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하는 로켓들 (3)
* * *
“···네놈, 대체 누구냐?”
“컷, 잠깐 끊었다 가겠습니다!”
나종모 PD가 외치자, 여기저기서 소리 죽인 한숨들이 새어나온다.
방금 전의 독대 씬이 보는 이들의 기까지 쭉쭉 빨아 간 탓이다.
“저 둘, 뭔 붙기만 하면 케미가 미치냐.”
“그니까. 최종보스 롤이라 그런가, 구신승 씨나 최필립 씨랑은 또 느낌이 다르네.”
애초 망회돌은 기업 경영물인 만큼 시니컬하고 사실적인 대사로 유명하다.
배다른 은씨 형제들이 그룹의 이권을 놓고 벌이는 테이블 공방, 호텔 리조트에서 맞붙는 연기 하나하나가 명장면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가장 숨을 죽이고 보게 만드는 장면은, 역시 은기학 총회장과 은한섬의 대립이다.
연출팀 스탭이 고개를 쭉 뺐다.
“봐, 저기 앉아 있기만 해도 그림 되는 거. 카메라가 있든 없든 영화라니까.”
넌 누구냐고 물은 뒤, 쭉 이어지는 신경전까지 한 방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앞의 물을 한 모금 마신 석필호가 말했다.
“잘 마쳤군. 고생했어.”
“선생님 덕분입니다.”
박건도 고개 숙여 답한다. 오케이가 나오면 즉각 일어서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이 둘은 유독 느긋하다.
스탭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이야기가 돌곤 했었다. 환갑을 넘긴 노장과 서른도 안 된 신인급의 닮은 점이 많다고.
“자네랑 합을 맞출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늘 공감이 가. 그러니 몰입이 안 될 수가 있나.”
“공감이라면······.”
“내 배역, 은기학 회장한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를 모르겠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박건의 화법은 단순하다. 아는 것을 안다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다.
빙긋 웃은 석필호가 부연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소릴세. 나도 한평생 카메라 앞에서 살았는데, 대체 사람 연기가 맞나 싶기도 하니까.”
박건은 희게 센 눈썹을 마주 봤다. 두세 번쯤, 촬영이 끝나고 주연들끼리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더니, 여태 궁금증을 참았던 모양새다.
“과찬이십니다. 구 배우나 최 배우도 저보다 더 잘하는데요.”
“그 친구들도 훌륭하지. 헌데 뭐랄까, 정해진 배역을 연기한다는 느낌이 아직 있어. 반면 박 배우는 같이 연기하는 사람까지 작품으로 끌고 들어가거든. 보고 있으면 나 젊을 적 봤던 김환 선생님이 생각날 정도야.”
“영광입니다. 저도 선배님이랑 연기할 때면 옛 지인이 떠오르니까요.”
“음? 날 보면?”
그게 누군지 궁금하다는 듯, 석필호가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흘린다.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야 없다. 배역에 맞게 질끈 묶은 백발과 장대한 체구, 쩌렁쩌렁한 목청이 다른 세상의 귀족을 닮았다고는.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몰락한 변경백 에른.
동료 에르한의 조부이자, 악마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던 강직한 노인이었다.
회차를 통틀어 두어 번밖에 보지 못해 잊고 있었는데, 은기학으로 분한 석필호의 모습과 워낙 똑같아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나저나, 참 신기하단 말이지. 누가 보면 윤발25도 함께 전이됐던 줄 알겠어.’
공통점 많은 웹소설 작가를 생각할 때, 은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나한테만 들려주면 안 되나?”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배우들이 연기 이야기를 한다고 여겼는지, 스탭들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매니저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구름 낀 한조타워의 통유리창, 압도적인 높이의 야경을 바라보던 석필호가 말했다.
“이 작품 작가들 말이야. 요즘 도는 소문처럼, 정말로 자네가 화해시켰나?”
눈빛을 보니 반쯤은 알고 묻는 눈치다. 주변에 듣는 사람도 없어서 박건은 쿨하게 시인했다.
“예. 계속 가다간 작품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요.”
“역시 그랬군. 어떻게?”
“보자마자 일어설까 봐, 방탈출 카페로 불렀습니다. 삼자대면을 하니 이야기가 통하던데요.”
“······.”
“연락처도 교환하는 것 같던데, 지금은 서로 협조하면서 작업 중인 모양입니다. 부탁을 들어 주셔서 고마운 일이죠.”
드물게도, 석필호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늙은 배우는 경탄한 표정으로 찬사를 보냈다.
“거, 정말 나이스한 망나닐세.”
