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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12화 (12/412)

3년간 오그웬에 생긴 가장 극적인 변화라고 하면, 단연코 성벽이었다.

목책이 사라지고, 돌담이 생기는가 했는데 점점 견고하게 높아지더니 관문이 만들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티스엘 왕국이 오그웬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비록 6년 전 습격 이후 오그웬 인근에는 단 한 번의 공격도 없었다 한들 안일하게 방치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오그웬은 점점 요새 도시로써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정지. 신원을 확인하겠다."

"와 진짜 너무하네. 나 볼 때마다 이렇게 세워야 해 형?"

"끌끌끌. 이거 협조 태도가 불량하구만. 형님이 임마 동생 얼굴이나 볼 겸 세운다는데, 어?"

웃으면서 타고 있는 말을 쓰다듬어 주는 성문 경비병 알렉을 향해 굳이 통행패를 꺼내 보여주진 않았다. 어차피 장난이었으니까. 하지만 말을 쓰다듬으면서도 정말 나를 멈춰 세운 알렉은 괜히 헛기침하며 운을 뗐다.

"흠. 야, 귀찮으면 형 여자 좀 소개해줘."

"어처구니가 없네. 마을에서 20년은 살아온 형이 산골짜기 소년 엘드미아한테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아, 왜 그 있잖아. 알리샤 아줌마네 묵고 있는..."

"한둘이야 그게?"

전쟁은 계속되었고, 3년 전과 달리 도시에는 가출 청소년보다 고아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정책을 펼치고 있는 건지 몰라도 오그웬에는 상당히 많은 난민들이 유입되었고, 나도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겨우 혼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오고 가는 애들한테 기회를 줬지만 남은 애들은 스무 명 남짓이다.

이제 알리샤 아줌마의 여관은 말이 여관이지 그런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원래 수용인원 7명이었던 여관은 25인까지 받는 게 가능하도록 증축되었고, 마을의 유일한 종교시설이자 빛의 신 에테를 섬기는 성광십자회와 협업해서 절찬리 빈민구제 중이다. 그리고 우리의 욕쟁이 여사님은 자기 인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훨씬 열정적이고 즐거워 보였다. 매번 느끼지만 정말 성녀가 따로 없다. 이런 게 성녀지 별 게 성녀겠는가?

아무튼, 이 인간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결국 그 스무 명 사이에 섞여 있는 여섯 명의 여자아이 중 한 명에게 콩깍지가 씌였다는 것이 분명했다.

"아씨. 그 갈색 머리 아가씨! 조금 통통하고!"

"아. 레미리?"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아서 잘해봐야지 그건. 왜 나한테 부탁하나? 간다."

"아이 씨 진짜. 야! 야!! 아 진짜 좀!"

댕기머리 소녀 레미리는 뛰어난 일머리와 서글서글한 인상 덕분에 안 그래도 주변 상가에서 인기가 많다. 그녀는 이제 규모가 좀 커진 텍스의 의류점에서 간판 소녀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이 일했으니, 오고 가면서 텍스 밀러 가문의 장남인 알렉 밀러의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만들었으리라.

근데 씨발 내가 왜 남의 연애를 도와줘? 레미리가 왜 더 좋은 일거리를 두고 텍스의 의류점에서 일하는지 눈치도 못 채는 놈한테 굳이 떠 먹여 줄 생각은 없다.

아침부터 꼴 받게 하고 있어. 싯팔.

"형님!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넌 또 왜 내가 니 형님이에요. 제발 부끄럽게 좀 하지 말아 주세요. 나보다 4살이나 많으면 좀 체통을 지키라구요."

말에서 내린다면 나랑 키가 비슷할 장신의 청년이 밀레나의 식료품점 앞에서 물건을 나르다 말고 말을 걸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진이라고 소개한 구릿빛 피부에 적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이 녀석은 1년 전 즈음에 오그웬에 들어온 놈이었다. 듣기로는 왕국 사람이 아니라 바다 건너에 있는 라단이라는 이국의 사람이라고 한다.

도대체 그 젊은 나이에 항구도시도 아닌, 내지 끝자락에 있는 오그웬까지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어서 기가 막혔던 것은 둘째 치더라도, 지극히 성실하게 일감을 찾아다녔으나 당시에는 표정도 좀 썩어 있고 피폐했던 탓에 위압감을 느낀 상인들이 피하는 등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남자 엘드미아 에가의 눈에 밟혀 열성적으로 일을 찾아주다 보니 저 지랄이 났다.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어른스럽고 심지어 보금자리까지 마련해주셨는데! 형님이죠!"

"돌겠네 진짜."

