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화 (5/412)

시간은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할 때 존나 빨리 지나간다. 그게 삶의 목표라서 열심히 하는 거면 진짜 존나 존나 빨리 지나간다.

그래서 빨리 지나갔나보다. 벌써 아실리에와 함께 지낸지 3년이 지났다.

군생활이 이거의 반만큼만 빨리 가면 휴가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빨리 갔다. 그리고 그 세월을 통해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실리에는 정말 신이 내려 준 동아줄 그 자체였다. 이세계에는 분명 신이 살아 숨 쉬고 계신다.

그녀의 모험가로서의 능력이 어땠는지는 아무런 상관없다. 엘프인 그녀는 훌륭한 사냥꾼이었고, 생활력 넘치는 여성이었으며 완벽한 교사였다. 이제 와서는 그날의 도적들조차 신의 대리인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실리에는 완벽했다.

귀족들이 진정으로 자식을 교육시키고 싶으면 엘프 가정교사를 둬야 한다.

"정말 별난 발상이네. 가정교사 엘프라니? 그보다 가정교사가 있는 귀족을 본 적 있는 거야?"

"엘드미아 찬-스!"

"또 그거니..."

엘드미아 찬스!

별거 없다. 그냥 묻지 말라는 신호다. 8년은 긴 세월이고 정이 드는 걸 무시할 수 없는 세월이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비록 지난 3년 동안 그녀의 모든 행동이 나에게 이득이었고 아무리 그녀가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동아줄이라 한들 결국 전생자인 입장인지라 터놓지 못할 내용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실리에는 별 불만 없이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짝거리는 백금발 머리카락과 윤기넘치는 피부에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시절의 흔적이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그런 흔적은 함께 지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이미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어보니 숲에 있으면 여러모로 회복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참으로 이세계다운 종족 특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간들은 그런 거 없나요?'

'인간들은......어, 없어.'

없다고 말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아실리에를 보고 확신했다.

정말 쓸모 있는 건 없구나.

저 엘프가 당장 종족 특성이라고 떠올리는 게 얼굴을 붉힐 만한 밤일과 관련된 것뿐이라면 말 다 했지. 덕분에 한동안 괜스레 우울해졌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인간종은 특별하지 않아도 인간 엘드미아 에가는 특별하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무려 나는 마력을 통째로 쓸 수 있는 몸이니까.

사실 아실리에는 극구 반대하므로 대놓고는 못 쓰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배운 마력을 정제하는 방법과 비교하면서 더더욱 확실해졌다.

그러나 어째서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환생을 한 것과 연관이 없진 않아 보이지만, 결국 갓 태어난 인간 한 명과 한 세기를 산 엘프 한 명의 지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영역인 듯했다.

더불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육체 강화는 가능해도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아실리에가 알려 준대로 마력을 정제하면 충분히 마법을 쓸 수 있는데, 마력으로 쓰려면 안 되는 이유도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아실리에는 내가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에 걸쳐 훈계할 게 분명하다. 옛날이었으면 모를까 이젠 절제 없는 훈계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그러고 보니 마을은 제국 신성회에서 용사가 발탁되었다고 시끌시끌하더라."

방금 막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며 아실리에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 내용에 벽난로의 그을음을 정리하다 말고 새삼 놀라서 나도 모르게 아실리에를 돌아보았다.

"와. 용사라는 게 진짜 있나 보네?"

"그러게. 나도 부모님한테나 들었었지 실제로 발탁되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아실리에와는 정말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원래 그런 줄 알았던 말투조차 사실 어색해서 나온 격식이었다는 건 좀 신선했다. 덕분에 이젠 그때의 말투로 놀려 먹기도 하지만.

"자, 입어봐."

포니테일이었던 백금발을 풀어 내리며 화사한 미소와 함께 아실리에가 꺼내 보여 준 것은 딱 봐도 남성용 바지와 외투였다. 간만에 보는 새 옷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게 뭐야 누나? 아직 더 입을 수 있는데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

"우리 동생 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커지는데 세 번이나 기워 입었으면 많이 입었지. 나중에 걸레로 쓰면 되니까 궁상피우지 말고 빨리 입어봐."

싱글벙글 웃으며 지저분해진 손을 닦고는 바지를 받아 갈아입은 채 빙글 돌아보자 아실리에가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 딱 맞을 줄 알았어. 이제 한동안 키 크지 마."

"안 될 말씀이지. 난 더 커야 해. 못해도 180까지는 클 거야."

"거인이라도 되려고?"

"체격이 크면 대부분의 자질구레한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고. 클 수 있을 때 커야지."

11살이 된 내 키는 거의 160에 육박했다. 3년 사이 무려 40센티 가까이 커버린 것이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커져 버린 키 덕에 한참을 올려 봐야 했던 아실리에와 비슷해지기까지 5센티 남짓만 남겨 놓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14살만 돼도 170은 그냥 넘길 듯하다.

"진짜 말하는 것도 그렇고 덩치도 그렇고 이제 누가 널 11살로 볼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아실리에를 바라보며 나도 웃어 주었다.

"누나도 120살처럼 보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옛날 말투를 흉내 내며 놀리니 바로 옆구리를 꼬집어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동생을 위해 번거로운 발품을 팔아준 누나를 놀려 먹어?"

"아! 아파! 미안! 도움!"

그 공격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기에 난 정말 쩔쩔매며 피해 다녀야했다. 정말 옆구리에 멍이 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꼬집히고 나서야 아실리에는 만족하며 밖으로 손짓 했다.

