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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0화 (10/412)

"내일 새벽 6시까지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어. 문을 세 번 두드렸는데 안 튀어나오거나 준비가 안 된 상태로 튀어나오면 영원히 잠들게 해준다."

간만에 배 부르게 먹은 건지 그저 알리샤의 스튜 맛이 좋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애들을 각자의 방에 박아넣고서야 나는 말을 묶어둔 얀스의 대장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얀스는 정작 키우지도 않으면서 말은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헤벌쭉 웃으며 여물이나 쥐어 주다가 내가 오니까 짐짓 화나는 척을 하며 인상을 썼다.

"이놈아. 우리 집이 마구간이냐? 온종일 어딜 쏘다녔다가 이제 와!"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과의 의미로 이거는 그냥 드릴 테니 연습용 장검 괜찮은 거 좀 보여주세요. 새로 사가게."

"뭐야 이게. 어디 마차 바퀴 사이에 넣고 제꼈냐? 왜 이래 이거?"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될 물건은 팔지 않았는데..."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번쩍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당황한 얀스는 그러면서도 내 신장에 맞는 물건을 하나 꺼내주었다. 하지만 그건 연습용으로 만든 쇠붙이검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롱소드였다.

"엥? 이건 날만 뭉개놨지 그냥 롱소드인데?"

적잖게 당황하는 내 모습에 얀스는 씩 웃으며 말했다.

"네 덩치면 슬슬 이런 거에 익숙해지는 게 낫다. 근육도 어느 정도 모양이 잡혔으니까. 익숙해져서 아실리에씨한테 허락받는 날에 그대로 갈고 손만 조금 봐줄게."

"아니 그래도 가격이...?"

"싸게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동화 20개만 줘. 나중에 검 갈 때 추가로 5개만 주면 된다."

"그냥 지금 25개 다 계산하시죠."

두 말 하기 전에 바로 은화를 넘겼다. 내가 보는 눈이 아직 부족하더라도 이 정도 롱소드를 사려면 두 배는 든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다. 뜬금없이 사람 충동구매하게 만드네.

"하여간 보는 눈도 좋고 계산도 빨라. 아실리에씨가 참 잘 가르쳤어."

"그걸 또 다 배운 게 제 잘난 점 아니겠습니까."

물론 딱히 잘나서 다 배운 건 아니지만.

그 뒤로는 그저 언제나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래도 저녁 이전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걸로 만족했다.

"다녀왔어 누나."

숲길을 따라 오두막에 이르자 염소 젖을 짜던 아실리에가 나를 반겨 줬다.

"생각보다는 오래 걸렸네. 잘 정리했어?"

"이제 귀찮을 일은 없는데, 아직 정리 중."

말을 묶고 여물을 주는 동안 우유통을 들어 집에 들어가던 아실리에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하아.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정말 이상하지만. 누구 죽이진 않았고?"

"다리 부러진 애들은 다섯 명 정도? 그리고 한 명. 녀석들 대장. 걘 죽였어."

"...왜?"

"누나로 협박하더라고. 그래서 죽였어."

"안 죽일 수는 없었고?"

"어중간하게 살려서 파벌 싸움 나고 나중에 귀찮게 굴 여지를 남기는 것보단 대장인 놈 하나 죽여서 아예 기선제압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 그런 의미에서...응. 안 죽일 수 없었어."

어설프게 1인자가 반 병신이 되었을 때 2인자가 들고 일어나고, 더 큰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1인자를 병신으로 만든 녀석을 본보기 삼으려는 꼴이 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예 원인 제공자였던 1인자가 작살난 경우라면, 그 원인만 조심하자는 전제를 기반으로 2인자가 실권을 잡고 무난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괜한 욕심을 내 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전자의 경우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한참 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죽이고 시작했다. 그 효과가 너무 잘 먹혔을 뿐더러 2인자 따윈 남아버리지 않았다는 게 예상 밖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하고 집에 들어가려고 하자, 역시 아실리에는 영 싱숭생숭한 듯했다.

"나도 살아오면서 사람은 많이 죽였지. 모험가라는 게 그런 거니까. 가끔은 몬스터보다 사람하고 싸우는 때가 더 많기도 했어. 그렇다 하더라도 원래는 어린아이가, 그것도 이제 겨우 11살 된 아이가 사람을 필요에 의해 죽이는 걸 봤다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을 거야."

우유통을 내려놓으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는 아실리에의 얼굴에서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설령 날 빌미로 협박을 했더라도, 그 녀석을 내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네가 못 죽이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은 하는데...잘 모르겠어. 지난 3년간 널 봐와서 그렇겠지? 네가 사람을 죽였다는 게 그냥 내 모험가 동료가 도적을 죽였다고 이야기는 하는 정도로밖에 안 들려."

"그래서 별문제가 없다고 믿고 싶으면서도 내가 어린 것도 사실이니, 내가 커서 단순히 살인에 미친놈이 될까 봐 걱정된다는 말하고 싶은 거야?"

