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가닐슨!!"
손맛은 확실했다. 코는 깨졌음이 확실하고 앞니도 몇 개 나갔을지 모르겠다.
바로 사태를 이해하고 관전 모드로 들어간 모험가들이 그 꼴을 보며 진심 행복하다는 듯이 빵 터진다. 몇몇은 처음 듣는 외국어로 놈들을 가리키며 배를 잡고 웃기까지 했다. 비록 내가 연출하긴 했어도 그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남의 싸움이 가장 재밌는 법이고 지들이 시도한 방법으로 되려 당하는 멍청이 결말을 노린 거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해맑게 웃는 건 좀...어딘가 감성이 어긋난 게 아닐까?
이세계의 뒤틀린 감성에 대한 고찰은 잠시 넣어 둔 채 일단 가닐슨이라 불린 놈이 눈물과 코피로 범벅된 채 뒹구는 걸 무시하며 주춤거리는 동료 녀석을 향해 이를 갈며 다가갔다.
"야. 야! 이 씨발 너 이리 와봐. 저 개놈이 내 어깨를 작살냈다니까 어딜 보고 있어 이 새끼야?! 그게 사람 어깨 작살 낸 새끼를 친구로 둔 놈이 취할 태도야?! 어?!"
길 가는 사람을 지목하며 시비 좀 걸어 보라고 시켰을 때, 그걸 돈 받고 하는 양아치에 버금가는 용병이나 모험가들이 얼마나 수준 높겠는가?
그런 놈들에게 그 일을 시킨 놈들이 알려 줘봤자 뭘 얼마나 알려 줬으며, 마을에서 제대로 활동조차 안 하는 나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신기할 정도로 수준 낮은 모험가나 용병. 정말 전투력 측정기로 쓰고 버리기 위한 버림패.
"어?"
"어는 씨발 반말이고 이 양아치 새끼야!!"
발에 마력을 실어 적당히 힘을 조절하며 정강이를 걷어차자 녀석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 그대로 나자빠지며 오열하기 시작한다.
"으어어억!"
"아주 생지랄해라 그냥. 그게 아프냐? 아파?"
당연히 겁나게 아플 거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엄살이다. 차는 거 자체는 그렇게 세게 안 찬 것처럼 보이니까.
이미 근육만으로 시전한 상남자의 펀치로 임팩트를 줬는데, 겨우 쪼인트 까는 거에 육체 강화를 썼으리라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실제 주변 모험가들은 박장대소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고,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당황하는 라그니스의 어깨를 다시 끌어안으며 움직였다. 골목이었으면 주머니까지 털어 버리는 거였지만 대로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다.
"별 병신들 때문에 기분만 잡쳤네."
"에, 엘드미아?"
머리를 긁다가 손을 내리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자, 상황을 눈치챈 라그니스도 별말 없이 날 따라온다. 그렇게 쓰러진 채 버둥거리는 두 놈들을 향한 수많은 비웃음을 뒤로하고 한참을 이동하고 나서야 라그니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들이 그럼...?"
"확실하진 않아도 거의 맞을 거 같아. 그냥 푼돈 주고 잠깐 고용한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뭐 하는 놈인지 확인해 보려는 의도였을 거 같은데...최대한 성질 더러운 깡패 새끼마냥 행동 했으니 그렇게 여겨 주길 바라야지."
"왜 그렇게 한 건데?"
"날 얕잡아봐야 상황이 편해져."
허리에 칼만 찼을 뿐,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움직임을 취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은 두 놈이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한 놈은 그렇다 쳐도 한 놈은 엄살로 오해 받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아실리에와 여러 번 실험한 끝에 알아낸 사실인데, 내 마력을 통한 육체 강화는 어지간히 강화를 거는 게 아니면 오러 감지가 가능한 이가 봐도 티가 안 난다.
