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씨발 저걸 어쩌지? 저걸 어쩌지?"
남은 놈은 셋. 이미 뒤에 있던 놈들은 죽은 거 같고 방금 목이 베인 녀석은 절찬리 경련 중이지만 살아 있는 녀석들이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금방 죽을 것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눈을 비비는 척하며 녀석들을 살펴보았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도망치지도 않고, 동시에 달려들어 날 죽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마검이라는 게 상당한 가치를 지녔으면서 자신들의 실력은 부족하다는 증거임이 분명했다.
난 놈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씨발 안 그래도 남는 거 없는 이곳에 약탈질하러 와? 이미 내 눈에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다.
"씨발 좀 닥...!"
옆에서 내가 목청껏 울어 제끼자 혼란스러움에 화를 못 참고 한 녀석이 소리치려는 걸 옆에 놈이 황급히 막아선다.
"미친 새끼야! 자극하지 마! 얘, 얘! 꼬마야. 그, 그 검 좀 내려 봐볼래?"
비열하게 생긴 놈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억지로 웃는 모습이 역겹기 그지없다. 그래. 들고 있어서 지랄 났으니 내려놓으면 될 거라는 발상을 할 때가 되었지.
"흑...흑...아, 안 떨어져요."
지금, 이 순간만큼 나는 팬터마임 배우 그 자체다. 온 힘을 다해 왼손에서 검을 떨어뜨리려고 해도 검이 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한 차례 메소드 연기를 펼쳐 보인 뒤 다시 목청껏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어엉 엄마아아아."
어머니! 아버지! 그곳에서 당신들의 아들이 저 개새끼들을 뒤틀린 황천으로 꼴아박는 모습을 구경하세요! 아들은 험난한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력은 아직 충분하다. 관절이 상할 것을 예상하고 마력을 때려 박아놔서 몸도 버틸 만하다. 나는 그대로 질질 짜면서 부모님을 모신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쥔 검은 어머니가 쥐고 있던 검이었다. 그리고 똑같이 생긴 검을 아버지 역시 쥐고 있다. 놈들이 마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면 보자마자 눈이 돌아갈 것이다.
"야! 어디가!"
"흐어엉!"
궁금하면 따라와야지.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은 결국 주춤거리면서도 노예를 끌고 내가 뭘 하는지 보기 위해 주춤주춤 다가왔다.
"씨발 돌겠...어?!"
파팍! 하며 한 놈이 앞으로 뛰쳐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보자 달려오는 녀석의 시선은 이미 아버지의 손에 들린 장검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기에 그대로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끄어어어...!"
베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저항감에 하마터면 검을 손에서 놓을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물집이 죄다 터진 게 느껴지지만 죽는 것보단 낫다. 나에게 기울어지는 몸을 억지로 버티자 털썩 하며 무릎을 꿇으며 도적의 숨이 끊어졌다.
그 사이 녀석의 벨트에 있던 단검을 뽑아 품 안에 숨긴 뒤 목청껏 울었다.
"마크으으으!"
"흐아아앙!"
다른 두 녀석은 상황 파악 못 하고 또다시 발을 동동 구르지만...목줄이 채워진 여자는 별세상의 것처럼 침착하기 그지없다.
쟨 눈치챘나 본데.
"흐어, 허어, 어?"
당황한 척. 이해 안 되는 척하며 검에서 양손을 놓는다. 그 모습에 두 놈의 눈이 크게 떠진다.
"흐어어 아빠아아!"
어차피 검은 두 자루다. 그리고 내 품에는 단검도 있다. 나는 그대로 아버지의 시체로 가서 주저앉는 척하며 검을 잡아 쥐었다.
"야 씨발 저거 빨리 챙겨!"
아예 검에서 멀어지자 두놈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뛰어들어 마크라고 불린 놈의 시체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병신들인가? 꼬마애가 쥐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있는데 둘 중 하나가 쥔 순간 딴 놈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 못하나? 혹여 바로 쟁탈전에 들어가나 싶었는데 그것마저도 아니었다.
녀석들은 그냥 사이좋은 병신 듀오였다. 난 주저 없이 검을 들고 달려 한 놈의 목에 찔러넣었다.