어쩐지 그런 뉘앙스라서 물어보니 잠깐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며 아실리에는 긍정했다.

"너는...진짜 매번 신기하다. 맞아. 솔직히 그래."

"내가 걱정 말라고 해봤자 의미가 없으니...만약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누나한테 말할게. 그리고 같이 대화해보자."

"대화?"

"그래. 난 이러이러해서 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좀 이래저래 손봐줘야 할 거 같다 등등 그런 걸 다 말할 테니 누나가 듣고 판단해 줘. 내가 그저 폭력과 살인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는 건지.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건지."

분명 아실리에의 감각은 예리했다. 내 행동과 사고는 결국 넘치는 불합리함에 독기가 오른 서른 살 아저씨의 것이니 동료 모험가를 예시로 든 건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내 외형은 결국 아이였고, 어린 나를 가르치며 길러준 보호자의 처지에서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등한시해서 생명의 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취향따위는 없었다.

"누나가 내 판단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난 그냥 누나 말을 따를 게. 합당하다고 여기더라도 누나가 탐탁지 않으면 최대한 살인을 안 하는 방향으로 정리할게."

그러면 최소한 내 정신 상태에 대해 불안해 할 일은 적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실리에는 포옹으로 대답해주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미안해졌다.

솔직히 그냥 8년간 스승과 제자 정도의 삶을 살 거나 어색한 관계를 유지할 거라고만 예상했다. 나도, 아실리에도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 우리 동생 착하고 똑똑하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

"나도 고마워."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 짓고 저녁 식사하기 위해 움직였다.

갓 짜낸 우유를 넣어 만든 고기 스튜는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그런데 아직 정리 중이라는 건 무슨 소리야?"

"아, 대장 죽이고 조직원마냥 있던 애들 대부분이 누나 생각대로 가출 청소년들이라서 다 돌려보내긴 했는데, 다섯 명은 정말 갈 곳 없는 애들이더라. 그중 한 명은 진짜 고아였고."

"가출 청...? 아무튼 그래서?"

"걔네한테 일 소개 시켜 주고 먹고 살 수 있게 시작만 좀 도와주려고. 오늘은 일단 알리샤 아줌마 여관에 방 잡는 거까지만 하고 왔어. 그래도 정착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예전보다는 자주 도시에..."

"세상에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스튜의 풍미를 음미하다 말고 의자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벌떡 일어나 끌어안는 바람에 하마터면 아까운 스튜를 흘릴 뻔했다. 하지만 그런 내 당혹감은 아랑곳하지도 않으며 아실리에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래! 우리 동생이 수 틀렸다고 사람 죽이는 게 일상인 살인마일 리 없지! 기특한 짓을 얼마나 잘하는데!"

"아니,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내 돈으로 한 것도 아니야. 대장 죽이고 턴 돈으로 하는 거거든? 아 맞다 여기 남은 돈. 은화 3개랑 동화 조금."

"잘했어 잘했어! 그럼 그렇지 노예제도 보기를 좆같이 여기는 우리 동생 심성이 어디 갈 리 없지!"

"아니 갑자기 입맛 떨어지게 그 이야기는 왜 나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아실리에의 걱정이 조금 덜어진 건 사실인 듯했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튿날 새벽 같이 일어난 나는 아침을 거르고 오그웬으로 향했다.

어차피 일거리를 알선해 줘봤자 7시도 안 될 게 뻔하니 그때 돌아와서 아실리에와 함께 식사해도 늦지 않았다.

비록 마을에서 대놓고 사람을 죽이려 드는 정신 나간 놈이 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고 고민에 빠지긴 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겨우 죽어도 싼 놈 하나 죽인 거로 방황하기엔 인생에 몰아친 파도가 너무 많다.

아직 6시도 채 안 되었지만 오그웬에는 이미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관이나 음식점뿐만 아니라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식재료점까지 분주하게 가게를 열 준비 중이다.

모두 모험가 길드가 자리 잡은 뒤에 생긴 변화였다.

겨우 1년 사이 안 그래도 많은 것들이 바뀌는 와중에 더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어갔다.

"밀레나 누나! 바빠?"

그런 인파들 사이에서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여인을 향해 팔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밀레나가 운영하는 식재료점은 꽤 많은 음식점에 재료를 납품하고 있었고, 항상 바쁘다.

"아니 엘드미아 아니냐. 네가 이 시간에는 웬일이니? 한동안 뜸하더니 다시 일하려고?"

"나 말고 다른 애 소개해주려고 그러지."

"다른 아이?"

"응. 어제 부랑아 애들 주웠는데 꼴 뵈기 싫어서 일이나 좀 시켜 주려고."

"얘. 식재료 만지는 집인데 부랑아는..."

"나 엘드미아 에가야 누나. 이미 어제 깔끔하게 씻기고 텍스 아저씨네 가게에서 그럴싸하게 옷도 사 입혔어. 보면 부랑아인 줄 전혀 모를걸."

"하여간 영리해. 근데 갑자기 왠 부랑아? 뭐 이번엔 교회에서 일이라도 받았니?"