*
‘망회돌’ 극이 중반을 넘어섬에 따라, 촬영 스케일도 나날이 커진다.
-어, 건이 씨. 난데, 다음 주엔 스턴트 씬들이 좀 있겠어. 걱정은 안 되는데 알고는 있으라고, 여 작가가 공력을 잔뜩 넣은 것 같거든.
태생이 재벌물인 만큼, 원작에도 스펙타클한 요소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여진주 작가는 오히려 영상에서 그 장점을 한껏 살렸다.
새로 받은 대본을 읽던 박선이 형의 오피스텔로 들이닥쳤을 정도다.
‘와, 진짜로 서울 한복판에서 이걸 찍어? 소설 속 씬이 이만큼 재현될 수가 있나?’
‘그래서 나 PD님이 고생하셨다던데. 한 달 전부터 촬영 허가를 받는다고.’
현재 망회돌의 주 스토리라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은한섬의 정/재계 장악.
둘째는 어머니 은재영의 흉수 확인.
셋째는 내부의 배신자 처단 및 외부 그룹들과의 총력전 대비.
투 트랙··· 아니, 쓰리 트랙으로 극을 꽉 채운 만큼, 주연과 조연 중 누가 나오든 간에 시청자들은 눈을 뗄 겨를이 없다.
―도련님, 대금 미지급으로 골치를 앓던 하도급업체들 대부분을 확보했습니다. 앞으로는 방산을 떠받치는 뿌리들이 저희의 편에 설 겁니다.
―좋아요, 이쪽은 싹 먹었고, 다음은 우리 머저리 둘째 형님네인데······.
선화쉴드에선 현 사장인 송세운의 협력을 이끌어내, 비밀리에 개발 중이던 웨어러블 로봇 및 전투 수트까지 성공적으로 완성한다.
세력도 인지도도 얻었지만 갈 길은 멀다. 둘째 형 은선창의 중공업 분야로 진출하며, 은한섬은 수많은 적들과 마주하게 된다.
―거 참, 들개들이 뭐 이리 많아?
선우희의 대양그룹과 재계 5위권 내의 강룡그룹, 형수들의 집안인 송일그룹에 영서그룹······.
모두가 강력한 라이벌이다.
안에서는 형제들과 경쟁하고, 밖에서는 그룹을 분열시키려는 늑대들과 싸우며, 할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진실까지 알아내야 하는 상황.
고달프고 험난하나 멈출 수는 없다.
오직 그만이 미래를 아는 지금, 손을 놓는 순간 선화는 다시 붕괴할 것이기에.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새벽··· 와인병 대신 권총을 든 은한섬은 희미하게 조소한다.
―어쩌다 돌아와서는, 사서 고생이구만.
주인공의 행보가 거칠어질수록, 액션 역시 회차마다 늘어난다.
소래포구 쪽에서는 한국으로 들어온 이탈리아 마피아들을 체포했고, 폭주를 일으킨 경쟁사의 인공지능 로봇을 선화쉴드의 자체 PMC인 ‘실버디펜스’로 저지한다.
그 과정에서 은한섬이 직접 수트를 입고 싸웠다는 것이 밝혀지며, 대중들에게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는 에피소드다.
―뭐라고? 송일그룹이 아니야?
그 와중, 심어 뒀던 정보원에게서 전생의 기억과는 다른 정보가 들어온다.
―예. 은선인 사장의 부인, 여미주를 쭉 추적했지만 깨끗했습니다. 송일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우리 쪽에 폭탄 던지려던 개자식들, 그놈들이 송일이 아닌 다른 쪽 세력이라고?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오히려 영서그룹, 또는 강룡그룹과의 관계로 보입니다.
―···빌어먹을, 기억이랑은 달라졌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은한섬이 회귀하며 많은 것을 바꿨고, 그에 따라 피아(彼我)의 판도도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
회귀자의 나비효과로 미래가 바뀐 상황. 더 이상 기억 속 정보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그 와중, 왕 실장에게서 연락이 온다.
―도련님, 은재영 사장님이 돌아가실 때 곁에 있던 수행원이 귀국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찍을 것은, 옛 수행원을 쫓는 서울 한복판의 추격전이다.
“세 번, 아무리 늘어져도 네 번 안에는 끝내야 돼. 이거 허가받은 시간이 겁나게 짧아서, 다른 협찬들처럼 엉덩이로 뭉갤 수가 없어요. 부담 될 건 알겠는데 부탁들 좀 합시다.”
나종모 PD가 감독들과 스탭들, 엑스트라를 모아 놓고 일장연설을 한다.
