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라그니스에게는 여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알리샤에게 대충 양해를 구한 나는 한동안 여관에서 묵기로 했다.
뒷골목 양아치 놈들하고 트러블이 일어난 거 같아서 좀 두고 보려고 그런다고 하니 식칼을 들며 쌍욕을 터트린 여사님은 흔쾌히 방 하나를 내줬다.
당연히 아실리에한테 보고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집까지 말을 달렸다. 정말 얼마 만에 전력 질주를 시킨 것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어째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어."
관자놀이를 누르는 아실리에의 얼굴이 수심으로 가득 차오르려고 한다.
"걱정 마. 안 죽어. 죽이지도 않을 거고. 이런 문제는 죽이면 괜히 트집 잡힐 수 있으니까."
"넌 정말 대체 어떻게 그런 걸...아니야. 맞아. 잘 판단하고 있네. 그러니 이번엔 정말 조심하는 것만 신경쓰렴."
깊은 한숨과 함께 두 팔을 벌려오는 아실리에를 포옹해주자 약간 뜸을 들인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족들의 파벌싸움에 엮인 이상 절대 가볍게 보면 안 돼. 그들은 노리기로 한 이상 기사에게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데려 가려고 할거야. 네 신념이 지금의 너를 지탱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동의하는 거야."
"알지."
"솔직히 당장 달려가서 이 잡듯이 뒤지면서 찾아내거나 같이 가서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동생이 그걸 바라지 않겠지?"
"응. 맞아."
지금이야 내 보모 역할이나 하고 있지만 그녀는 결국 모험가였고, 동시에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온 엘프였다. 내가 그동안 배운 건 말 그대로 삶의 전반을 아우르는 보편적 지식과 생존 기술에 치중되어 있다. 전투와 관련된 건 그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가깝다.
그녀의 특기분야인 마법은 나에게 취약한 분야였고, 정령술은 사람과의 전투에서 살상용으로 쓸 수 없었으며, 검술은 그녀가 그리 많이 알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던 전생의 지식과 기본 같은 것을 짜깁기하여 쓸 때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고 알려주고 엘프들이 쓰는 검술을 조금씩 알려줄 뿐이었다.
마력을 태워 신체를 강화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부족하기 그지 없었고, 당연히 나는 그녀보다 한참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찾아오던 그녀가 옆에 있는 것 자체로도 억제력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녀의 얼굴이 관계자로 팔리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마당에 한 왕국의 귀족들을 적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행위를 직접 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은인을 사지로 몰아넣는 취미는 가지지 않았으니까.
"레비의 생일은 보름 뒤니까 녀석들이 승부를 보려면 그 안에 움직일 거야. 금방 끝내고 올게."
"보름...사실 그만큼의 여유는 없을거야. 성인이 안된 레비를 끼고 보호자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발표하는 게 목적일 거 아니야? 오그웬에서 수송용 비룡이 있는 라헤리아까지 말을 달려서 아무리 빠른 비룡을 타고 날아간다 하더라도 수도에 도착하려면 3일은 걸려. 물론 예정된 포인트마다 말과 비룡을 바꿔타면 하루 만에 갈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했을지는 모르겠네."
"엇."
듣고 보니 그랬다. 하마터면 이동시간을 간과하고 크게 데일 뻔했네.
"다른 준비를 다 마치고 있다 하더라도 그쪽 입장에서는 일주일 안에 일을 정리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해."
"누나 말이 맞네. 덕분에 우리가 좀 더 유리한 입장에 놓이겠는데."
"후후. 맞아. 조바심을 내는 쪽이 실수를 하게 되어있으니까."
하마터면 중요한 걸 놓치고 일을 진행할 뻔했다. 포옹을 마친 아실리에는 새삼스레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하아...참 신기하지. 예전에 모험 다닐 땐 혼자서 한 달도 돌아다니고 그랬는데...보름이 참 길게 느껴진다."
"빠르면 일주일이니까. 힘내서 빨리 올게."
"그게 마음대로 되겠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인 아실리에는 별말 없이 배웅해줬다.
그렇게 다시 말을 타고 돌아와 얀스에게 맡겨 놓은 검을 되찾고 벨트까지 함께 구입해 찬 뒤 여관으로 돌아오자, 북적거리던 여관 앞은 깔끔하게 정리가 된 뒤였다.
"어쭈? 아예 칼까지 들고왔어?"
성광십자회 사제들에게 빌려줬던 탁자를 정리하던 알리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바라본다. 새벽부터 서서 계속 요리하느라 쉬고 싶을 법도 한데 말이지.
"검은 언제나 들고 다녔잖아."
"어딜 속이려들어. 너 맨날 등에 매던 거 연습용 검이지? 허리에 찬 꼬라지 보니까 날을 갈던가 했네. 가는 날이 장날이었구만 아주."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예리한 추론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벙쪄하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표정 아주 지랄났다. 남편이 칼잡이었어. 칼잡이답게 뒈졌지만."
"상상도 못 했네 진짜. 사실 누나도 모험가였던 거 아니야?"
"맞아. 이 새끼야."
"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알리샤 여사의 상상도 못 한 과거사다! 최근 6년간 이렇게 충격 먹은 적이 없었는데!
"지랄 말고. 아침은 먹었냐?"
"아니 아직."
"와서 처먹어. 만들고 남은 거로 애들이랑 같이 먹으려니까."
언제나 자애가 넘치는 알리샤 여사님의 손짓을 따라 안에 들어서자, 아까 요리한다 배분해준다 하며 바쁘게 움직였던 열 댓명의 아이들이 전부 옹기종기 둘러앉아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어? 오늘은 형님도 같이 드시는 거예요?"
