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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1화 (11/412)

제국 신성회에서 용사가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졌다.

사악한 마왕이 쓰러지고 드디어 평화가 돌아올 거라고, 이미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을 모으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드디어 빛이 돌아온다고.

하지만 대체 언제?

용사는 내 또래라고 했다. 이제 막 12살을 넘긴 꼬마가 마왕을 물리치면 그야말로 신화적인 업적이겠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천재들을 모은 이유는 용사를 가르치기 위함이리라. 그렇다면 그가 전장에 나가는 건 언제지?

5년 후? 10년 후? 그 기약 없는 기간을 감내하면서까지 용사에게 집중해야 한다면, 그동안 마왕군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동안 죽어 나가는 나 같은 사람들은? 이미 죽어 버린 우리 부모님과 불쌍한 내 형제자매들은? 착하기 그지없던 사용인들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죄밖에 없던 영지민들의 넋은 언제 기리는데?

갑자기 치솟은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분노는 현실 앞에서 빠르게 식어갔다.

알고 있었다. 신이 계시는지는 몰라도, 자신과 죽은 이들에게 한동안 구원은 없으리라.

이렇게 자라다가, 대장이 내킬 때 정조를 잃게 되겠지. 그전에 대장이 죽으면...뭐 그래도 비슷하겠지.

"반갑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살아갈 뿐인 나날이 조각났다.

보기 드문 검은 머리를 짧게 친 모습은 종종 보이던 용병이나 모험가 전사들을 닮아 있었다. 검을 짊어진 등은 넓어 보였고, 키에 비해 덩치도 커 보였다. 재단이라도 한 것마냥 딱 맞는 옷은 화려하지 않음에도 그의 인상을 한결 더 정갈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얇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조금 키가 작은 어른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드러난 얼굴은 첫 인상과 달리 앳되기 그지없었다. 11살? 12살? 키와 덩치만 보고 대장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릴 거라 예상했는데 얼굴만 놓고 보면 죽은 둘째 동생에 가까웠다. 분명한 건, 절대로 어른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다. 그렇게 보니 평범한 남자아이가 아니라 이질적인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래도 눈매만큼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별생각 없이 그렇게 찬찬히 뜯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소년이 달려들 때까지도 제대로 인식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잘 가라 씨발아."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나직이 읊조릴 뿐이었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뒤로 날아가 쓰러진 대장이,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움직임 끝에 펼쳐진 발차기 한 방에 죽어버렸음을 직감하면서도 드는 생각은 뜻밖에 입이 험하다는 것뿐.

그냥 올 게 왔을 뿐이다. 더 강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쓰러뜨렸을 뿐이다. 우리 영지를 마왕군이 짓밟은 것처럼.

그저...대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평범하게 강했던 대장에서, 영지에 있던 수습 기사 정도로 강한 대장으로 바뀐거다. 오러를 쓰는 거 같으니, 뭐 대충 그 정도겠지.

"성실하게 살 기회를 얻을래 아니면 반 병신으로 기어 나갈래?"

그런 줄 알았는데.

"맞아 부랑아. 하도 꼴 같지 않아서 일이나 시켜 주려고."

전혀 다른 무언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봤냐? 텍스 아저씨가 너희를 위해 땅 파도 나오지 않는 동화를 2개나 더 깎아주셨다."

"앞으로 너희가 묵게 될 여관의 주인이자 주방장이신 알리샤 여사님이시다. 너희에게 대가리라는 게 있다면 여사님의 드높은 언성과 욕설 사이에 넘쳐흐르는 자애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테니 항상 감사하며 지내라."

"일찍 일어나면 할 일도 많아진다. 온종일 일하는 곳은 일당이 높고, 반나절만 일해도 나머지 반나절을 다른 일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알려줄 건 그런 것들이야."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자신들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으며, 고향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것을 베푼다.

그것이 호의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그렇기에 참을 수 없었다. 의문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8살 때 이 모든 사단이 나는 시발점이 된 마왕군의 첫 습격으로 마을이 불타고 친구와 지인들이 죽었으며 부모님조차 떠나보낸 기념비적인 전쟁고아야. 따지고 보면 네 선배지."

마왕군이 작은 마을을 습격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분명 나도 들은 바 있었다. 3년 전의 사건은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던 부모님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들었다.