"흐컥?!"
"어? 어?!"
다시 뽑을 필요도 없다. 그대로 품 안에 있던 단검을 뽑아들어 옆에서 당황하는 녀석의 턱 아래에서부터 위로 온 힘을 다해 찔러 올렸다.
"끅!"
장검이 아닌 만큼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정말 마력을 싹 다 끌어모아 찌른 탓에 손잡이까지 들어가 버렸다. 그대로 뒤로 넘어져 고꾸라지는 녀석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깊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씨발! 뒈지는 줄 알았네 진짜! 이게 인생이냐!"
하드코어에도 정도가 있다 진짜로!
마력 운용을 깨우쳐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 뒈지거나 산속에서 부모님의 시체마저 못 지킨 서러움에 질질 짜고 있었을 것이다.
"아아아아악!"
물론 지금도 서러움에 복받쳐서 악을 쓰고 있지만.
하지만 인생 아직 한참 남았으니 지랄은 그쯤하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기로 했다. 그리고 날 바라보고 있는 노예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지저분한 원피스와 같은 복장에, 산발한 백금발 사이로 침착함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채고 있었죠?"
"...네."
존댓말을 하네. 노예라서 그런가? 아니지. 나라도 손발이 불편하게 묶여 있는데 눈앞에서 사람 6명을 죽여 버린 꼬마 사이코패스가 있다면 존댓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날 죽이려 들 수도 있었기에 도적 놈의 목에 박아 넣었던 장검을 다시 뽑아 경계하면서 다가가고 나서야 그녀가 엘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과 축쳐진 귀 때문에 이제서야 보인 것이다.
"엘프?"
동시에 그건 나에게 엄청난 희소식이기도 했다.
"...맞습니다."
목에 걸린 사슬과 팔 그리고 다리를 속박하는 구속구에는 알 수 없는 문양 같은 게 새겨져 있다. 저게 장식이 아닌 이상 저딴 걸 채운 이유는 분명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마법사이십니까?"
"......네."
순간 꼬질꼬질하고 초췌하기 그지없는 여자 엘프에게서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무릎 꿇으며 외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계셨군요 씨발놈아!"
마법사라니! 그것도 엘프 마법사라니! 그것도 마법으로 구속된 엘프라니!!
역시 세상 죽으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개 같은 일이 가고나면 좋은 일도 오는 법이지! 하지만 남이 보기엔 그냥 발작에 불과했는지 엘프는 극도로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푸르릉! 거리는 말의 울음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벌떡 일어나 엘프의 두 손을 덥썩 쥐었다.
"꺄아악!"
"제안 하나 하지요!"
"네?!"
"제안!!"
마법사는 거짓말을 못 한다.
생명의 은인과 다를 바 없는 마법사와 부모님 두 분의 입을 통해 검증받은 불변의 진리였다.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
◈
"그러니까...절 풀어 주는 대신, 당신이 16살이 될 때까지 길러달라구요?"
"딱히 하자가 있는 표현은 아닌데, 정확하게 하고 넘어가면 당신이 알고 있는 생존 기술과 삶의 지혜 전반을 가르쳐달라는 거지요."
아실리에라는 이름의 엘프였다. 모험가란다.
어쩌다가 저런 병신들에게 붙잡혔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저 병신들은 다른 노예상을 털었고 그 전리품으로 아실리에를 챙긴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예상외의 전리품에 기뻐하며 노예 시장을 찾아 도시로 가던 중 우리 마을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병신들에게 털린 상병신들이 대체 어떻게 엘프를 잡았는지 더더욱 의문이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보시다시피 마왕군의 침략으로 저에게 남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8살된 꼬맹이가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비록 8년이라는 세월이 짧은 건 아니지만 아실리에는 엘프잖아요? 평생 노예로 끌려다니거나 당장 죽을지도 몰랐던 상황이 8년간의 귀속 정도로만 끝나면 남는 장사 아닙니까?"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병신들에게 잡혔으니 상병신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엘프라는 종도, 마법사라는 것도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차라리 정말 착하게 사는 사람들한테도 쉽게 오지 않는 기연이 닿고 닿아 병신들 손에 엘프 노예가 들어갈 가능성이 그녀가 병신 엘프 마법사일 가능성보다 높았다.
