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19화 (119/122)

부상하는 로켓들 (1)

* * *

-내일을 만드는 기업, 우현건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합니다.

화면에서 광고가 흘러나온다. 본방송이 끝났는데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

박선이 먼저 눈치를 봤다.

하필 예전 집보다 훨씬 넓어진 거실이라, 침묵이 두 배로 불편한 기분이다.

박건과 박열호의 시선도 한쪽으로 향한다. 유일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 어머니 한영주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어, 음. 엄마? 많이 놀랐어?”

대답이 없다. 박선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엄마의 눈앞에 흔들 때, 일어선 한영주가 비틀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을 닫은 한영주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오래된 흉터를 연 지금.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친다. 무력감과 안타까움, 마음을 졸였던 시간들이 한데 섞여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엄마, 형이랑 아빠가 같이 뭘 찍는대. 소방의 날 65주년 특별 다큐멘터리라던데?’

박선이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할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두 아들이 남편을 위해 선택한 작품이라는 걸.

직접 보고서야 알았다. 이건 특집 다큐 같은 게 아니라 소방관들에게 보내는 추도사였다.

‘그냥, 아예 자기 얘기를······.’

그녀는 안다. 오른손을 잃고 나서, 남편이 수년간 시달렸던 끔찍한 트라우마를.

본래 부상당한 소방관은 내근직으로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박열호에겐 불가능했다. 소방과 관련된 업무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조차도.

―영주야, 출동해야 돼.

―정신 차려, 오빠. 지금 새벽 세 시야!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애들이 갇혀 있어. 저 소리, 살려달라고 부르는 소리 안 들려?

현서아파트는 민간인보다 소방관이 더 많이 사망한 화재 현장이었다.

손을 희생해 시민은 구했지만, 같은 팀 소방관 아홉 명이 순직했다. 평소 아끼던 후배와 절친한 동갑내기가 껴 있었다고 했다.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당분간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트라우마가 자극될 환경은 피하십시오.

정신과 통원과 극진한 간호로 남편은 서서히 나아졌으나, 몇 년간은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쳤다.

한밤중 땀투성이가 되어 깨어나, 비틀대며 부엌으로 가던 남편을 그녀는 잊지 못한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 동료의 얼굴이 떠올라 물을 마시는 것조차 죄스럽다던 이야기도.

똑똑.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조용히 들어온 사람은 둘째였다.

“형이랑 아빠, 진짜 못 말려.”

한영주는 입을 열지 못했다. 제 엄마의 눈가를 닦아 준 박선이, 자기도 붉어진 눈시울로 웃었다.

“나도 요즘에 바빴거든. 현장에서 아빠 연기하는 것도 제대로 못 봐서, 이렇게 비중이 많을 줄은 몰랐어. 지금 보니까 둘이서 우리 놀래키려고 완전 짰다. 그치?”

“···그래. 왜 저런 걸 찍었다니, 정말.”

“엄마한테 미안하니까.”

한영주의 고개가 홱 올라갔다.

“무슨 소리야? 너희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아빠 다치고, 엄마가 제일 고생 많았잖아. 매일 새벽같이 나가서, 일 끝나고 들어오면 우리들 공부부터 밥까지 다 챙겨 주느라 잠도 못 자고. 엄마 아니었으면 우리 대학도 못 갔어.”

소방관이 부상당하거나 순직하면 그 무게는 고스란히 가족들이 짊어진다.

녹즙을 영업하고 외제차를 팔기 전, 그녀라고 왜 꿈이 없었겠나. 눈앞의 생계를 위해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했을 뿐이다.

“아무튼··· 어, 이거. 이 타이밍에 말하려던 건 아닌데, 형이랑 얘기도 다 끝났으니까.”

겸연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던 박선이 무언가를 내민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꽃집이나 하면 좋겠다고 그랬지? 집 근처에다가 나름 크게 열 정도는 될 거야, 엄마 감성으로 카페까지 더해서.”

새 집에 새 차, 용돈까지 쥐여 주더니 이번엔 샛노란 통장이다. 한영주가 손을 내밀지 않자 박선이 억지로 쥐여 주었다.

어느새 들어온 박건과 박열호도 한 마디씩 보탠다.

“애들 정성이니까 일단 받아 둬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학기도 끝나는데. 강의 쉴 때쯤 되면 당신이랑 가게도 보고 좋지.”

“그래요. 저희랑 아버지가 잘되고 나서도 쭉 일만 하셨잖아요.”

“···평생 해 왔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말을 잇던 한영주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여전히 곱지만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수 없는, 처녀 시절보다 푸석해진 뺨이 조금씩 떨린다.

두 형제가 엄마를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박열호가 가족들에게 팔을 둘렀다.

“난 괜찮아, 여보. 당신이 나한테 해준 건 평생을 바쳐서 갚을 테니까.”

