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그게 레비의 본명이었다.
분명 라그니스가 이름. 리엔이 가문명 레비엥이 영지 혹은 지역이라는 형태였을 것이다. 왕국 귀족들은 그렇게 이름을 짓는다고 배웠다.
'다' 라던가 '츠신' 이라던가 뭐 이것저것 붙는데, 결국 그건 고대어로 '~의' 같은 의미 정도라고 아실리에가 알려 줬었다. 그중에서도 츠신이라는 건 귀족 중에서도 유서 깊은 상위 귀족에게만 허용된 것이며, 그들은 굳이 영지명 같은 걸 붙이지 않는다. 가문만으로도 위대하다, 라던가? 그런 귀족들은 보통 수도에 몰려 있다고 했다.
레비엥은 지역이 아니라 영지명이었다. 이곳 오그웬이 있는 왕국 남부 서빌 지방 안에 함께 위치했고, 마왕군에게 우리 마을처럼 싹 날아갔다. 그건 처음 만났을 때 대충 들었었지만...
정작 본인이 그 영지를 관리하던 영주의 자식이었을 줄이야.
"네가 도와줘서 여유가 생기고, 조금씩 모은 돈으로 스승님께 편지를 보냈어."
그녀는 어릴 적부터 마법에 두각을 드러냈다. 이를 눈여겨 본 그녀의 아버지이자 레비엥의 영주는 연줄을 통해 스승이 되어 줄 만한 마법사를 수소문했고, 운 좋게 꽤 유명한 마법사와 인연이 닿았다고 한다. 돌발적인 방랑벽으로 이곳저곳 떠돌며 제자를 모집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후진육성에 매우 열성적이면서도 가르치는 족족 제자들을 대성시키는 그야말로 왕국의 유명 일타 강사였다.
옛날에 우리 마을에 들렸던 마법사도 그렇고 의외로 마법사들은 제자를 기르는 데 열성적인 듯 싶다.
"귀족 간의 파벌 싸움이 있으니까. 실제로 우리 영지를 두고 어떻게 다룰 것인지 한창 과열된 상태에서 내 편지를 받으셨나 봐."
그녀의 스승은 곧바로 그녀가 확실히 살아 있다는 소식을 왕국 귀족들의 원로회에 알리려고 했다. 마치 집안 문제에 학교 선생님이 끌려가는 듯한 기분을 받았지만, 마법사라는 직종의 사제 관계는 그런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고 한다. 단순히 가르침을 받는 것 정도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지만 사제의 연을 맺는 건 결코 가볍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살아 있는 동안 마도魔道를 공부하며 나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스승의 과업을 이어받아 더욱더 앞의 길을 닦아내는 것이 최초의 마법사 간의 사제 관계였다고 한다. 긴 역사 동안 변화가 없진 않았으나, 그러한 기틀 위에 이어지다 보니 사제 관계는 마나로 이어진 가족과도 같다. 사제로 맺어진 이상 왕국 법에서도 타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니 말 다 했지.
엄연히 자식이 있는데도 자기 제자들에게 모든 재산과 권리를 양도하는 경우까지 있으며, 실제 거기에 대해 자식들이 아무런 법적 대응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감히 내 상식만으로 함부로 판단할 만한 사항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아무튼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녀의 가문과 연이 닿는 다른 귀족들에게 있었다.
대충 국왕파벌과 귀족파벌로 나뉘어 기 싸움이 치열했던 가운데, 라비엥 가문의 남은 재산과 권리를 흡수하고 명목까지 갖추려는 개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실종되었기에 찾아야한다고 여기고 있던 국왕파와 이미 죽었을 게 확실하니 방치된 재산과 권리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이라는 걸 주장하려는 귀족파 소속의 머나먼 친척 귀족들 간의 싸움 탓에 그녀의 스승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국왕파이셨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녀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먼저 그녀의 신변을 확보한 곳에서 발언권을 비롯한 모든 것을 신변보호라는 이름 아래 멋대로 휘두르는 게 가능해진다. 그런 와중에 그 개싸움의 현장에서 생존을 확실히 해버리면 귀족파가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닐 것이 명백했고, 몇 통의 편지를 통해 귀족파의 손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레비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스승은 성인이 되는 날 공개적으로 오그웬에서 접선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꼬리를 잡혔다. 이미 국왕파는 스승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라 굳이 수소문을 할 이유가 없었는데, 누군가 그녀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연락 수단이라고는 편지 뿐이었기 때문에 일정을 조정할 수도 없었고, 예정된 '공개적인 접선'이라는 건 그냥 혼자 덜렁 와서 만나는 게 아니라 국왕파 사람들이 차출한 병력과 함께 마법사가 직접 데리러 오는, 대외적인 시선을 노리는 일종의 보여주기였던 탓에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상당히 거창한 각본이네."