그리고 지금 그런 그녀와 거래할 수 있는 입장이 된 나는 일생 일대의 기회를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법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사실 배우고 싶다해서 배울 수 있을 거라 여기지도 않습니다."
120년간 살아온 엘프였다. 자그마치 120년! 마법사라지만 활도 쓸 줄 알고 검도 조금은 만질 줄 안다는데 엘프의 조금이 말이 조금이지 1,2년 만진 건 배운 거 취급조차 안 하는 인종이다. 생존기술부터 모험가로서의 꿀팁까지 배울 게 넘쳐나는 살아 숨 쉬는 사전과도 같은 존재다.
"제발요 누님! 누님이 아니면 이 불쌍한 인간 꼬마 남자애는 이번 년도 안에 죽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고 했지만 거절할까 두렵다. 결국 난 무릎 꿇고 고개까지 숙여가며 빌고 또 빌었다.
"...그냥 절 노예로 데리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사람을 뭘로 보고."
이 누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순간 기분이 팍 상해 버려서 인상도 팍 구겨져 버렸다.
"누굴 개백정 새끼로 아시나. 노예라니. 그렇게 안 봤는데 사상이 매우 폭력적이시군요. 혹시 엘프들도 노예제도가 있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죠!"
"아니 근데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되려 역정을 내길래 윽박을 질러버렸다. 노예제도도 없는 게 왜 노예를 언급하며 까불어!
"...정말 인간 맞아요? 8살이라고?"
정말 미심쩍기 그지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였지만 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세상 살다 보면 별 희한한 인종들도 많이 보셨을 텐데 그냥 그러려니하세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이미 사람 여섯까지 죽인 마당에 뭘 더 숨길 게 있다고 어린 척을 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사실을 환생을 했네 뭐네 하며 정신을 의심받을 행동 따위 할 이유도 없다.
묘하게 의심 가득하면서도 경계는 사라진 시선이 한참 나를 주시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정말요?"
"정말입니다. 마법사이자 푸른 넝쿨 출신의 엘프 아실리에 엔데리니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앞으로 8년간 당신을 도우며 당신이 홀로 살아갈 수 있게 돕겠습니다."
살았다! 감격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난 재빨리 일어나 아실리에의 몸에 달린 구속구들을 하나하나 풀어 주었다.
열쇠는 도적 대장이 가지고 있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 구속을 제거하는 내내 이상한 표정을 짓던 아실리에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이렇게 풀어 준다구요?"
"예?"
"아니, 그, 맹약이라던가..."
"...에?"
뭔 소리야...? 설마...?
"제가 그냥 이대로 물건 챙겨서 도망치면 어쩌려구요? 원래 노예의 구속구를 차고 있는 대상을 조건을 걸고 풀어 줄 땐 구속구에 손을 얹고 재계약을 하는 겁니다."
"히익!"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눈이 돌아갈 뻔했다.
"제, 제발요! 도와주세요! 도움!"
정말 거의 눈물이 차 오를 뻔한 와중에 그녀의 종아리에 달라붙어 발버둥 쳤다. 조졌다! 조졌어! 난 그냥 풀어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 잠깐만요! 도망 안 칩니다! 저도 명예가 있지!"
다행히 아실리에는 명예와 상식이 있는 엘프였다. 거의 패닉에 빠진 날 진정시킨 아실리에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러니저러니해도 당신은 제 은인입니다. 엘프는 절대 은혜를 배신으로 갚지 않습니다."
"마법사가 거짓말을 안 하는 것처럼요?"
"사실 마법사 중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몰상식한 놈들이 있습니다."
"헉!"
진리가...아니었다고...!
"풉. 아니, 물론 거짓말을 안 하는 게 보편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니 마법사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맹신하면 안 됩니다."
그딴 천인공노할 놈들에게 마법이라는 거대한 힘이 쥐어지다니. 정말로 불합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아실리에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살며시 잡으며 똑바로 나를 바라본 채 말했다.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는 처음과 달리 확실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하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엘프는 없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후우...감사합니다."
당장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하드코어 이세계 생존기만큼은 면한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