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남긴 건 별 이유가 없어. 여길 떠나 봤자 다른 데에서도 똑같을 테니 그냥 기회를 주려는 거뿐이야."
어차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오그웬을 떠나 봤자 다른 도시의 부랑자 혹은 양아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한창 일거리가 넘쳐 호황을 겪고 있는 오그웬이 환경적으로는 낫다고 볼 수 있다.
지난 3년간 단순히 집에 짱박혀서 훈련과 공부만 한 게 아니다.
작정하고 쉬는 시간마저 쪼개가며 소모한 3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성장에 방해가 될 정도의 단련을 피하다 보면 이거 하고 저거해도 조금은 남는 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공부를 싫어하거나 집중을 못 하거나 이해를 못하면 그마저도 없어지지만, 정신연령 서른이상이 잡은 방향성과 아직 여물지 않은 머리가 만난 이상 그럴 일도 없었다.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닌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학습은 수월하기 그지없었다.
필연적으로 남는 시간을 쪼개 도시를 파악하며 지냈다. 경비병들 뿐만 아니라 몇몇 상인들도 내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조금만 찾으면 굳이 배우지 못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널리고 널렸다. 그저 외지인을 그다지 신용하지 못해 쉬쉬할 뿐이지.
"최소 일당으로 동화 4개짜리 일들을 찾으려면 너희 머릿수만큼 못 찾을 것도 없다. 동화 4개면 그래도 사람 살만한 숙소에서 잘 수 있고 하루 두 끼 식사도 가능하지. 가끔 부수입이 생기면 목욕탕에서 깔끔하게 씻을 수도 있고, 익숙해지면 일을 늘려가며 돈을 더 벌 수도 있을 거다. 그러다 보면 신용이 쌓이고, 일당도 오르며 여유가 생기겠지."
남은 녀석들이 평균 연령 14세라 할지라도, 삶의 대부분을 마을에서 집안일이나 도우며 사는 게 고작인 애들이다. 의무교육 같은 것도 없다 보니 일용직이나 경제활동에 대한 개념조차 어중간한 경우가 태반이고, 그래서 기껏 뛰쳐나와 한다는 게 미래도 없는 부랑아와 양아치 짓이 돼 버린다. 가뜩이나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고 싶은 나이일 텐데 오죽할까.
"강요는 안 해. 원치 않으면 너희는 그냥 엘드미아 에가 라는 이름 하나만 기억하고 저기로 도망치면 되는 거야. 물론 내 눈에 다시 띄면 다리 부러지는 거고. 하지만 남는다면 너희한테 직접 돈은 안 줘도 돈 떼어 먹히지 않는 일자리는 주마. 결정해라."
오그웬이 양아치들에게만 기회의 땅인 건 아니다. 외부 인원의 유입이 많아지고 빠르게 발전하니 어릴 때 성실하게만 일하면 금방 도시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뛰쳐나가 봤자 그들이 얻는 미래라고는 여자들은 잘해봐야 매춘부, 남자애들은 양아치 정도다.
그 이상의 영웅적인 서사시를 쓸 놈들이었으면 이미 쓰고 있지 날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서 있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 갈 곳 잃은 애들이라서 그런가 그래도 생각이 좀 있는 거 같네.
"따라와."
죽은 대장의 품을 뒤지자 동화 20개가 나왔다. 순간 구겨진 연습용 장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인상이 구겨졌지만, 남은 녀석들의 제보로 숨겨진 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의자로 쓰이던 상자를 까보니 작은 주머니에 은화 4개와 동화 40개가 들어 있었고, 난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아실리에의 모욕에 대한 위자료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부수입치고는 나쁘지 않다.
은화 4개는 내가 가지고 나머지는 이 녀석들에게 쓸 요량이었다. 그렇게 시체와 창고를 뒤로한 채 골목을 기어 나온 우리는 시장의 의류점을 찾아갔다.
일반 가정 집에서 입다가 더 이상 안 입게 되는 옷을 수선해서 파는 지극히 싼 맛에 가는 중고 의류점이었다.
"텍스 아저씨! 오랜만!"
한창 물가를 파악하기 위해 잡일을 이것저것 했을 때, 가정집에서 싸게 파는 옷을 배달하며 주인아저씨와는 친숙한 사이였다.