오러 사용자가 오러를 감지하는 것마저도 오러 운용법에 기인하는 건데, 난 지금 운용법이고 뭐고 없는 상태에서 그냥 갑옷마냥 마력을 둘러버리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을 쓰는 탓에 탐지가 안 되는 듯 싶었다. 그걸 빡세게 강화 하더라도 마법으로 인한 버프를 받은 것과 비슷해 보일 뿐이라고 한다. 여러 면에서 효율이 떨어지니 운용법을 익히는 게 좋았지만, 그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아쉽지만 방치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움이 된다. 의도치 않은 약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것이다.
아실리에의 말대로 기사가 투입될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기에 취한 조치였다. 내가 지금 아무리 자신만만하더라도 기사라는 작자들을 코 풀며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육체 강화와 대등하거나 조금 모자른 수준의 기사만 오더라도 검술의 차이로 인해 죽어 나갈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방심이라도 시켜야 위험이 줄어든다.
"그래도 저 녀석들 덕에 몇 가지는 확신을 가져도 될 거 같네."
"어떤 거?"
"귀족파 녀석들이 네 위치를 생각보다 빨리 알아차렸다는 점이랑 너를 보호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
그러므로 저런 놈들을 실험용 쥐로 써먹은 거다. 갑자기 나타난 변수가 나흘간 붙어 있으니까.
"분명 어디선가 보고 있었을 거야. 지금 즈음이면 네가 살기 위해서 웬 동네 깡패 새끼랑 붙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이제야 나타난 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나쁘게 해석할 거 같지는 않네."
"...뭔가 다른 수를 쓰겠지?"
"당연하지. 근데 아직은 쟤들을 써먹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 한 놈 얼굴을 으깨놓고 한 놈은 대충 발로 차 놓았으니 그럴싸한 보복의 명분은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든? 너무 뻔하긴 하지만 계속 쟤들을 통해 간을 보려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여관이나 우리를 찾아서 다른 패거리와 함께 몰려올 거야. 당연히 좀 더 실력이 좋은 애들을 고용해서."
내 실력을 보던지, 아니면 내 뒤에 뭔가 알 수 없는 뒷배가 존재하는지 확인을 하던지. 일반적으로는 쉬이 이길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은 채 검토해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 나흘 이상은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데...쟤들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건가? 여관에 경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밤에 잠입해서 납치한다면 쫓기도 힘들 텐데.
뭔가 이렇다 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아 라그니스에게 말하고 함께 고민해 보며 이것저것 또 사 먹기 시작했다. 별일 아닌 듯한 자연스러움을 연출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는 연금술의 결실로 만들어져 팔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사이좋게 할짝이고 있을 때, 라그니스가 말했다.
"여기서 날 납치한다고 해도 라헤이라까지는 가야 비룡을 탈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어디에 내놔도 당당한 대도시에만 있는 게 비룡대여소니까. 가장 가까운 라헤이라말고는 이 주변에 다른 방법이 없다.
"혹시...거기까지 말을 타고 가는 게 아니라 아예 여기서부터 비룡을 타고 갈 생각인 거 아닐까?"
"어?"
"몰래 비룡을 싣고 와서 나를 비룡으로 납치하고...운송에 쓰인 마차를 위장용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방금 전까지 '라헤이라까지는 당연히 말을 타고 갈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걸 허점 삼아서."
이게 서민과 귀족의 차이인 걸까. 확실히 그런 발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룡이라는 게 대도시에만 있는 이유부터가 관리에 고급인력이 들어가고 그만큼 비싼 이동 수단이라서다. 이 시대에서 1~2인용 비행기와 같은 입지를 지니고 있는 녀석이다. 그걸 아예 운반해서 숨겨두고 있다가 타고 날아간다고? 확실히 돈 있는 자들의 발상이다. 진짜 그렇다면 도시 밖으로 놓침과 동시에 추적이 불가능해져 버리니 그쪽 처지에서는 시도할 만한 가치도 있다.