"한동안 여기서 묵는다더라. 레비야. 나중에 밥 먹고 네가 빈 방 하나 알려 줘라. 난 사제님들께 스튜라도 좀 드리고 오마."
"네. 이모."
애들 사이에서는 이모님으로 통하는 건가. 새로운 사실의 연속이군. 아침부터 정말 놀랄 일이 끊이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자리에 앉으니 고맙게도 애들이 이것저것 챙겨 줬다.
"형님 이거 드시죠."
"오빠 이것도 드세요."
"이것도."
근데 너무 많이 주려고 한다!
"이것들아. 내가 알아서 먹어. 내가 애냐?"
꼴에 지들 의식주 해결해줬다고 챙겨 주는 걸 보니 그래도 애들이 여유가 생겼다는 게 실감이 된다. 그래 봤자 내가 한 거라고는 동화 몇 푼으로 자리만 잡아 준 건데 호의가 너무 과하다.
"그보다 형. 왜 여기서 묵어요? 아실리에 누나한테 혼났어요?"
"형은 뒤지게 맞는 한이 있더라도 누나한테 혼날 짓은 절대 안해요."
"그럼 왜 여기서 묵어요?"
"레비가 자기 건드린 뒷골목 양아치를 개패듯이 패놨거든. 보복할지 모르니까 두고 보려고."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는 레비나 보려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날뛰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비웃는 레비의 반응이 이상하다. 심지어 머리 좀 큰 놈들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사내 새끼들이 갸웃거리기는?
"그럴 리가 없는데? 새로운 놈들이라도 온 거예요?"
근데 그 반응이 좀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양아치가 얻어맞고 이를 갈고 있다는데 왜 저런 말이 나와?
"무슨 소리야? 새로운 놈들?"
"아니, 뒷골목 애들은 여관 사람들 안 건드리는데?"
"엥?"
내가 요즘 마을에 너무 무관심했나? 어째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스튜 찍은 빵을 씹어먹으며 녀석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줬다.
"형이 휘젓고 다녀서 걔들 이 주변에는 얼씬도 안 해요. 오히려 피해다니지."
아뿔싸! 내 표정을 본 꼬마애들이 웃으며 말한다.
"아! 형, 레비 누나 놀리려고 거짓말한 거였구나?"
"뭐야 거짓말이야? 엘드미아 오빠는 마법사 못 되겠네!"
종종 실시한 뒷골목 신념 주입 교실의 효과가 굉장했나보다. 예상 못했던 대답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깔깔거리며 웃는 꼬마 애들을 쓰다듬으며 레비가 말했다.
"그러게. 엘드미아 오빠는 거짓말쟁이라서 마법사는 못 되겠네."
큭...! 레비는...웃고 있다...!
◈
든든하게 식사를 얻어먹은 만큼 뒷정리와 설거지를 도운 뒤 나는 레비를 데리고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나가자는 내 말에 곧이곧대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라그니스가 물었다.
"아까는 여관에서 움직이지 말라며?"
"그거야 내가 없을 때 이야기고. 넌 이제 나랑 남은 기간 동안 같은 길을 주기적으로 왕복해야 해."
"가, 같이? 오, 왜?"
"그래야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를 하든, 무리수를 두든 할 거거든."
사람을 찾는데 보름이라는 건 긴 시간이 아니다. 아예 왕국 단위의 영역을 두고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당연히 미친 소리겠지만 오그웬 안에서 원래 마을 주민도 아닌 부랑아였던, 혹은 부랑아인 사람을 찾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당장에 나만 하더라도 몇 가지 특징만 부합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다.
"보는 눈이 많은 곳. 경비병들이 대놓고 활보하는 곳. 모험가들이 많은 곳.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납치 혹은 협박의 틈이 없다는 걸 과시하는 거야. 바뀐 네 모습을 눈치 못 채도 상관없고, 눈치채더라도 상관없지."
애당초 알리샤의 여관 코앞에 있는 게 성광십자회의 신전이다. 거기 사제들이 착하고 순박해 보일지언정 불의 앞에서는 눈 돌아가는 성전사가 된다. 미행을 한 뒤 납치? 발견과 동시에 맨손으로 머리통을 터트릴걸. 조금만 크게 소란이 일어나도 뭔 일인가 싶어 나올 사람들을 두고 그런 대범한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널 찾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아직 널 못 찾았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이미 찾아 놓고 적당한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그 전에 내가 알아버렸을 가능성도 있지. 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글쎄?"
"밖을 쏘다녀야지. 최대한 많은 인파 사이에서."
언제든지 목청껏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에 오래 있어야 한다.
어깨를 끌어안으며 반대 팔로는 마치 저 넓은 도시를 보라는 듯 손바닥을 펼치고 허공을 훑자, 손 안에서 라그니스의 어깨가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 동네에서 너랑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데 쌩 까는 건 모험가 정도밖에 없을걸."
"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라그니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도 3년을 성실히 살아온 애다. 심지어 일을 가리지 않고 받으며 항상 열심히 일하는 애. 오그웬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관대한 풍조가 있다. 그게 외지인이든, 다른 종족이든 말이다.
"뭐 이번 기회에 이것저것 먹으며 돌아다녀 보자고. 나중에 경비처리 할 테니까 돌아가서 여유가 되면 그때 갚아."
"그, 그러네! 그럼 떠, 떨어지면 안 되니까 조, 좀 붙어다녀야겠네!"
"당연하지! 한동안은 연인 행세 좀 하자고."
"여, 여, 연인!"
똑똑한 애답게 척하면 척하고 말귀를 알아듣는다. 말이 잘 통한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기에 싱글벙글 웃으며 그대로 라그니스의 어깨를 껴 안은 채 거리를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