대체 이 어른들의 머릿속에서 나란 녀석은 얼마나 만능 일꾼인 걸까. 교회에서 일을 받다니. 어지간한 모험가도 힘든 일이다.

"그냥. 나랑 비슷한 애들이야. 나도 아실리에 누나 없었으면 그랬을 걸 생각하니 눈이 가더라고."

"어쩜...착하기도 하지. 그래, 안 그래도 요즘 공사장 인부들 쪽에도 노점상이 좀 생기면서 물건 대기 시작해서 바쁘긴 하다. 몇 명이니?"

"남자애 셋에 여자애 둘. 남자애들은 14살 이상이라서 가르치다 보면 금방 쓸 만해질 걸? 일당에 첫날 동화 3개. 만족스러우면 다음부터는 동화 4개씩. 어때?"

"일만 잘하면야 동화 5개도 줄 수 있지. 하지만 힘 쓰는 일이니 남자애들이 낫겠다. 둘 까지는 볼 수 있을 거 같아."

"금방 올게요~"

살갑게 웃으며 밀레나와 헤어진 뒤에도 보이는 족족 익숙한 상인들에게 입을 털었다. 사실 여건만 맞으면 그들에게도 좋은 이야기였다. 정말 특출나게 일을 잘하면 얼마든지 도제로 쓸 수도 있고, 평범하더라도 가르치기 쉽다. 집이 없다 보니 생활비를 위해서라도 항상 열심히 일하는 건 덤이다.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부랑아에게 일을 알려주고 직업을 갖게 해 주는 인격자'라는 평판 작업까지 가능하니 고문관을 고용하는 게 아닌 이상 손해는 없다.

비록 당장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주변에서 쓸 만하다 소리가 들리면 생각해 보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지금은 새벽 시간대부터 점심 무렵까지만 빡세게 움직이는 가게들을 중점으로 시킬거니까. 익숙해지면 오후에 다른 일하면서 돈을 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인사를 건네며 도착했을 때, 여관 앞에서 다섯 아이들이 준비를 마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좀 기특했다. 딱히 피곤해 보이지 않는 거보면 잠은 잘 잤나보다.

"일찍 일어나면 할 일도 많아진다. 온종일 일하는 곳은 일당이 높고, 반나절만 일해도 나머지 반나절을 다른 일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알려줄 건 그런 것들이야."

여관에 말을 맡긴 채 함께 거리를 걸어가며 대충 설명하던 중.

"...왜..."

여자애 하나가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고아인 13살짜리 여자애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짧게 치고 주근깨가 조금 있는, 눈매가 날카롭지만 꽤 예쁘장하면서도 당차보이는 애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동네에서 미녀라고 떠받들어지며 남자애들이 달라붙는 나날을 유쾌하게 즐기며 자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하긴, 재수 없게 영주에게 걸려서 애먼 일을 당했을지도 모를 외모라고 할 수도 있겠다.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말이 짧다? 내가 어제 11살 이라고 밝혔다고 기어 오르니?"

"...거에요?"

움찔 거리며 말을 바꾸는 안색에는 묘하게 불안감이 없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 하나가 차여 죽는 걸 목격하고, 심지어 그 꼴을 야기한 장본인한테 말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겁나 용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호기로움이 썩 마음에 들었기에 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나는 8살 때 이 모든 사단이 나는 시발점이 된 마왕군의 첫 습격으로 마을이 불타고 친구와 지인들이 죽었으며 부모님조차 떠나보낸 기념비적인 전쟁고아야. 따지고보면 네 선배지."

소녀뿐만 아니라 나머지 애들도 표정이 싹 다 굳어 버린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좆 같은 상황인지 이해할 줄은 알아서 다행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만큼 업무에 하자가 있는 건 손에 꼽으니까.

"니네 대장이 뒷조사했던 엘프가 내 은인이고. 그 사람 없었으면 나도 너희 꼴 나거나 죽거나 양자택일이었어. 그녀가 내 기회였다."

반응을 확인했으니 걸음을 옮긴다. 이젠 다 지난 이야기였기에 대수로울 것도 없다. 3년은 짧지 않으니까.

"너흰 아실리에...그러니까 내 은인인 엘프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러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못 얻었을 뿐이지. 그래서 그냥 기회를 주는 거뿐이야."

도와준다고 하기엔 미묘하다. 난 성인군자도 아니고, 착한 일에 열성적인 사람도 아니다.

"그것도 내 수중에 여유가 있으니 던져 주는 기회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는 걸 일단 그냥 줘 보는 거다. 도와준다는 건 너희의 느낌이겠지만 나에겐 굳이 그 정도는 아닌...그런 수준."

그냥 눈에 보인 이상.

"당연히 너희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나한테 더 친근하고 소중하다. 일 좆 같이 하거나 안 되겠다 싶으면 죄다 내던지고 꺼지게 할 거야. 그러니까 이게 정녕 도움이 될지 말지는 아직 모른다는 거지."

여기까지는 해야 미련 없이 속이 후련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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