시간과의 싸움.
도로 촬영은 구청이나 경찰서에 허가를 받고, 해당 구역을 통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일부 방송국이나 대기업은 막무가내로 도로를 점용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정상적으로는 저 루트를 타야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허가된 시간도 촉박하기에 이 순간에는 모두가 예민하다.
직접 액션에 들어가는 스턴트맨과 배우뿐 아니라, 현장 스탭들 모두가 한 번에 끝나기만을 두 손 모아 기다리는 이유다.
“PD님, 배우 쪽도 준비됐습니다.”
“뭐야, 아깐 십 분 전이라며?”
나종모 PD가 인상을 구기며 돌아선다. 다음 순간, 조연출과 함께 서 있는 박건을 보자마자 시름에 잠긴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쪽이야 뭐, 건이 씨는 걱정하는 게 미안할 정도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지만, 그게 원숭이가 아니라 킹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냥 나무를 뽑아서 휘둘러 버리면 되니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에이, 또 겸손! 아까 다 들었어요, 김 선수가 스카웃하려고 했다면서?”
“선이한테 운전강습을 좀 받아서요. 단기로 실력을 많이 늘렸습니다.”
잘한다 잘한다 해서 혹시나 했는데, 급기야 카체이싱까지 능숙하다.
만약을 위해 차량액션 전문 스턴트맨, 거기다 프로 카레이서까지 데려왔지만 딱히 커버할 구석이 없을 정도다.
카레이서는 박건의 리허설을 보더니 입이 떡 벌어져서 손사래를 쳤다.
“이해도 자체가 일반인 수준이 아닙니다. 분기마다 연예인 카레이싱 대회가 열리거든요? 거기 나오시면 압도적으로 우승하실 겁니다.”
촬영 직전, 소품으로 준비된 벤츠 앞에서 나종모 PD가 뒷머리를 긁는다.
“이게··· 참, 국장님은 스포츠카도 괜찮다고 했는데 우리 제작비가 간당간당해서 말이지. 건이 씨 성격에는 람보르기니 하나쯤 부숴 줘야 만족스러웠을 텐데, 내가 미안해.”
“꼭 외제차가 아니어도··· 아니, 뭘 부수지 않아도 되는데요.”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숨기고 그래. 그 펀치머신부터 취향 다 알았는데.”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실수······.”
“어어, 슬슬 가야겠다. 오늘도 잘 좀 부탁해!”
긴장감 섞인 분위기 속, 촬영이 시작된다.
통제된 6차선 도로 위.
스턴트맨이 탄 혼다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고, 그 뒤를 은한섬의 벤츠가 바짝 따른다.
―부아아아앙!
카레이서가 괜히 감탄한 것이 아니다. 기어 변속에 코너링, 복잡한 골목을 뱀처럼 빠져나가는 주행능력은 일반인을 아득히 넘어섰다.
“따라가, 절대 놓치면 안 돼! 한 컷이라도 못 따면 오늘 촬영 접어야 된다!”
뒤쪽을 따라가는 촬영감독의 차량에서는 연신 고함이 터져나온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새카만 벤츠가 좁은 담과 담 사이를 통과하는 터프한 장면이다.
쾅, 퍽, 파캉!
양쪽 문짝이 사정없이 긁히고 백미러 한쪽은 아예 떨어져나간다.
차체에서 쏟아져 내린 마찰열의 불꽃이 골목 안을 밝힌다. 마치 타오르는 태양이 선화에 드리워진 어둠을 몰아내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오토바이가 멈추고 스턴트맨이 내린다.
―······.
은한섬도 엉망이 된 벤츠 문을 열고 하차한다. 오토바이 헬멧을 쓴 상대가 칼을 꺼내자, 꽉 다물린 입매에 균열이 생긴다.
―야. 좋은 말 할 때 그거 버려라.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대에게, 살벌한 경고가 연이어 떨어진다.
―진짜 뒈지기 싫으면.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나종모 PD의 컷 사인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컷, 여기까지!”
스탭들은 약속한 것처럼 시간을 확인한다. 남은 시간은 아직도 17분쯤, 이만하면 역대급으로 단기간에 죽이는 그림을 뽑았다.
손목시계를 본 박건도 고개를 끄덕일 때, 저 멀리서 낯익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괴짜 원작자, 그 웹소설 작가가 또 왔나? 헌데 윤발25는 없고 웬 키 크고 얼굴 시커먼 사내만 손뼉을 치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지는 와중, 박건이 드물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김률 감독님!”
“예, 박건 배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옛 전우가, 모처럼 촬영장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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