부른 거니까.”
여자는 바람이 일도록 홱 돌아서서 걸어갔다. 또각, 또각, 또각··· 힐 굽이 바닥을 찍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명품으로 도배된 뒷모습을 보다가, 두 직원은 서로를 마주봤다.
“···에이, 설마.”
“그치? 뭔 미팅을 방탈출 카페에서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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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주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던전처럼 꾸며진 방 안. 그녀를 부른 배우는 통나무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
심지어 커피는 그녀 앞에도 있다. 카운터 옆 셀프 바에서 박건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뭐 하자는 거지?’
들어왔을 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가타부타 말도 없다. 검은 반팔티에 와이드한 데님. 히스테리 중증 환자조차 마음이 평온해질 마스크지만······.
‘그래 봐야 껍데기지. 배우들 패턴은 다 비슷해, 얼굴만 들이대면 구워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박한 족속.’
상대가 글로벌 탑스타라도, 외모로 호감을 갖기에 여진주의 경력이 지나치게 높다. 30년 차 방송작가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요, 얼굴을 보자더니 이상한 데를 예약해 놓고. 할 말이 있어서 그런 인터뷰를 한 게 아니었나?”
박건은 탁자의 전자시계를 흘끗 보았다.
“죄송합니다. 또 오실 분이 계셔서, 이제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오실 분?”
여진주의 고개가 기우뚱할 때, 철창이 그려진 나무문이 열리며 남자가 들어왔다.
“어······.”
들어온 남자, 부쩍 수척해진 윤발25와 여진주의 눈이 마주쳤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직감이란 것이 있다.
이쪽은 방송작가고 저쪽은 배우··· 그렇다면 새로 온 인간은 누구겠나.
여진주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윤발25도 홱 돌아섰지만,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어어··· 뭐야, 이거 왜 안 열려? 저기요! 안에 사람 있어요!”
꽁트를 찍기 시작한 윤발25는 무시한 채, 여진주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죠?”
“같이 뵙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요. 두 분께 드릴 말씀도 있고요.”
“그럼 미리 언질을 주든가. 이런 데로 불러내서, 가둔 채로 어쩌려고? 깜짝 스타라고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슬슬 언성이 올라가는데도, 일을 꾸민 사람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박건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언제든 나가셔도 됩니다. 기자들 이목 때문에 여길 고른 거라서요.”
“······.”
여진주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감탄했다.
‘이 세상 뻔뻔함이 아니네, 생긴 거랑 다르게.’
미팅 장소로 방탈출 카페를 예약한 기상천외함은 둘째치더라도, 싸움 중인 원작자와 방송작가를 한자리에 모았다.
본래 이것은 배우가 아니라 방송국··· 최소 CP급이 나서서 중재할 일이다.
행여 저한테 불똥이 튈까 다들 쉬쉬하는데, 아무리 주연이라지만 객기가 도를 넘었다.
슬그머니 다가온 윤발25가 말했다.
“저, 박 배우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나도 이 사람이랑 할 얘기 없어요. 이제 와서 누가 맞네 틀리네 하기도 싫고.”
여진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정상이지. 방구석에서 방송국 욕하는 글이나 쓰는 게 아니라.”
“방구석?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왜, 찔리긴 하나 봐? 그렇게 할 말이 많았으면 작업실로 찾아오지 그러셨어. 댁 글 구린 점 하나하나 짚어 줬을 텐데.”
“이 아줌마가, 보자보자 하니까······!”
윤발25의 목에 핏대가 섰을 때, 여태 말이 없던 배우가 입을 열었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두 작가의 시선이 돌아갔다. 박건이 군용 더플백에서 웬 책들을 꺼내 놓고 있었다.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 ‘오늘은 맑음’, ‘종말남녀’, ‘종 울리는 인간’··· 이 자리에 있는 작가들의 단행본과 대본집이다.
“두 분의 전작들, 단행본으로 나온 책들, 지금까지 쓰신 원고들까지 전부 읽고 나서, 다시 이번 작품을 쭉 봤습니다. 아직 촬영 전인 분량에서 어디가 바뀌었는지도요.”
“그래요? 누가 더 나았어요?”
윤발25가 냉큼 물었고, 여진주도 불쾌함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답을 기다렸다.
박건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소설은 원작이 재미있었습니다.”
“역시!”