"너흰 아실리에...그러니까 내 은인인 엘프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러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못 얻었을 뿐이지. 그래서 그냥 기회를 주는 거뿐이야."

눈물이 차오를 뻔했다.

소년은 소년이지만 소년이 아니었다. 그가 소년일 리 없었다. 어른들도 말해 주지 않고, 베풀지 않았으며, 이해해 주지 않은 것을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 말해 주고, 베풀어 주고, 이해해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귀족도 아닌, 그저 작은 산골 마을의 소년에 불과하면서?

"당연히 너희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나한테 더 친근하고 소중하다. 일 좆같이 하거나 안 되겠다 싶으면 죄다 내던지고 꺼지게 할 거야. 그러니까 이게 정녕 도움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는 거지."

소년은 빛이었다.

절망 끝에 모든 걸 포기할 때 내리 쬔, 진짜 빛이었다.

얼마나 절망해왔던가.

귀족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내다버리고 그저 살기 위해 평민인 척 신분을 속였을 때. 이를 악물고 버텨 낸 끝내 받아 낸 일당을 강탈당했을 때. 하는 일마다 방해하며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저항도 못했을 때. 억지로 자신을 범하려는 부랑자의 머리를 돌로 내리쳐 죽였을 때. 자랑이었던 긴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잘라 내고 숨어들었을 때. 결국 대장이라는 작자에게 붙잡혀 인형처럼 옆에 붙어 다니는 꼴이 되었을 때.

그 모든 순간 수도 없이 많이 절망했다. 겨우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울며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제발 도와달라고 속으로 절규했다.

그랬었는데.

모든 걸 포기하려던 그때, 구원은 정말 갑자기 다가왔다.

소년의 이름은 엘드미아 에가였다.

5년 후면 모험가가 되어 마을을 떠나겠다고 항상 떠드며, 조금도 아이 같지 않은 언행과 일 처리로 오그웬에서는 아는 이가 모르는 이보다 월등히 많은 유명인이었다.

용사조차 하지 못했던, 무너진 희망을 다시 세워준...절대 놓칠 수 없는 빛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 속에서 14살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를 맞이해버린 것이다!

큭큭큭...참을 수 없는 충동이 꿈틀거리는군.

"3대 500 딱 기다려라. 진짜 머지 않았다."

그 사이 키는 175를 넘겼다. 1년에 5센티가량 커버린 것이다. 진짜 이대로 가면 180이 아니라 190도 꿈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마법과 오러를 쓰는 기인들이 있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기본이 되는 체력과 체급은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키만 큰 멀대가 되는 게 아닌 이상 1센티씩 늘어날 때마다 싸움에서 유리해진다.

그리고 나는 키만 큰 멀대가 아니었다. 마력을 통해 고의적으로 근육에 부하를 주며, 매일 매일 이어온 운동들의 효과는 굉장했다.

전생에서 운동을 게을리 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먹고 살기 빡빡해서였지만, 동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해 성과가 미미한 것도 한 몫 했었다. 하지만 마력을 응용한 단련이라는 건 일주일이 멀다하고 체감이 확실했기에 중독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의 방황과 게으름과 놀고 싶은 충동 같은 방해 요소들은 나에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시간은 완벽히 내 편이었다.

비록 아직도 마왕군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6년 전 그날 이후로 최소한 오그웬 인근만큼은 조용했다.

"...엘디? 너 뭐 이상한 거 막 주워 먹고 다니는 건 아니지?"

"엥? 갑자기?"

"아니, 무슨 나무마냥 키가 자라는 건 그렇다쳐도..."

아실리에와의 관계는 애칭으로 불러줄 정도로 더욱 돈독해졌다.

농사를 짓거나 정착을 하는 것도 아닌 만큼 내가 크면 클수록 아실리에와 분담할 수 있는 일은 늘어갔고, 그렇게 일을 분담할수록 두 사람의 여가 시간도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여유를 만끽하며 내가 혼자 운동하는 걸 구경하는 게 취미가 되어버린 아실리에가 미묘한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야만전사마냥 근육도 막 늘어나?"

"아니 야만전사라니? 이렇게 세련되고 문명화된 지성을 소유하고 있으면 문명전사죠."

"진짜 말은 아주 그냥..."

말하는 바를 이해 못하진 않았다. 내 몸만 놓고보면 이게 사춘기에 방황하는 14세 아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을 수준이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전사와 비교해도 몸만큼은 꿀리지 않을 것이다.