때때로 배우들은 작중 인물이 되어··· 연기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소방관이 작품 속에서 구한 이는 아들뿐만이 아니다. 늘 어둡던 박열호의 눈 밑에, 더 이상 그늘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뒤는 형이랑 내가 책임질게.”

박선의 말이 간신히 참던 눈물을 터뜨린다. 건아, 선아! 여보······! 얼싸안은 가족들이 오열하는 와중,

귀환한 용사는 웃었다.

다른 세계로 끌려가서도 잊지 못했던 숙원. 그 오래된 소망이, 이 순간 이루어졌다.

‘멀리 돌아왔지만···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불타 버린 땅에서도 대나무는 자란다.

누구보다 올곧게, 하늘을 향하여.

*

배우 박건,

그는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서울의 개’ 때는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으로, ‘흑의사제’ 때는 외인구단을 정상까지 끌어올리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작품마다 시청률 고점을 갱신하고, 파리패션위크를 말 그대로 찢어버리고 돌아와 죽어가던 CVN을 부활시켰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데뷔 후 다큐멘터리로 전국민의 관심을 받기란 연예계 역사상 처음이다.

[‘불의 길 : 소방 속으로’ 최고시청률 7.6%, 최근 3년 중 최고치]

[소방청장, 배우 박건에게 특별 표창장 수여 검토··· 소방관의 인식 고취와 명예 재건]

[박건, 가족들과 함께 소방발전기금 1억 원 쾌척··· ‘박건 사단’ 배우들도 잇따라 합류]

[최근 물의를 빚은 연예계 마약 스캔들, 박건의 미담과 비교되는 이유]

분당 최고시청률이 무려 7%를 넘겼다.

교육방송에서 흔히 나올 수 없는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후폭풍은 더욱 거셌다.

유튜브와 SNS로, 온갖 쇼츠들이 재생산되더니 기어이 지상파 뉴스까지 타 버렸다.

내레이션이 아닌, 배우가 직접 출연해 대박을 친 사례는 20년 전 유진룡의 형사 르포 정도나 견줄 수 있을까.

제목 : [이번 EBC 다큐 꼭봐라]

이건 영화다... UGV에서 상영해도 꼭 보러 간다... 스크린독점이라고 욕 안 할 테니 운성그룹 마케팅팀 제바류ㅠㅠㅠㅠㅠ

-방구석 시청도 6회차 관람함. 그저 빛이었음.

└빛건... 마지막 빛길엔딩까지...

└└이 친구는 빛길엔딩 뜻을 모르나...?

-아버지가 나와서 더 몰입됐던듯 ㅠ

└진짜 유전자란 게 있나 봐 ㅋㅋㅋㅋ 어떻게 부자 연기가 둘 다 저리 찰떡이누

└└부전자전이지~

-근데 운성은 욕 좀 먹어야 되긴 해;

└스독은 제쳐두고 일단 윈윈하자고 ㅇㅇ UVG가 상영관 안 걸어주면 타격 큼

└└설레발 아님? 진짜 영화관에 뜬다고?

-현직 관계자임. 이 정도 화제성이면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음, 배우들 연기랑 퀄 자체도 미친듯이 좋아서.

└불의길 개봉 존버 35시간차

└└난 50시간

대중들은 실화에 열광한다.

약간의 각색은 있지만 주연들이 실제 인물이라는 점과 독립영화스러운 연출, 박건의 티켓파워까지 합쳐지자 불이 제대로 붙었다.

EBC 시청자 게시판은 수년 만에 트래픽이 정지될 정도로 글이 쏠렸다. 잠시지만 ‘망회돌’의 화제성 지수까지 역전했을 정도다.

“유 팀장, 영화 개봉 요청이 엄청나게 쇄도한다는데? 어쩔 거야, 진짜 상영관 받아서 가?”

“뭘 물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최 PD한테 부탁해서 쳐낼 거 쳐내고 미편집본 앞뒤로 붙이자고. 색보정만 빡세게 하면 영화 그 자체야. 흐름 한번 제대로 타 보자고!”

안전의 일선에서 헌신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소방청은 주인공으로 급부상했다.

현직 소방관들을 위한 태그가 앞다투어 올라갔고, 소방청장이 직접 등장해 특별 표창을 EBC와 박건에게 수여했다.

수수한 검은 양복 차림으로 시상식에 참석한, 박건의 소감도 화제가 되었다.

‘운이 좋게 조명을 받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과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주 죄송스럽고 종종 부끄러웠습니다. 묵묵히 헌신하시는 분들이 더욱 주목받기를 바랍니다.’

담백하고 차분한 소감은 영어로 번역돼 글로벌 팬들에게 퍼져나갔다.

심지어 팬들의 주도로 비영리협회마저 결성돼, 순직하거나 부상당한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도 진행되기 시작했다.