"어? 엘드미아 아니냐. 넌 무슨 볼 때마다 커지는 거 같다?"
"한창 클 나이니까. 딴 게 아니라 얘네가 지금 입고 있는 넝마주이보다 멀쩡한 옷 좀 사려는데. 맞는 게 있으려나?"
뒤에 줄줄이 따라온 꼬질이들을 가리키자 텍스 아저씨가 안 그래도 두툼한 턱을 삼중으로 만들면서 미간에 팔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있기는 한데...부랑아들 아니냐? 뭐에 쓰려고?"
"맞아 부랑아. 하도 꼴 같지 않아서 일이나 시켜 주려고."
"하여간 별종이야 너도. 여자애들은 치마? 원피스?"
"발에 땀 나게 뛰어야 하니 바지로."
"허헛. 그래. 기다려 봐라."
이미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텍스답게 바로 견적이 나오는지 가판대와 상자 안을 뒤적뒤적 거리더니 순식간에 다섯 쌍의 옷가지들을 꺼내보였다. 가정집에서 손수 만든 물건들도 있는데 저렇게 맞춰서 찾아내는 것도 정말 재주였다.
한 명이 입을 상하의와 신발 값만 동화 6개.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괜찮은 옷을 골라준 탓에 품질로 흥정할 껀덕지를 잃어버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저씨 아저씨."
"아 왜 이놈아. 너도 일 해 봐서 알잖아. 동화 6개는 싼 거야."
"에이, 내가 그걸 아니까 이러지. 좀 들어봐. 어차피 얘네 한동안은 내가 봐주면서 잡일 받게 할 거거든?"
"그런데?"
"근데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서 쟤들 옷 사 입히고 씻기고 내일부터 일 시키기 위해 알리샤 아줌마네 여관에서 재우고 하면 식대도 간당간당하단 말이죠."
"알리샤네? 하긴 그 값으로는 제일이긴 하지. 근데 그게 내가 자선 사업 할 이유는 아닌데?"
"알죠 알아. 근데 애들이 할 만한 일이 뭐 있겠어. 다 고만고만하잖아요? 아무리 조심해도 옷은 금방 지저분해지는데 당장은 이 한 벌로 버텨야 한단 말이지. 물론 지금 쟤들이 입고 있는 것도 돌려 입긴 하겠지만 아무리 빨아도 저걸 입고 어떻게 일을 보내겠어? 당연히 안 되지. 근데 얘네 평균 나이가 열넷이야. 아직 몇 년은 더 쑥쑥 커."
"프흐흐. 그래서, 그때마다 애들은 결국, 내 고객이 되게 되어 있으니 이번만 좀 싸게 해 달라?"
가판대에 턱을 괴며 웃어 보이는 텍스를 향해 나는 양팔을 펼치며 거창하게 연기 하듯이 말했다. 이 아저씨가 저렇게 웃는 이상 깎아주기는 한다.
"바로 그거지! 미래를 위한 투자! 상인의 덕목! 어차피 애들 옷은 잘 나가지도 않잖아. 게다가 제가 누굽니까. 엘드미아 에가 아닙니까? 많이도 안 바라. 동화 한 닢씩만 깎아주면 아저씨가 마을에 늘어나는 부랑아들을 가엾게 여겨서 제대로 일을 찾을 수 있게끔 자리잡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애 키우는 아줌마들한테 소문 깔끔하게 내줄게. 뭔지 바로 감이 오죠?"
단순히 애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중간에 죽든 도시를 떠나든,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간에 결국 애들이 사라지면 투자고 나발이고 의미가 없어지니까. 하지만 동화 5개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뿌릴 수 있다는 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텍스의 의류점은 마을 사람들이 싸게 파는 옷으로 시작되니까.
심지어 부랑아였던 아이들이 정말 성실하게 일하고 자리를 잡게 되면 한동안은 처음에 베푼 친절과 싼 맛으로 인해 여기에서 옷을 살 수밖에 없으니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못 해도 손해는 안보는 장사다.
"하여간 어린놈이 기똥차다니까. 용역 업소라도 차리려고 그러냐? 언제까지 봐주려고?"
"맨날 말했잖아요. 난 16살 되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니까. 앞으로 5년 정도는 봐줄 수 있는데, 솔직히 1년 봐주면 제 앞길 알아서 가야 하지 않겠어?"