"진짜 부자면 할 만해 보여서 가능성 넘치는데? 네 말대로라고 가정하면 녀석들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이유는 아직 비룡이 오지 못했기 때문인가? 데리고 있다가 의심받는 것보단 딱 맞춰서 납치하는게 편하니까?"
"나도 라헤이라에서 오그웬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그게 가장 그럴싸하지 않을까 싶어. 혹은 저쪽도 뭔가 계획이 틀어져서 비룡 운송이 늦어지고 있다거나."
하긴 세상 나만 귀찮고 꼬이고 번거로워야 한다는 법은 없지. 쟤들도 사람인데. 앞으로는 돈이 넘쳐흐르는 놈들이 할 개짓거리마저도 상정할 수 있도록 머리를 더 열심히 굴려 봐야겠네.
근데 그러면...돈이 엄청 깨지는 거 아닌가?
진짜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라그니스에게 지금 엄청난 가치가 내포된건가? 내가 뭘 놓치고 있나? 어디까지나 전생의 세월이 플러스 되어 있는 것에 불과한 내 머리로는 쉽게 감이 안 잡힌다.
이미 영지가 초토화되었으니 한동안 재건은 무리일 것이다. 한 번 작살난 영지에 뭘 새로 쌓는 것보단 있는 거에 보강하기도 바쁜 시기니까. 굉장히 엄청난 자원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닌 이상 우리 마을이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하지만 라그니스는 분명 처음에 자기 상황을 설명할 때 아직 남아 있는 재산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재산과 권리를 흡수하고 명목까지 갖추기 위해 귀족파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당연시 여겼다고.
재산이야 은행같은 곳에 남은 돈이 있겠거니하고 생각했고, 권리는 전후 재건할 영토에 대한 내용인 줄 알았다. 명목이라는 것도 그냥 파벌싸움의 일환으로만 여겼는데...뭔가 안일하게 판단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라그니스."
"응?"
"처음 나한테 이야기할 때...귀족들이 네 가문의 재산과 권리와 명목을 노린다고 했었지?"
"응. 맞아."
"아무래도 평민인 내 눈높이로는 왜 두 파벌이 이렇게까지 널 두고 싸우는지 잘 이해가 안 되거든? 그냥 사람 부려서 데려가려고 하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비룡 운송까지 시도할만큼 엄청난 사안인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그녀의 생사가 그간 유지되었던 두 파벌의 저울에 큰 변동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금화 몇 개가 들어갈지 감도 안 오는, 비룡운송이라는 디메리트를 감수할 만하니까. 그러니까 이 사단일 것이다.
"혹시 구체적으로 감이 오는 게 있어?"
"흐응. 똑똑해도 역시 그런 부분은 관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뭔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이겼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라그니스가 설명했다.
"영지만이 가문의 재산인 게 아니니까. 은행의 돈부터 다양한 사업의 지분까지. 아직 아버님의 명의로 되어 있는 건 많아. 그게 재산. 솔직히 그거만 해도 비룡 정도는 우습게 여길 수 있어."
재산은 예상대로다.
"권리는 변경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의미할 거야. 귀족파 처지에서는 변경백의 권한으로 지닐 수 있는 사병뿐만 아니라 군사적 재량권에 욕심이 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 10명 20명의 사병만 허락받는 수도 귀족들에게는 충분히 눈이 돌아갈 수준이라고 생각해."
...잠깐. 변경백?
"명목은 처음에 엘드미아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랑 다르지 않아. '나라와 영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변경백의 유지를 이은 리엔가의 영애가 수 년 만에 귀환해서 그 뒤를 잇고 국왕께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한다.'가 되던가 '영민과 국왕을 위해 싸웠으나 왕의 무능함으로 인해 전멸을 면치 못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리엔가의 마지막 생존자가 귀족파의 보살핌과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되었다. 국왕은 충신의 마지막 혈육마저 찾으려 하지 않았다.'로 나뉘게 되는...그런 느낌이겠지."
다르지 않다고? 내가 예상했던 거랑 겁나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