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20화 (120/122)

부상하는 로켓들 (2)

* * *

3단 로켓이란 말이 있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때, 일정 고도에 다다르면 엔진통이 떨어진다.

어느 비행체든 마찬가지다.

1단 로켓이 맨 먼저 분리되고, 뒤이어 2차 로켓이 점화됐다가 분리되며, 마지막으로 3차 로켓에 불이 붙어 목표 궤도로 올라간다.

추진력을 얻으려면 불필요한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저 대기권을 뚫고 우주에 연착륙해 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요즘의 ‘망회돌’은, 3단계로 가기 직전의 로켓이다.

“아니, 이게 이렇게 될 일이야?”

KBC 사옥.

커피를 든 PD들 중, 한 명이 치를 떤다. ‘망회돌’에 묻혀 시청률이 바닥을 기는 월화드라마의 담당 PD다.

“웹소설, 그딴 유치한 컨텐츠를 사람들이 봐 주는 것부터가 잘못됐어. 상식적으로 죽은 놈이 다시 살아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럼 마법사랑 슈퍼맨은 말이 되고? 요즘은 재미만 있으면 끝이야.”

동료 PD가 분기탱천한 친구를 비웃는다.

웹소설의 승리, 방송가의 패배.

혹자는 이렇게 말하나, 사실 장르가 다를 뿐 패배도 몰락도 아니다. 원작을 사들여 초대형 히트를 칠 기회는 모두에게 있었으므로.

“작품이야 그렇다 쳐, 배우는 뭐야? 요즘 세상에 맡는 것마다 시청률 좀 봐라. 20%가 뉘집 개 이름이냐고.”

시청률 인심이 척박해졌다지만, 좋은 작품이야 분기마다 수십 개씩 나온다.

발군의 대작이나, 탑급 배우들만 잘 조합해 꽂으면 10%는 무난히 넘길 중박작들.

다만··· 하필 그런 것들만 골라, 직접 포텐셜을 터뜨리는 건 배우의 능력이다.

“야, 다음 작품에서도 박건이랑 붙는 놈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나랑 병서한이 꼴 날 거니까.”

‘하이페리온’의 박살 이후, KBC에서 박건은 저승사자로 통한다. 다른 PD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젠 안 하지. 소속사가 필모 관리 들어갈 거 아냐, 홈런배우 이미지 유지하려고.”

“최 PD가 뭘 모르네. 그 친구 작품 욕심이 얼마나 많은데, 듣기론 아주 폭주기관차야. 올해 시상식도 쓸어먹으려고 방송국 순회할걸?”

“그건 그래. 시상식에 집착한다더라고.”

박건을 아는 이들이 공감을 표시하는 와중, 감 좋은 PD 하나가 코끝을 긁적였다.

“글쎄··· 이룰 것도 다 이뤘는데, 한국에서 드라마를 더 찍을까.”

*

Yang.cHoi_

시청률 20% 공약! 오빠들이랑 같이 #릴스 #커플샷 #같이찍기 #안하는사람 #우리집망나니

최양영의 SNS에 인증샷이 올라온다.

포즈는 요즘 유행하는 볼하트. 은씨 집안 첫째와 둘째가 그녀 옆에서 포즈를 취하지만, 막내는 온데간데없다.

요즘 SNS에서는 배우들의 배역 과몰입이 팬서비스다. 게시글 상단, 추천 순으로 표시되는 댓글엔 구신승과 최필립의 애드립 잔치가 열렸다.

999_godsin : 우리 막내 어딨냐?

Feelip2 : 걔 전용기 타고 방콕 날아감

같은 날, 박건의 SNS에도 현장 사진 몇 장이 올라왔다. 최양영이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사진 아래, 쿨한 태그가 웃음을 유발한다.

#내가왜 #너네집망나니

같이 촬영을 하면, 관심사나 나이대가 비슷한 배우들은 금방 친해진다.

얼굴만 알 뿐 개인적인 친분이 없던 소속사 동료들이라면 더 그렇다.

구신승과 최필립의 SNS며, 촬영장 메이킹필름에는 배우들이 ‘박건 액션스쿨’에서 지도를 받는 영상들이 올라왔다.

-어렵네, 어떻게 하면 박건 씨처럼 찰지게 떨어질 수 있죠? 난 물보라가 저만큼 팍 튀질 않는단 말이지.

-막내야, 둘째 좀 챙겨줘라. 연기만 하더니 몸 쓰는 법을 모르는구나.

-그냥 하면 됩니다. 도와 드릴까요?

-어, 어어, 잠깐만······!

풍덩!

특히 호텔 풀장, 은한섬이 은선창을 빠뜨려 버리는 씬의 비하인드 컷은 본방 하이라이트보다 더한 조회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작가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여진주는 두문불출하며 작품 각색에만 매진하고, 윤발25도 SNS 활동을 멈춘 채 신작 연재를 재개했다.