-늘 화마와 싸우는, 용감한 보안관들이 이렇게나 열악한 처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시바삐 시스템 속 문제점을 보수하여 근본적 재발을 방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국민 약속을······.

급기야는 야당 국회의원까지 유감을 표시하며, 소방관 안전에 대한 개정안을 정식으로 국회 안건에 올리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항간에서는 배우의 선한 영향력이 국회로 미쳤다며 환호했으나······

“하여간 정치하는 인간들, 연예인 팔아서 숟가락 올리는 건 특기야. 다 늦게 외양간 고친다고 생색을 내고 싶나?”

신랄한 비난이 대기실에 쏟아진다.

최필립의 매니저, 김영태가 심장 떨어지겠다는 표정으로 애원했다.

“여기 우리 촬영장 아니거든? 제발 작게 좀 말하자,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눈을 감고 있던 최필립은 콧방귀를 뀌었다.

“뭔 상관이야, 난 장관들 앞에서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어, 진작 예산이랑 인사권 제대로 편성했으면 소방관들 위험해질 일도 없지 않았냐고.”

“그건 그렇지만······.”

관심을 받으면 알려지고, 그렇지 못하면 소리소문없이 묻힌다.

씁쓸한 사회의 현실이다. 뒤늦게 법률적 안전망이니, 소방관들 복지 혜택이니 해 봐야 죽은 이가 살아 들어오지는 않는다.

김영태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뭐, 그래도 박건 씨가 백 사람 몫은 해주고 있잖냐. 기어이 UVG에서 상영도 시작했대.”

“상영?”

최필립의 감긴 눈 한쪽이 떠졌다.

“그걸 영화로 개봉했다고?”

“응. 심지어 상영관도 꽤 받은 모양이던데··· 하긴, 이게 어디 보통 인기여야지. 내 동생도 최소 2회차는 보겠다고 난리더라.”

“연기 괴물이 수완까지 생기네. 우리 대표님처럼 돼 버리면 곤란한데.”

“야, 노 대표님이 어디가 어때서?”

“어떻긴. 고집불통 불법불사 돈귀신이지.”

딱 자른 최필립이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여진주 쪽은?”

“어, 조용하던데? 그 글쟁이 양반들, 서로 안 건드리기로 극적 타결을 봤나 봐. 아님 원작자 등쌀에 여진주가 한발 양보했거나.”

일약 중인 박건의 행보에 감화라도 된 걸까. 들려오는 첩보에 의하면, 요즘은 양쪽 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대기실 소파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최필립이 혼잣말을 뇌까린다.

“그 아줌마가 그럴 성격은 아닌데······.”

*

‘여진주 사단’의 오피스텔.

숨도 못 쉬는 중압감만 차 있던 작업실에, 생소한 공기가 떠돈다. 거실에 모여 앉은 보조작가들의 시선도 자꾸만 돌아간다.

문 닫힌 여진주의 서재. 그 안쪽에서 들려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 때문이다.

“아니, 아직도 드라마 문법을 몰라요? 6회까지 다섯 번씩 봤다면서요, 그런데 은선창이 대양그룹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소릴 왜······.”

누구일까.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의문의 통화가, 이제는 ‘망회돌’ 각색 방향을 잡고 있다.

저마다의 노트북 앞에 앉은 보조작가들이 입술만 움직여 밀담을 나눈다.

‘9회 대본 맞지?’

‘확실해, 선생님이 수정 중이신 부분이야.’

‘근데 누구지? PD님, 아니면 CP님?’

‘나종모 PD님은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연락 안 해, 항상 우리 쪽으로 먼저 주시잖아.’

추측만 무성하던 중, 보조작가 하나가 조심스레 의견을 낸다.

‘···혹시 원작자 아냐? 왜, 최근에 홍대에서 선생님이 제작 미팅을 했다는 소문이······.’

‘야, 그걸 믿냐? 저 인간 성격이 어떤데!’

‘그건 그렇지. 절대 양보할 리가 없지.’

함께 일한 지 수 년째. 여진주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보조작가들이다.

차라리 펜을 꺾으면 꺾었지, 원작 작가와 공동작업을 할 리 없지 않은가.

그때,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멈추더니 서재 방문이 벌컥 열렸다.

“나소희, 최유리, 문아름.”

“네, 넷!”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움찔 놀란 보조작가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문을 연 여진주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보조작가들을 훑어보았다.

“누가 잡아먹니? 왜 이렇게 쫄아?”

“아, 그게 아니라······.”

“여기 밑에, 무슨 이탈리아 레스토랑인가 생겼더라. 거기서 밥 시켰으니까 먹고 해. 오면 내 방으로 샐러드만 한 접시 가져오고.”

쾅! 할 말을 마친 문이 닫힌다.

적막이 깔리고, 보조작가들은 귀신을 본 듯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최고참 나소희가 멍청히 중얼거렸다.

“···작가님, 요즘 연애하시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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