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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4화 (4/412)

그렇게 아실리에와의 첫날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

부모님의 묘를 완성하고, 도적들의 물품을 처분하기 위해 아실리에가 말했던 마을에 방문했다. 자경단들이 자리 잡고 경비를 서기 시작하는, 그녀의 말대로 서서히 작은 도시로 기틀을 잡아가는 듯한 모습 탓인지 아실리에가 귀를 가리기 위한 후드를 눌러 쓰고 있었음에도 딱히 들어가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도적 놈들의 소지품은 볼품 없었지만 말들은 한 필당 금화 한 개 반 정도의 값으로 팔렸다. 아실리에의 말로는 그마저도 말의 관리가 온전치 못해 깎인 거라고 하니 역시 말이 귀하긴 한가 보다.

가장 좋은 값이 매겨진 건 의외로 도적 두목의 말이 아니라 다른 녀석의 말이었다. 글렌이라는 놈이었던가? 말 미간에 하얀 반점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그게 제일 관리도 잘되고 좋은 말이라더라.

우리도 말이 필요한 만큼 녀석만큼은 팔지 않고 기르기로 했다. 그렇게 모두 처분하자 최종적으로 우리의 품에는 이티스엘 왕국 금화 7개 은화 16개 동화 18개가 들어왔다. 나라가 발행한 화폐, 대규모 상회가 발행한 화폐 등등이 꽤 골치 아프게 나누어져 있다는 걸 8년 만에 처음 알아서 좀 충격을 먹었다.

"상단 화폐야 일반인들 손에 들어갈 일이 드무니까. 다른 왕국의 화폐도 마찬가지고."

들어 보니 상단 화폐는 금화밖에 없다더라. 일종의 수표의 역할인 듯하다. 덕분에 금 함유량도 높고 크기도 커서 다른 금화들의 거의 2배 값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다른 왕국은 대부분 비슷비슷하지만 라그넬 왕국의 화폐는 가장 가치가 낮으니 어지간하면 피하라는 조언이었다.

"은화 1개면 일반적인 어른 한 명의 일주일 식비 정도란다. 풍족하게는 아니고, 하루에 두 끼만 챙겨 먹으면 돈이 좀 남을 수 있긴 하지."

은화 10개에 금화 한 개 같은 구조면 참 좋았을 텐데, 동화 40개가 은화 1개고 그 은화가 30개 정도 모여야 금화 1개라고 한다. 번거롭긴 해도 결국 이해 못 할 거까진 없었다. 금세 이해하고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자 아실리에가 미소 지었다.

"부모님이 모험가여서 그런지 산술도 잘 가르쳐 주셨나보구나. 심지어 암산이 상당히 능숙해. 다행이야."

대학교까지 나왔다고 할 수는 없으니 나도 그냥 미소로 대답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아실리에의 경제 교실을 약식으로 들어가며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자 은화 10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필요한 걸 엄선해서 사긴 했지만 일반적인 평민의 처지에서는 눈이 돌아가는 소비였다.

집이 멀쩡했다 한들 원래대로라면 마을에서의 물물교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꽤 많은 것들이 사라진 탓이 컸다. 작은 짐수레에는 자질구레한 것들 외에도 닭 한 쌍 염소 한 쌍과 같은 가축들도 좀 실려 있었다.

새삼 그녀와 앞으로 8년을 지내게 된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려 준 그녀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두건을 둘러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아실리에는 굳이 되물어보는 대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더 고맙단다."

아실리에...그녀는 신이야...!

첫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미 하루가 다 지난 뒤였다. 결국 간단한 정리만 마친 우리는 이튿날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월동을 비롯한 살림살이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동안 육체 강화는 쓰지 않기로 한 탓에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고는 결국 8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사냥꾼의 자식인 만큼 그녀가 잡아 온 동물들의 핏물을 빼는 것과 가죽을 해체하는 건 아등바등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첫 번째 편견이 깨졌다. 이 세계의 엘프는 고기를 먹는다!

아니 오히려 먹는 정도가 아니라 주식으로 삼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컬쳐쇼크라서 물었더니 그렇게 웃을 수도 있나 싶을 만큼 배를 잡고 웃는 아실리에를 볼 수 있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이상한 편견이 네가 취한 지식 사이에 끼어들어갔나보구나. 세상 만물은 결국 균형에 맞게 돌아가게 되어 있단다. 숲을 지킨다는 건 동식물의 균형을 지키는 것과도 마찬가지지."

필요한 만큼만 사냥한다. 그저 그뿐이라고 아실리에는 말해줬다.

"우리가 경계하는 건 언제나 과도한 욕심 뿐이란다."

"어...그래서 드워프랑 사이가 안 좋은 거예요?"

그녀의 말만 놓고 보면 보석이랑 금속 세공하겠답시고 멀쩡한 땅굴을 파헤쳐 놓는 드워프와 사이가 좋아 보일 수가 없는 거 같아서 물어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실리에도 확답을 내놓지 못했다.