마족에게 부모를 잃고 귀족파의 핍박에서 도망쳐 국왕파와 가문의 영광을 위해 3년을 도피한 비운의 영애의 영웅적인 귀환. 이를 과시하기 위한 마법사와 병사들. 지방 귀족이라 하더라도 마왕군에게 아예 전멸을 해 버리면 이 정도까지 할 가치가 생기는 걸까?
나도 아실리에를 못 만났다면 비슷한 프로파간다를 위해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각본이라니...이해가 너무 빠르잖아. 너도 혹시 귀족이었어?"
"아니. 정신연령 30세를 초과한 엘드미아는 세상 만물에 통달했거든."
"또 그렇게 둘러댄다."
불만스럽게 말하면서도 레비 아니, 라그니스는 작게 웃어 보였다. 그게 괜히 안쓰러워서, 머리를 한번 헤집어주자 하지 말라며 투정 부린다.
"그래서 머리를 쓴다고 한 게 이거였던 거야. 귀족이라면 지금 내 꼴을 보고 절대 리엔 가문의 영애라고는 생각 못 할걸?"
"사람을 시켜서 찾는 거면 그렇겠지만...국왕파가 그렇게 움직일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귀족파 역시 안일한 방법으로 널 찾고 있진 않겠지. 못해도 네 얼굴을 아는 사람이 따라온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어?"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이목구비가 크게 바뀐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단번에 오그웬으로 찾아왔다는 건, 명백히 그녀의 발자취를 잡아냈다는 의미다. 혹은 편지의 내용을 중간에 알아낼 수 있는 첩자가 있다던가.
"아버지는 귀족파 친척들과는 교류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셨어.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얼마 없을 거야."
"없진 않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럴 때는 당연히 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올 거라고 가정을 하고 움직이는 게 맞다."
최악을 상정해야 대비가 가능한 거지, 어중간한 희망 사항으로 움직이면 항상 최악에 직면하는 법이다.
"사실 그럴 땐 간단하게 숨길 수 있는 건 대놓고 내버려 두는 게 맞아. 세상에 빨간 머리가 너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원래 빨간 머리였는데 염색했다 같은 상황이면 의심부터 하고 본다. 귀족들은 어떨지 몰라도 평민들은 염색을 치장하는 용도로 여기지 않아."
"어?! 진짜?"
"내가 너한테 공갈을 쳐서 뭣 하리? 그럴 시간에 다음 수를 생각하는 게 낫지."
"그렇기는 한데, 그보다...도와주려고?"
뭔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의중을 묻는 그 꼴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팔자로 일그러뜨렸다.
"그럼 도와주지 방치하랴? 너 혹시 벌써 까먹었냐?"
"어?어?"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
그건 비단 나만을 가만히 냅두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와 연관된 모든 사람에게 개짓거리를 하지 말라는 의미지.
"정당하게 찾아오면 공문이라도 있어야 하고 대외적으로 꿀리지 않는 활동이 있어야 한다. 국왕파와 네 스승님의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만약 그 치들마저도 네가 성인이 되기 전에 데려가려 했다면 난 너한테 차라리 도망치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성인이 된 후를 말했다. 그녀에게 얼마만큼의 재산이 남아 있고 권리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렇게 몰래 찾아다니고 있는 귀족파와는 정반대의 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건 뒤가 구리다는 뜻이고, 뒤가 구리다는 건 장애물이 있을 경우 범법적인 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건 얼마든지 폭력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지."
마을 사람들 입에서 소문이 오가는데 아무런 법적인 통보가 없다? 용병이나 모험가들이 소문을 물어보는 수준의 활동으로 찾아다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 소문마저도 쉬쉬한다는 건 그런 소문을 내는 것조차 불안할 정도로 대상들의 분위기가 정겹진 않았다는 뜻이다.
폭력적으로 납치하도록 시킨 다음 접선할 때 고용한 이들을 죄다 죽이고 자신들이 구출했다고 한 뒤, 모든 과정을 반대로 국왕파에 뒤집어씌워버리는 시도도 가능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먼저 손에 넣기만 하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오그웬에서 알리샤의 여관에 묵고 있고, 내가 찾아서 직접 자리까지 잡아 준 꼬맹이한테 그딴 식으로 위협적인 접근을 하는데 내가 그걸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하니?"
멀뚱히 날 바라보는 라그니스의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어뜨려 줬지만 이번엔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귀족이라면 그냥 나처럼 가족과 이웃들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날아간 거다. 그 영지는 가문의 것이고, 그녀가 가문을 잇든 결혼해서 시집을 가든 그녀의 뒷배가 되어 주며 이어져야 했다.
그 모든 걸 잃고도 결국 딛고 일어서서 계급마저 무시한 채 평민들 사이에서 일하고 웃으며 여기까지 힘 쓴 꼬맹이다. 어디에 내놔도 당당한 내 이웃이다. 국왕파를 따라 이곳을 떠나 그대로 세월이 흐른다면 모를까, 아직은 아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엘드미아 에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해."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좆대로 굴면 좆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씨발 누구든 작은 엘드미아를 건드리면 좆 되는 거에요.
아주 좆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