일주일 넘게 침묵이 이어지자, 촬영장 구석에서 나종모 PD가 조연출을 들들 볶는다.

“알아보라던 건 알아봤어?”

“예, 양쪽 다 휴전 상태예요. 심지어 며칠 전엔 윤발25가 팬카페에 글을 올렸더라니까요, 망회돌 드라마도 많이 응원해 달라고.”

“뭐? 그 양반이 직접?”

고개를 끄덕인 조연출이 은밀히 속삭인다.

“말투를 보니까 거의 확실해요. 그리고 이건 여 작가님 쪽 정보원한테 들은 건데··· 놀라지 마세요. 여진주랑 윤발25, 저 둘이서 협업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대요.”

“뭐가 어째!”

나종모 PD가 버럭 소릴 질러서, 조연출은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 무서운 소리를··· 우리 드라마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는 게 분명해.”

“아니, 뭐 음해까지야······.”

“잔말 말고 들어!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 없으니까 예의주시하라고. 작가들끼리 또 싸우면 진짜 촬영장 분위기 박살나니까, 알아들었어?”

싸움닭 작가들 틈에서 감독은 노이로제를 얻고 말았다. 씩씩대며 걸어가는 나 PD의 뒷모습을 향해, 조연출은 혀를 찼다.

“···원래 저런 양반이 아니었는데, 갈수록 구 배우를 닮아 가시네.”

연출진이 고민에 빠진 사이, 세트장 한쪽에서는 대기 중인 배우들이 수다를 떤다.

망회돌의 분위기메이커··· 즉 ‘인싸’는 단연 로만 3인방이다. 그중에서도 구신승, 구신승이 없을 때는 박건 중심으로 사람이 모인다.

“저 또 ‘불의 길’ 보고 왔어요. 오늘 조조로!”

“어제 봤다면서요?”

“히잉, 우리 한섬 오빠 작품인데 어떻게 한 번만 봐요. 4회차인데도 눈물이 줄줄 나서 마스크 다 젖을 뻔.”

손에 든 상영표를 팔랑거리면서, 최양영이 코 먹은 소리를 낸다. 아침에 본 표를 굳이 촬영장까지 가져온 것이 그야말로 작위적이다.

로만 3인방 중 군기 담당, 최필립이 건성으로 대꾸한다.

“아, 예. 또 인스타에 올리시겠죠.”

“물론 올리긴 할 건데!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오빠 팔아먹는 애처럼 보이잖아요. 그나저나, 같은 최씨끼리 우리도 슬슬 말 놓는 건······.”

“죄송. 전 강릉 최씨라.”

“건이 오빠! 둘째오빠가 저 놀려요!”

최필립이 대놓고 무관심하다면, 박건은 친절한 말투로 팩트를 폭격하는 스타일이다.

저만치서 박선과 대본을 훑다가, 이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거린다.

“뭘 네 번이나 보셨습니까. 그럴 시간 있었으면 엊그제 지각을 하지 마시지.”

“······.”

수세에 몰린 최양영의 눈이 좌우를 살핀다.

틀렸다. 무슨 말이든 잘 받아주는 구신승은 오늘 촬영이 없고, 나머지 두 명은 그녀를 놀려먹는 데 진심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명뿐이다.

“석 선생님!”

“그래, 우리 양 배우.”

주연급 두 명이 같은 최씨라, 안면을 튼 이들은 최양영을 ‘양 배우’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석필호 옆에 찰싹 달라붙은 최양영이 애교를 떤다.

“선생님··· 아니, 선배님도 보셨어요? 건이 오빠 다큐멘터리 영화로 나온 거.”

“그럼. 박 배우가 큰일을 했지. 이럴 때일수록 주연이 중심을 딱 잡아야 극이 서는데, 역시 우리 막내다운 활약이었어. 덕분에 이쪽 시청률도 날개가 돋았다니까.”

칭찬은 박건이 받았건만, 제 형 옆에서 듣고 있던 박선의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석필호가 누군가. 현 촬영장의 최연장자에, 그 험하다던 80년대부터 충무로와 안방극장을 넘나들던 원조 연기파다.

그런 선배의 말인 만큼 무게감도 남다른 것이다.

“배우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면 박건은 당연한 성적표를 받아든 양 덤덤하다. 흐뭇하게 웃던 석필호가 말했다.

“그래, 그 할 일을 요즘 친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더군. 내가 젊었을 때··· 딱 여기 삼형제보다 조금 어렸을 거야. 영화를 찍는데, 거기 촬영장에서도 작감끼리 싸움이 붙었지 뭔가. 주연 배우는 멘탈이 완전히 나갔고, 스탭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실수만 연발하다가······.”

그리고 선화그룹의 총회장은, 카메라가 꺼졌을 때 지독한 투머치토커로 변신한다.

명배우고 뭐고, ‘라떼’ 썰이 한번 시작되면 듣는 사람 귀에서 피가 흐른다. 위기를 감지한 배우들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처음엔 참 멋있었는데······.’

