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는 불길을 잡으려면 (6)
* * *
투 트랙 촬영의 장점.
이 현장에서 저 현장으로 옮겨 가면, 다른 현장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도 많다.
주로 ‘이건 잘 봤다’, ‘저 씬이 정말 재밌었다’는 등의 격려며 응원이다.
지금 건의 앞에서 열성적으로 감상평을 늘어놓는 EBC 최영오 PD도 그런 쪽이다.
“방금까지 봤는데, 와··· 최양영 배우랑 기싸움 장난 아니시던데요. 여 작가님이 또 로맨스릴러 장인이잖습니까, 기업물인데도 캐릭터 개성들이 확실하니까 더 흥미진진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피곤하진 않으세요? 오늘은 무거운 장비 드는 씬도 많아서요.”
건은 즉답했다.
“내일까지 열세 시간 더 찍을 수 있습니다.”
“예? 왜 하필 열세 시간이에요?”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그 전까지는 계속 촬영해도 괜찮습니다.”
“아이, 그때까지 뛰면 저희부터 죽어요!”
우는 소리 뒤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망회돌’ 촬영장 쪽도 분위기는 좋지만, 이곳은 드라마 특유의 급박함이 덜하다.
[박건, 베일에 감춰진 다큐멘터리 촬영··· 관계자 측 “배우의 또 다른 모습 보실 것”]
[15분 -> 30분 -> 60분, 무려 한 시간으로 늘어난 ‘불의 길 : 소방 속으로’]
연예계 블루칩이 EBC에 뜬다.
박건의 출연 자체만으로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 해에 몇 번 없는 검색어 기록까지 갱신한 상황.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축제판이다. 촬영이 거듭될수록 말라 가는 나종모와 달리, 최영오 PD는 화색이 만연해져서 묻는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님은 어떻게······?”
“아마 승낙하실 겁니다. 출연하신 김에 조금만 더 나와 달라고 하려고요. 안 그래도 오늘 촬영 구경을 오신다더군요.”
“예, 예. 그럼 김 작가한테 따로 연락 안 줘도 되겠네요.”
은밀한 눈빛교환이 오간다. 공모자처럼 끄덕거린 뒤, 건은 현장을 둘러보았다.
최영오 PD는 오늘 촬영을 위해 완벽한 준비를 해 왔다.
한쪽에는 살수차와 소방차가 서 있고, 저쪽에는 촬영감독이 엑스트라들에게 디렉션을 준다.
교육방송 주머니가 알짜배기라는 말이 사실인 걸까. 소방청의 협조까지 얻어 제작했다던, 불을 붙일 세트장도 제법 실감 넘친다.
저만치, 특수효과팀과 상의하던 최영오 PD가 목소리를 높인다.
“자, 준비합시다!”
*
S#12. 소방차 안(내부)
출동한 소방차, 대원들 옆에 탑승한 카메라맨이 박건의 얼굴을 잡는다.
흔들리는 8mm 캠코더에 지치고 퀭한 표정이 비친다. 이어지는 사이렌 속 짧은 문답.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사당 쪽, 저희 관할 화재 출동이요.
―아버지랑은 같이 나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마침 방지턱을 넘느라, 차체가 한 차례 흔들렸다. 소방관의 눈동자에 미세한 떨림이 스친다.
―내근직이세요. 손을 다쳐서.
오늘만 벌써 네 번째 출동이다. 오전에는 만성질환자들을 이송하는 구급출동이 두 번, 바로 직전에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시민을 구조했다.
화재출동은 소방서의 출동 중 가장 그 비중이 적은데, 도심의 화재는 한번 났다 하면 확 번지는 것이 문제다.
“인피(인명피해)는?”
“없습니다, 스프링클러가 초반부에 작동하다가 꺼진 모양인데, 덕분에 내부 직원들은 전부 대피했다고 합니다!”
크지 않은 오피스 건물이다.
현장 지휘를 맡은 팀장이 화점을 확인한 뒤, 뛰어내린 소방관들이 수관(소방호스)을 연장하고 노즐을 배치한다.
구조할 인명은 없으나, 내부의 불길을 잡고 화점을 타격하려면 진입이 필요하다.
곧, 시뻘겋게 넘실대는 화마 위로 세찬 물줄기가 뿜어지기 시작한다.
“······.”