“드라마는 각색된 버전이 좋았고요.”
“그렇지··· 가 아니라, 예에?”
허공에 어퍼컷을 내지르던 윤발25가 눈을 끔뻑였다. 담담한 감상이 이어졌다.
“제가 주인공··· 회귀자라고 생각했을 때, 두 분 작품의 차이점은 첫 목표였습니다. 소설은 그룹을 승계하고 되살리기 위한 기업적 비즈니스가 우선시됐고, 드라마는 회귀 후 배신자들의 복수가 중점이더군요.”
정확한 분석이다. 웹소설은 모두가 아는 클리셰를 시원시원하게 건너뛰며 은한섬의 세력을 키운다면, 드라마에서는 선화그룹의 인물들과 감정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경영전략 기반 기업물이냐, 몰락할 운명의 그룹을 재건하려는 복수극이냐, 방향은 같지만 순서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났던 거예요. 드라마라 달라야 된다? 다 개소리예요. 태생이 기업물인 작품을 왜 복수극으로 몰고 갑니까? 어차피 나중엔 할아버지고 형들이고 다 때려잡는데.”
“이쪽이 할 말이에요. 캐릭터의 서사에 감정을 이입해야 시청자들이 극을 보죠. 무식하게 사건들만 나열하면 다 떨어져나가요.”
“어차피 같은 결론 아닙니까?”
작가들의 말을 배우가 받는다. 촬영장과 극중에서는 볼 수 없던, 느릿하면서도 선명한 말투다.
“저희의 목표는 똑같습니다. 돌아온 회귀자가 돈을 쫓든, 복수를 하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작품을 만들어 전달하는 것. 다만··· 그 밑에 누군가의 희생이 깔렸다면, 아무리 큰 성공이라도 반쪽짜리일 뿐입니다.”
정중하지만 냉정한 비판이 이어진다. 그냥 연기··· 또는 예술만을 따지는 자리라면 이 자리에서 박건이 가장 후배다.
그러나 여진주는 물론, 씩씩대던 윤발25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마치 한평생 실패해 온 노인이, 후배들에게 마지막 회고를 전하는 느낌인 탓이다.
“이 역시 월권임은 압니다. 이 일로 제 배역의 비중이 줄어들거나, 다른 불이익을 받아도 당연한 대가라 여기겠습니다.”
“···누굴 쫌생이로 아나. 그건 앞뒤 구분 못하는 머저리한테나······.”
“하지만 두 분 작가님께서 작품의 영혼을 아끼신다면.”
투덜대던 베테랑 작가도 말을 멈췄다. 고요 속에서, 타 버린 폐허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힘을 합쳐 주십시오. 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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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뒤, 여진주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여전히 표정은 싸늘했지만 목소리는 사뭇 누그러져 있었다.
“나 참, 삼십 년간 글밥 먹으면서 이렇게 혼나긴 처음이네. CP도 아닌 배우한테.”
“결례가 많았습니다.”
“인사치렌 됐고, 무슨 말인지 잘 알았어요. 저쪽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거, 작가님. 나도 한국 사람이거든요? 댁보다 999배는 더 잘 알아들었을걸.”
윤발25가 뚱하게 대꾸하는 와중, 여진주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종 울리는 인간, 그 대본집은 어떻게 구했어요? 벌써 절판된 지 오래일 텐데.”
“경매사이트에서 샀습니다. 딱 하나 나온 걸 운 좋게 가져왔죠.”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
60분이던 전자시계의 남은 시간은 벌써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듣기론, 앞의 마이크에 대고 ‘포기’라고 하면 게임이 종료되는 모양이었다.
여진주를 따라 윤발25도 일어섰지만 박건은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윤발25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배우님, 뭐 찾는 거 있어요?”
“단서 찾습니다.”
“······?”
두 작가는 영문을 몰라 서로 마주 봤다. 깃펜과 약품, 고서 등 탈출 소품을 뒤적거리던 박건이 말했다.
“바쁜 일 없으시면 두 분도 하고 가시죠. 다음 타임까지 결제해 뒀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하, 하하··· 푸하하핫!” 기어이 폭소를 터뜨린 윤발25와 이마를 짚는 여진주의 위로, 나무 팻말이 잔잔히 흔들린다.
[◆마왕성 대모험, 적정 인원 3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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