문제는 존나 눈에 띈다. 안 그래도 힘이 넘쳐서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벌이도 남달라서 먹는 것도 잘 챙겨 먹는데, 목청도 커서 여러모로 눈에 띈다. 단순히 마을 사람들만 다닌다면 몰라도 이제 오그웬엔 마을 사람 반, 이방인 반의 유동 인구를 자랑한다. 이른 아침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나도 체격이 비슷하니 남들이 보기에 괴상해 보이진 않겠지만...단순히 부끄럽다.

결국 설득보다 설명이 빠르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애들 제대로 일하는지 확인할 겸 길드에 가보려고."

"음? 모험가 길드 말이십니까? 거긴 왜요?"

"아니 왜긴. 내가 몇 번을 말해. 나는 2년만 지나면 모험가가 돼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거라니까?"

"예?! 그거 농담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걸 왜 농담으로 들어?"

오히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반문하자 더더욱 어이가 없다는 듯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형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하루살이 인생을? 기사가 아니고?"

하루살이 인생.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험과 낭만만 있는 직종은 아니니까.

진의 과거가 어떤지는 몰라도 이 녀석은 대번 내가 적잖이 단련했다는 것을 알아봤고, 처음 보자마자 수습 기사냐고 물어봐서 날 당황케 했으니까. 아마 녀석은 내가 기사가 되기 위해 단련하고 있다고 믿었나 보다. 그래도 눈치가 있는지 아까와는 달리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나 우리 마을 박살 낸 마왕군 지휘관 목 따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기사를 노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느 세월에 기사되고 어느 세월 어느 전장에서 놈을 만나겠어."

마왕군과의 전쟁은 6년째에 이르렀지만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은 지지부진했다.

당연히 응당 널리 알려 사기를 높일만한 사건이 터졌으면 포고문이라도 돌렸을 텐데, 기념비적인 오그웬 변방의 마을 습격자를 참수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용사를 발견했다는 게 마지막 희소식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원수는 결국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발상부터가 남다른 게 형님답습니다. 지휘관이라면 응당 군대를 이끌고 있으니 아무나 할 수 없는 발상입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그 군대를 이끄는 놈을 군대에 들어가서 잡는다는 발상보단 암살자 짓해서 잡는다는 발상이 훨씬 현명하지 않냐?"

"그렇게 느꼈기에 형님답다는 겁니다."

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건지 몰라도 이 녀석은 내가 내뱉는 이런 말들을 귓등으로 듣질 않는다. 진짜 시도하고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반응이라서 괜히 불편한 녀석이다.

"아무튼, 나 간다. 일 잘하고."

"예! 점심까지 계시게 되면 식사나 같이 하시죠!"

"그래. 봐서."

적당히 손을 흔들며 다시 말에 올라 얀스의 대장간으로 향한다. 도제들이 대장간 화로의 불을 지피는 동안 느긋하게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던 얀스의 빛나는 머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실리에의 허락을 받은 내가 왔다!"

"벌써? 아실리에씨가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거 아니야?"

오늘의 방문 중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아실리에와의 몇 번의 겨루기 끝에, 그녀는 드디어 내가 진검을 지니는 것을 허락했다.

'어차피 검을 막 쓰지 않기도 하고...없다고 사람 못 죽일 애도 아니고.'

비록 실력의 인증이라기보단 인성의 검증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나의 성실함이 빛났을 뿐이지."

등에 메고 있던 롱 소드를 검집째로 넘겼다.

"이제 등에 차고 다닐 이유가 없다! 나에게! 벨트를!"

"허. 겉멋만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생각하고 있었구만?"

"뭐야. 아저씨 날 수 년간 그런 눈으로 보고 지냈던 거야?"

"끌끌끌. 솔직히 그랬지. 그래도 역시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녀석이라 마음이 놓이는구나. 한 시간 정도 걸릴 테니 놀다가 와라."

얀스는 파이프 담배를 툭툭 털고는 그대로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느긋하게 알리샤의 여관까지 도착하자 아침부터 분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성광십자회의 제복을 입은 사제들부터  온갖 부랑아 꼬마에 이제는 부랑아 티를 완전히 벗어낸 애들까지 이게 정말 아침 일찍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정기적으로 성광십자회의 물자를 받는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 보는 건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는데 비단 그것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하수구 청소 인원은 이쪽으로 모여. 사제님들께서 나눠 주시는 빵 받고!"

"성벽 보수 인력으로 차출된 남자애들 도시락 준비됐어!"

"배달부들은 여관으로 들어와.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안에서 쉬고 있어!"

최근에는 아침 일찍 올 일도 없었거니와 적당히 생각나면 오는 정도였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알리샤의 여관은 부랑아들을 위한 인력사무소가 되어 버렸다.

아니 진짜? 이게 가능한 능력자가 애들 사이에 감춰져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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