건물 초입, 소방모를 쓴 박건이 물줄기를 뿜는다. 다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지만, 정작 불길 속 사람은 한가롭다.
촬영 전 현직 소방관과 화재 전문 특수효과팀에게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거기다 진짜 불이 아닌, 연기만 많이 나오게 하는 소품을 사용한 상태. 지난번 백하니처럼 주변의 안전사고만 경계하면 된다.
‘옛날 생각이 나는데.’
지옥의 업화. 대악마들은 모두 초고온의 불길을 수족처럼 다뤘다.
기본적으로 마법 저항력을 지진 용사의 육체지만, 아무리 신성력으로 보호한들 초고온의 불길에서 안전하긴 어렵다.
살과 뼈가 함께 녹아내리는 작열의 고통··· 진물이 흐르고 수포가 차오르는 기분은 수도 없이 경험한 바였다.
아버지도 그렇게 다쳤다고 했다.
유례없이 많은 사상자를 냈던 현서아파트의 화재. 그곳에 출동했던 팀이 고립됐고, 동료와 생존자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소방복이 녹아내리며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중에서도 오른손이 가장 심했다. 방화장갑이 훼손되며 피하 신경과 골조직까지 손상되어, 결국 절단까지 해야 했으니까.
‘난 괜찮아, 여보. 이렇게 살아 있잖아.’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박열호가 병원 침대에서 웃어 보였을 때, 어머니가 오열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박건, 아직 철왕국으로 전이되지 않았던 소년은 그때 마음먹었다.
‘아버지의 몫까지,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용사의 기감이 익숙한 기척을 감지한다.
불길과 연기 저편. 강의를 마치자마자 달려왔는지, 양복 차림의 박열호가 스탭들 틈에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작 아홉, 진입하라.
무전기에서 개인식별번호로 지시가 떨어진다. 소방관의 아들은 짧게 답한다.
―사칠(알겠다).
폭포같이 쏟아진 물줄기가 불길을 밀어낸다.
*
쉬는 시간.
박열호는 듬직함이 묻어나오는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오늘 촬영이 없는데도 아들의 현장으로 강의가 끝나자마자 달려온 참이다.
“몸은 좀 괜찮으냐?”
휴식 시간은 10여 분, 그 직후 다음 촬영에 들어간다. 소방복을 입은 채 다리를 뻗고 앉아 있던 박건이 답했다.
“예, 아무렇지 않아요. 체력도 멀쩡하고.”
‘불의 길’에서는 디테일을 위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전부 실제 장비를 사용한다.
무거운 소방복을 착용하고, 관창으로 뻗어나가는 물줄기를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특수부대 버금가는 체력이 필요하다.
“고생하십니다! 한 잔씩들 들고 하십시오!”
그때, 허겁지겁 달려온 젊은 남자가 스탭들에게 커피를 돌리기 시작한다.
최근 쏟아지는 업무로 정신이 없는 박선 대신, 회사에서 붙여 준 로드매니저 이훈이다.
“배우님, 아버님, 커피입니다!”
“고마워요, 선이 대신 우리 건이 좀 잘 부탁해요.”
“아닙니다! 그럼 저는 마저 돌리고 오겠습니다, 드시면서 잠깐이라도 쉬십시오!”
운전경력 많은 신입이라더니,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이훈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박열호가 말했다.
“그래도 화재를 연출한대서 마음을 졸였는데, 와서 보니까 아주 잘하더구나. 감독님도 그렇고··· 저 매니저님도 그렇고, 사람들이 우리 아들을 믿는 이유를 알겠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탭 분들이 다치지 않도록 더 신경 쓰겠습니다.”
박열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보통 저쪽에서 할 말 아니냐? 아빠가 이쪽을 몰라서 그런가, 스탭들 안전까지 책임지는 배우 얘긴 난생처음 들었다.”
“뭐, 서로서로 돕는 거죠.”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아들에게, 박열호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오래전··· 퇴근한 그의 앞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선언하던 얼굴이 겹쳐진 탓이다.
‘아빠, 결심했어. 아빠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사람이 될 거야!’
유치원에 다닐 꼬마는, 어느덧 장성한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앞에 서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건이 넌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돕는 걸 좋아했었지.”
“제가요?”