"뭐? 너 아직 11살이었냐?"
"듬직하고 똑똑하지만 아직 11살이지. 보증기간 장난 아니죠?"
"진짜 난 놈이다. 동화 23개만 줘라."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이래서 아저씨가 좋다니까. 봤냐? 텍스 아저씨가 너희를 위해 땅 파도 나오지 않는 동화를 2개나 더 깎아주셨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예 예의가 없는 것들은 아니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섯 명이 거의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모습은 퍽 볼 만했다.
"원, 세상에. 그놈의 전쟁이 뭔지 진짜."
내가 건넨 동화를 받으면서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애들을 바라본 텍스가 혀를 찼다. 그도 애가 셋이나 딸린 아버지였으며 내가 보기에도 매우 매우 부성애가 넘치는 남자였다.
비록 진짜 전쟁의 피해를 입은 애는 쟤들 중에서도 한 명뿐이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저씨 같은 분이 있으니 쟤들 살릴 견적이 나오지. 그런 거보면 아직은 살만한 세상 아니겠어?"
"넌 진짜 말하는 거만 놓고 보면 내 아들 놈 보다 낫다. 너 그냥...아니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헛소리 하려고 했다. 신경 꺼라."
아마 그냥 마을에서 살아라, 혹은 농담삼아 내 아들 해라 같은 이야기하고자 했으리라. 하지만 유일한 생존자 엘드미아 에가의 집안사정은 마을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다. 농담삼아 꺼낼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 호의가 고마워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게 챙긴 옷가지를 들고서 목욕탕에 빠뜨린 뒤 밖으로 나오자 벌써 오후 4시였다. 어차피 그 더러운 놈들이 제대로 씻으려면 한 시간은 씻어야 할 테니 그대로 목적지인 여관으로 가 주인인 알리샤에게 아양을 부렸다.
"누나! 나 왔어!"
"누가 누나야 이 예의 없는 새끼야!"
짐짓 쾌활하게 문을 열며 1층에 들어서자, 주방과 홀이 일체형으로 된 곳에서 혼자 요리 중이었던 알리샤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나이 50을 넘긴 욕쟁이 아줌마는 들고 있던 식칼을 흔들며 대노하는 듯했다.
"아실리에도 누나인데 알리샤 누나 정도면 누나지. 안 그래?"
"아주 지랄났다. 어린 새끼가 벌써 여자 후리기 딱 좋은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세상 말세다 말세야. 왜 왔어!"
"방 있어?"
"지랄 말고 집에나 가. 아실리에가 매를 안 들어서 저러나. 벌써 외박질이야."
그렇다. 그녀는 어디에 내놔도 한결같은 욕쟁이 아줌마였다. 그러나 아무리 언성이 높아지고 육두문자가 담겨 있어도 그 근간에는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그 배려는 건물부터 음식까지 빠짐이 없어서, 마을에 있는 동화 2개짜리 여관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시설과 식사를 제공한다.
"아니. 나 말고 부랑아 다섯 명. 내일부터 일 시키려고 지금 씻기는 중."
"...어휴 지랄. 마침 오늘 나간 사람있어서 딱 남으니까 데려오든가 말든가. 식사는?"
"여기서 사 먹여야지. 아, 난 집에 가서 먹을 거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더 바쁘게 하고 지랄이야!"
그러면서도 손은 추가로 재료 손질을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여관비만 미리 넘긴 뒤 다 씻은 녀석들을 데려갔을 땐 이미 상차림까지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동화 1개짜리 스튜라고는 할 수 없는 든든한 건더기에 눈이 돌아가 침을 질질 흘리며 앉아있는 애들을 두고 난 엄격하게 선언했다.
"앞으로 너희가 묵게 될 여관의 주인이자 주방장이신 알리샤 여사님이시다. 너희에게 대가리라는 게 있다면 여사님의 드높은 언성과 욕설 사이에 넘쳐흐르는 자애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테니 항상 감사하며 지내라."
"지랄말고 빨리 처먹여! 음식 식어!"
따끈따끈한 스튜에는 같이 넣고 끓였다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게 분명한 고기가 조금씩, 그러나 다섯 그릇에 균일하게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