"대체 그런 운동들은 어디서 찾아 배운 거야? 나도 살면서 처음 보는 게 대부분이던데."

"엘드미아-"

"-찬-스. 그래. 그래."

이젠 척하면 척이다. 유쾌해져서 싱글벙글 웃으며 끌어안으려 다가갔더니 아실리에가 펄쩍 뛰었다.

"얘! 얘! 땀 났어! 씻고 해 씻고!"

장난기가 동해서 그대로 달려들었더니 꺄악꺄악 웃으면서도 열심히 피해다닌다. 나도 아실리에도 6년 전의 일들로 인해 생겼던 마음의 그늘은 많이 희석되었다.

안 그래도 슬슬 도시로 가볼 때가 되었기에 깔끔하게 씻고 닦아내자 아실리에는 웃으며 포옹해줬다. 이제는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이젠 정령술도 능숙해졌네?"

"다 누나 덕이지."

처음 만났던 날 아실리에가 보여줬던 묘기와도 같았던 정령술을 이제는 나도 쓸 수 있었다.

최근까지 어떻게 해도 안 되던 게 갑자기 되기 시작하더니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아실리에의 말로는 워낙 인간종 자체가 정령 친화력이 낮은 편이라고 하더라. 그나마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실리에랑 같이 살고 잠들다 보니 정령들도 나라는 놈이 익숙해진 게 분명했다. 이것만큼은 내 노력과 별개로 정말 오롯이 아실리에의 덕인 것이다.

"글쎄? 그렇지만도 않은걸?"

"엥?"

"응. 엘프랑 결혼하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던 인간들도 종종 있었지만, 딱히 그들한테 없던 정령 친화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례는 없었어."

"그냥 정령술을 쓸 생각이 없었던 거 뿐 아닐까?"

"흐응. 듣고 보니 그럴지도."

품에 안긴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는 아실리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그녀에게서 나는 엘프 특유의 향과 피부의 감촉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한다! 긴급 회피! 긴급 회피!

"그건! 그렇다! 치고! 나 마을 다녀올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 올려 빙글빙글 두세 바퀴 돈 다음 내려놓으면서 나는 태연한 척 셔츠를 챙겨입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나의 투철한 이성과 달리 사춘기의 해면체는 뇌의 지배를 일절 따르려 하지 않는다. 덕분에 최근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다. 상대방은 은인이자 126년간 살아온 엘프라고 아무리 훈육에 들어가도 들은 척도 안 한다.

그 틈을 노리고 나쁜 엘드미아와 더 나쁜 엘드미아가 나타나 동시에 귓가에 속삭였다.

-오히려 좋아.

헤으응. 따,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씨발 그게 아니라! 범죄야 범죄! 아실리에를 범죄자로 만들 생각이냐!

-쳇.

망할 새끼들이 혀를 차며 사라졌다. 대체 착한 엘드미아는 어디에 있는걸까. 저 마귀새끼들의 사탕발림에서 날 구원해줬으면 좋겠는데.

확실히 아침은 하반신과의 전투가 가장 힘든 시간대였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이것저것 챙겨서 말에 올라타자,  녀석의 미간을 쓰다듬어 주던 아실리에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엘디. 들었어? 마을에서 귀족이 발견되었대."

"그거 표현이 좀 이상하지 않아? 뭐 사생아였다던가 그런 게 뒤늦게 밝혀졌다는 건가?"

무슨 던전이나 숨겨진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식의 뉘앙스다.

"아니 말 그대로 귀족. 나도 소문으로 주워들은 거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가문의 마지막 직계이자 유일한 생존자라던가?"

"그냥 이야기꾼들의 입담 같은 거 아니야? 딱 그치들이 좋아할 주제구만."

"후후. 그러게."

정말 이야기로나 나올 법한 주제다.

며칠 더 지나면 사실 그 가문이 그냥 귀족도 아니고 이름 높은 마법사 가문이었네 뭐네 천재라 불렸었는데 파벌과 사악한 이간질을 피해 성년이 되는 그날까지 숨어있었네, 궐기해서 가문을 바로 세울 거라네 등등 하며 온갖 이야기가 추가될 게 분명하다.

컨텐츠가 적어서 그런가, 이 세계 사람들은 너무 극적인 걸 좋아해서 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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