‘어휴, 젊게 사시는 분이 옛날 얘기만 나오면 왜 저리 변하는지······.’

최양영도 식겁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쳤지만, 발동이 걸린 옛날 얘기는 멈출 기미가 없다.

그때, 흥미로운 눈빛으로 박건을 쳐다보던 최필립이 툭 던졌다.

“다큐가 잘 뽑히긴 했던데. 작가님들이 박건 씨 연기를 보고 감탄했을 수도 있죠.”

“이게 진짜 프로구나!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구나, 하면서요?”

“어··· 일리 있는 얘긴데. 박 배우 다큐 방영될 즈음부터 불협화음이 싹 줄었잖아. 윤발25인가? 그 원작자도 별 말이 없고.”

다른 주조연들까지 한 마디씩 거든다. 무성한 추측 속에서, 드물게도 박건이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자, 자! 다들 모였으니 오늘도 활기차게! 텐션 높여서 시작해 봅시다. 석 선생님, 건이 씨, 최 배우랑 양 배우, 다들 이상 없으시죠?”

눈치가 없는 것도 이쯤 되면 범죄다.

하필 말을 끊으며 등장한 나종모 PD에게 원성이 쏟아진다.

“PD님, 지금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어, 응? 왜들 그래, 우리 건이 씨가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오늘 그래도 잘하셨어요.”

*

극의 흥망성쇠는 무엇으로 정해질까.

압도적인 자본, 대대적 마케팅, 작가의 역량과 배우의 연기?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꾸준함이다.

그런 면에서, ‘망회돌’은 외풍이 거셀지언정 탄탄한 내실로 시청률을 꾸준히 쌓았다.

특히 은한섬이 전생의 정보를 토대로 기업을 인수하고, 배신자들을 숙청하며 세력을 만드는 장면들은 회차마다 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모든 것은 회귀자의 계획대로.

도심에 출연한 마피아들은 선화쉴드의 요원들에게 제압되고, 국방부와 방사청의 예산을 좀먹던 이들의 정체도 낱낱이 까발려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뒤에 누가 있었는지가 뒤늦게 공개된다.

―은한섬? 선화그룹 그 망나니가?

―그렇다니까, 그냥 미친 짓을 하던 게 아니었어. 대체 어디서 구한 정보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다 들어맞고 있다는군.

―언제부턴가 사람이 변했다던데, 정말 미래라도 보고 온 건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쟁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매스컴은 이미 은한섬의 편이다.

[은한섬, 국민들이 선호하는 ‘재벌 오너가’ 일원 1위··· 2, 30대에게 압도적 지지]

[선화쉴드, 전년도 대비 매출액 껑충··· 원인은 바뀐 부사장 때문?]

[사고뭉치가 달라졌다··· ‘망나니’에서 ‘능력자’로, 발톱 숨겼던 선화그룹 셋째손자]

대중들은 재벌을 질투하면서도 경외한다. 본디 영웅이란 선망과 질시, 경원과 환호를 한 몸에 받아야만 될 수 있는 것.

은씨 일가의 막내는 잘생긴 얼굴과 파격적인 언사, 재벌답지 않은 행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대한민국은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 정계와 재계와 법조계를 좀먹는 모든 벌레들을 제 손으로 뿌리 뽑겠습니다. 그것이 설령 핏줄을 겨누는 칼이라 할지라도.

선화쉴드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터뜨린 폭탄선언이 기폭제였던 걸까.

연설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은한섬은 우 실장의 전화를 받는다.

―은 회장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선화타워의 최상층,

또다시 조부와 손자가 만났다.

나종모 PD는 앵글의 디테일로 초반부와 현재의 상황 변화를 드러낸다.

맨 처음 은기학 회장에게 은한섬이 가려져 있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동등한 수평 앵글이다.

저울처럼 긴 원목탁자의 끝과 끝.

두 사내가 마주한다. 한쪽은 팔순이 다 된 노인··· 다른 한쪽은 젊은 거죽 속에 불혹(不惑)의 나이를 숨긴 청년이다.

“왜 부르셨습니까? 이번엔 술도 안 먹고 사고도 안 쳤는데. 아, 혹시 이제야 어머니 이야길 해 주시려는 거라면 들어 보죠.”

박건, 은한섬이 먼저 칼을 뽑아든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수트 속은 완전무장한 상태다.

이곳에 오기 전, 왕 실장이 몇 번이나 하던 당부가 머릿속을 맴돈다.

‘도련님의 말씀대로 은기학 회장이 전 선화물산 사장, 은재영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그룹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딸조차 해칠 만큼 잔혹한 노인이다. 수세로 몰아붙이면 혈육이고 뭐고 입부터 막으려 들지 모른다.

“그날··· 방산의 부사장으로 발령 나던 날 아침부터, 여태 궁금했었다.”

이윽고, 은기학 회장의 질문이 떨어진다.

“네놈, 대체 누구냐?”

손자면서 손자가 아닌 회귀자에게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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