"나와. 생각난 김에 오늘은 머리카락 좀 자르자."

"오우. 안 그래도 답답했어."

나는 다 해진 로브와 은쟁반은 옆구리에 끼고 의자를 챙겨든 채 아실리에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아실리에 미용실의 이발도구는 정령이다. 바람의 정령을 통해 머리카락을 친다는, 상상도 못 한 발상은 컬쳐쇼크이다 못해 두려움 그 자체였다.

머리카락을 치다가 목을 친 경우는 엘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아실리에에게 이끌려 처음 이발을 했던 것도 이젠 즐거운 추억이다. 불현듯 떠올라서 뒷머리와 옆머리부터 깔끔하게 올려치며 머리를 다듬어 주는 아실리에에게 말했더니.

"그거 사실 귀를 날려 먹은 엘프가 있긴 해. 이발 할 때 장난치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 역사적인 엘프지."

깊은 배신감과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며 손질이 끝나길 기다리게 되어 버렸다.

부드러운 손길로 느껴지던 정령의 움직임이 망나니의 칼춤으로 바뀐 기분이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누나는 거짓말쟁이 엘프 마법사야!"

"뭐래니. 목을 친 경우는 정말 없는걸. 난 귀를 잘라먹은 경우가 없다고는 안 했어요. 자, 어때?"

내가 들고나온 은쟁반을 거울 삼아 확인시켜 주는 아실리에의 미소에 깊어지는 배신감을 곱씹으며 나는 비춰진 모습을 살폈다. 사실 워낙 아실리에의 실력이 뛰어나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은쟁반에는 검은 머리카락을 짧게 올려치고 윗머리만 좀 길게 남긴 잘생긴 소년이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믿었던 가족에게 배신당해 치를 떨고 있는 잘생긴 미소년이 보이는군."

"넌 솔직히 미소년은 아니지."

"아니 그걸 엘프 기준으로 두면 안 되지 누나. 인간 기준으로 이 정도면 잘생긴 거 아닐까?"

"너조차도 의문형으로 끝나는 주장에 내가 뭔 말을 덧붙이겠니?"

휘릭휘릭 정령을 움직여 머리카락을 털어 준 아실리에는 은쟁반과 로브를 들어 주변을 정리했고 난 투덜거리며 의자를 주워들었다.

솔직히 좀 날카로워 보여도 잘생겼는데.

"뭐 그래도 마을에 있는 인간들보단 인물이 훨씬 훤하긴 하지."

옅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던 아실리에가 말했다.

"그치? 나 혼자 개소리하는 거 아니지?"

역시 아실리에가 최고야!

"아. 그러고 보니 너 지난번에 마을 내려갔을 때 거기 애들이랑 한바탕 했다며?"

싱글벙글 신나다가 진짜 깜짝 놀랐다.

"뭐, 뭐여. 그게 언제적 일인데 지금 누나 귀에 들어가?"

못해도 한 달은 더 된 이야기다. 내가 마을에 내려간 게 그즈음이니까.

"길드 가 보니까 소문이 쫙 퍼졌더라. 왜 싸운 거야?"

3년은 긴 시간이었다. 마을과 도시의 경계에 있던 오그웬이 변방의 오그웬이라는 명칭의 도시로 지도에 새겨지며 모험가 길드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났다. 규모가 큰 건 아니었지만, 마왕군의 태동과 더불어 주변에 생긴 이변과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한 왕국의 조치였다.

본직이 모험가였던 아실리에가 재등록을 하고 가끔 생계에 보태기 위해 간단한 의뢰를 받기 시작한 지는 반년 정도 지난 거 같다.

"신념을 위해 싸웠지."

"헛소리 하지 말고."

"아니, 헛소리라니? 진짜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습용 장검이나 고칠 겸 대장간에 갔다가 뜬금없이 그거 뺏겠다고 덤빈 양아치 놈들을 손 봐줬을 뿐이다. 갑자기 마을이 커져서 그런지 그런 녀석들이 좀 늘어난 탓에 내 신념을 굽히지 않고 혼내줬을 뿐이다.

절대 엘드미아를 건드리지 말라는 신념 말이다.

"누나의 명예도 생각해서 뒷짐지고 왼손으로만 혼내줬다고."

처음에야 도적들 죽이고 빼앗은 장비를 파느라 조심했을 뿐이지, 그 뒤로 마을에 방문할 때 아실리에는 굳이 엘프임을 숨기지 않았다. 엘프와 인간 아이라는 조합은 흔하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는 마을의 유명 가십거리 중 하나였다. 모험가 길드에서 활동까지 하는 와중에 그 가족이 개망나니라는 모함을 쓸 수는 없잖은가?

"내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그런 꼬맹이들 두들겨 패고 다닐까. 뭐 솔직히 뒷짐지고 싸운 건 훈련의 일환이라는 느낌으로 하긴 했는데 그걸 위해 자발적으로 시비를 걸고 다니진 않아."

"꼬맹이라니 걔들 너보다 4살은 나이가 많은 애들인데..."

"먼저 태어난 게 대수인가. 하는 짓이 꼬맹이인데."

심드렁하니 대답하자 아실리에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딱히 그거로 화를 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애당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충동적으로 싸운 것도 아닌데 혼날 이유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어찌 들었어?"

"누가 수소문해가면서 그때 걔들 팬 게 누구냐고 찾고 있다던데."

"엥?"

뭐야? 이세계에도 내로남불 학부모가 존재하는 건가? 이상하네.

하나같이 애미애비 없어보였는데.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