"글쎄 사이가 안 좋다고 할 거까진 아닌 거 같구나.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혈안인 종족이라서 그 집착이 종종 불쾌감을 주는 정도란다. 분명히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하는 행동이 밉상인 거 같은데 막상 결과물을 내놓고 보면 그 모든 행동들은 타당한 과정이라고 해야 하나?"

새벽부터 뛰쳐나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잡아 온 사슴의 가죽을 시원스레 벗겨내며 아실리에는 계속 말했다.

"그들은 자원을 헛되이 쓰는 법이 없어. 우리가 사냥한 동물을 효율적으로 삶을 위해 쓰려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이 캔 광물과 보석들을 효율적으로 쓰지. 병장기다 장신구다 만들기 위해 취하는 과정만 놓고 보면 엘프 기준에서는 과한 소비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엘프 입장에 불과한 것일 뿐 그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니 사실 아무런 문제도 될 게 없단다. 그저 엘프 기준에서 아주 조금 고까운 게 있다 보니 틱틱거리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동족의 편견을 지적하는데 매우 거침이 없네요 누나."

"후후. 올바른 지성은 올바른 비판을 기반으로 쌓이는 법이란다. 그보다 종족에 대한 네 편향된 지식을 고칠 필요는 있어 보이는구나. 밤에 잠들기 전에 이야기 삼아 알려줄게."

차마 내가 취한 종족의 지식이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지구의 판타지 소설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어린애다운 미소로 대답하는 것으로 퉁쳤다.

없는 걸 거기까지 창작해냈으면 존나 대단한 거지. 진짜 이세계 방문자였던 게 아닐까.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사슴 도축을 하는 동안에도 아실리에는 끊임없이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당장 사냥과 관련된 간단한 지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세상 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용들이 흥미롭고 궁금증을 자아낼 만한 것들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어린 내 나이를 의식해서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인 듯했다.

굳이 그런 거 없어도 열심히 들었을 이야기들은 지루할 틈도 없이 밤까지 이어졌다.

"엘드미아. 넌 나에게 배운 것들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니?"

풍족한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설거지를 하며 아실리에가 물었다.

"넌 분명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점이 많지. 무엇보다 그 나이에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거침없다는 것이 가장 크지만, 나는 네가 어딘가 어긋난 감성을 지니거나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구나. 처음엔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탓에 마음에 병이 든 건 아닌가 싶었지만, 넌 오히려 어지간한 어른보다도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

지극히 정상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비정상인 놈은 자신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법이기에 그냥 입 다물고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어렴풋이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는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구나. 복수하고 싶니?"

"제가 복수할 때까지 저희 마을을 쓸어 버린 마왕군 지휘관이 살아 있을까요?"

고민 없이 튀어 나간 내 질문에 아실리에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엔 내가 말을 이을 차례였다.

"전 정말 다 열심히 배울 자신이 있어요. 또래와 비교할 뿐만 아니라 한 5년 정도 위의 애들하고 비교해도. 걔들이 천재가 아닌 이상 제가 더 빨리 이해하고 배울걸요?"

그건 당연한 것이다. 미리 알고 있는 것도 있고, 생각하는 사고도 다를뿐더러, 노력을 위한 계기부터가 다르다.

"그래도 제가 누나한테 배울만큼 배우고 16살이 되었다 한들 마왕군의 지휘관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해요. 그렇게 죽을 지휘관이면 진즉 죽었겠죠."

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다. 그저 정신연령이 남들과 다를 뿐이다. 특별하지 않다.

"계속 노력한다면 그래도 20살에는 한 사람 몫은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때까지도 그놈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복수는 해야죠. 하지만 그건 감정적인 복수는 아니에요."

8살난 어린애가 할 소리는 아니다. 나라도 내 눈 앞에서 꼬마애가 이런 말을 하면 진지하게 듣기는 커녕 한 귀로 흘려들을 것이다. 하지만 아실리에는 달랐다.

"그러면?"

여전히 침착하고 잔잔한 눈동자로 내 대답을 기다려줬다. 서로 알게 된지 겨우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저절로 신뢰가 생기게 끔 만드는 눈이었다.

"전 두 번 다시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런 잘못도 안 하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모든 걸 빼앗기는 불합리함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그러므로 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을 것이다.

"녀석이 그때까지 살아 있고 제 능력이 되면 찾아내서 죽일 거예요. 그리고 녀석의 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남길 거예요."

어두워진 밤을 아실리에가 불러낸 빛의 구슬 하나에 의존하여 시선을 마주한 채, 나는 단언했다.

"다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말라고."

아실리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렇게 모든 이에게 경고하기 위해 저는 복수하고, 살아남고, 강해질 거예요."

나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며 나와 연관되어 친분을 가지게 될 수 있는 이들을 위해서.

나는 악착같이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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