“그럼 누구겠냐, 그래서 특수부대에 지원할 때도 걱정이 많았다. 갑자기 연예인이 된대서 또 놀랐고··· 고등학생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아들을 정학시켰던 학폭 가해자, 구의원의 막내놈은 결국 십 년이 지나 죗값을 치렀다.
박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덕분에 규일이가 절 기억하던데요. 그때 정학을 맞아 두길 잘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해 놓고는··· 하긴, 피해 학생 부모님이 고맙다며 찾아오셨을 때는 흐뭇했다. 너희 엄마도 내심 뿌듯했을 거야.”
박열호의 눈빛이 추억에 잠긴다.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 그것도 소방관의 핏줄을 물려받은 탓일까.
아들들, 그중에서도 큰 녀석은 유독 불의를 참지 못했다.
유치원 시절···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반 아이를 도와주고, 당당하게 ‘그게 옳은 일이라서’라고 했을 때는 바른 사람이 되겠다 싶었다.
‘오늘은 뭘 하고 놀았니?’
집에 와 물어보면, 흙투성이가 된 두 녀석이 나란히 눈을 반짝이며 합창했다.
‘도둑잡기! 서니가 도와줘서 다 잡았어!’
‘맞어, 형아가 다 잡아써!’
비교적 평범했던 둘째와 달리, 첫째는 어딜 가서든 두각을 나타냈다.
부사관으로 입대한 뒤에도 유례없는 속도로 진급을 했다. 알아보니 임무마다 무슨 전쟁영웅 급으로 공을 세워야 가능한 결과였다.
특수부대의 성격상 매스컴에 나오지 않았을 뿐, 실제로 부대 내에서는 거의 전설에 가깝다는 관계자의 귀띔도 더해졌다.
‘입대하자마자 특진을 몇 번이나 했다고, 어디다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지.’
그래서일까. 전역 직후 한동안 다른 사람 같던 아들이, 연기를 시작하고 조금씩 변했다.
감정표현도 돌아왔고··· 드문드문 웃는 모습도 보였다. PTSD에 시달리던 전쟁 용사가 친구들의 영향으로 회복되는 것처럼.
‘거기에 지금은······.’
소방관 다큐를, 굳이 소방의 날 120주년이라는 명목으로 찍는단다. 아들들은 어쩌다 출연하게 된 거라지만 박열호는 안다.
이 다큐멘터리는 배우로서 촬영하는 작품이 아니다. 부상당한 소방관의 가족으로, 아버지에게 건네는 아들의 헌정이다.
소방관으로서 단 한 번이라도 다시 서고 싶었던 소망을, 카메라 속이나마 이뤄 주기 위해.
박열호는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 둘 다, 고맙다.”
분명 들었을 텐데, 아들은 못 들은 것처럼 대본을 펼쳤다.
“아직 다 안 끝났는데, 마지막 촬영 때 아빠도 나오셔야 돼요.”
“응? 무슨 소리냐?”
“보세요. 여기, 후반부 대사가 있잖아요.”
지문을 본 박열호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처음 본 대본과 달리, ‘소방관 아버지’의 비중이 주연 급으로 높아져 있다.
“건아, 분량이 왜 이렇게 많아진 거냐? PD님은 지난번 촬영이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
의문에 빠진 그의 귀로, 다분히 뻔뻔스러운 멘트가 쏙쏙 박혔다.
“이게··· 작가님이 이러면 후반부 임팩트가 훨씬 좋을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싫으시면 어쩔 순 없는데, 그래도 이왕 하시는 김에··· 거기다 바로 다음 주 방영이라는데······.”
이만하면 아들이 아니라 타짜다. 처음부터 비중이 높다고 하면 부담스러워할 걸 알고, 판을 다 짠 뒤 끌어들인 것이다.
“건이, 너 이러려고······.”
“오늘 날씨가 덥네요. 방화복 때문에 그런가.”
다시 보니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어린 아들들의 투정에 져 주던 예전처럼, 박열호는 두 손을 들었다.
“그래, 다 해주마. 까짓거 작품 망쳤다면서 너희 엄마한테 좀 구박받고 말지.”
“구박은요. 아마 보고 우실지도 몰라요.”
“에이, 내가 나오는데?”
“그래서 더 우실걸요.”
자식은 어른이 되어서도 성장한다.
[불의 길 : 소방 속으로]
방영까지, D-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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