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리에 욕을 듣고 뒷골이 땡겼던 이후로 간만에 뇌 정지가 왔다.
그냥 변경의 시골귀족인 줄 알았던 라그니스가 사실 엄청난 귀족이었다고?
"난 네가 시골귀족인 줄 알았는데."
"...난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대답에 적잖게 당황하며 라그니스가 말한다. 저러는 거 보니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유명한 귀족이고 유명한 사건이었나보다.
"나 지금 너무 놀래서 심장이 막 뛰어."
"풉. 뭐야 그게."
"아니 웃을 일이 아니거든? 만져 볼래?"
"그, 그, 그런 말하는 거 아니야!"
아니 내 여린 심장이 뒤지게 뛰고 있다는데 왜 자기가 정색하는거지. 아무튼 이거 난이도가 갑자기 대폭 상승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일말의 걱정도 필요 없다고 여겼던 요소들을 하나하나 끌어들여 검토하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를 조심스레 입에 올려다보았다.
"귀족파벌에 비룡기사가 있을까?"
"...으으음."
단번에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한 라그니스의 얼굴이 굳어지며 고민에 들어갔다.
비룡은 많이 타봐야 두 명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이상 탈 자리가 안 난다. 그렇다면 유사시를 대비해 전투가 가능하면서도 비룡 조종이 가능한 인물을 채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세간에서는 그런 인물을 비룡기사라고 부른다. 당연히 말 대신 비룡을 타고 다니는 기사이며, 랜스가 아니라 공중에서의 이점을 살리기 위한 마법과 오러에 특화 되어 있는 전쟁 병기와 다를 바 없는 직업군이다. 과거 아실리에가 말해줬던 것처럼 둘 모두를 완벽하게 성취하기엔 무리가 있기에 그 실력이 진짜 특출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사와 기사 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걔들이랑 싸우면 무조건 진다.
"...아니. 아니야. 옛날에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 비룡기사는 대부분 왕실 직속이라고. 그 상징성 때문에 그나마 귀족파에서 억지로 뽑아 대외적인 활동으로 쓰는 한두 명 외엔 전부 국왕파일 게 분명해. 이런 일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가벼이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부적으로 비밀리에 키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국왕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이상 비룡 조종술을 익힌 자는 어떤 전투술도 익힐 수 없어. 어기면 3대가 반역죄로 참살 당해."
"어? 진짜?"
"응. 진짜로."
꽤 살벌한 법이었지만 라그니스의 확신에 나는 큰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 우리에게는 엄청 도움되는 법이다.
"비룡기사가 상대라면 진짜 뭐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왔을 거다. 불행 중 다행이네."
"...도망치는 거 말고는 답이 없잖아?"
"걔들이 마왕군 지휘관보다 쎄지 않은 이상, 그럴 수는 없지."
애당초 나 혼자 도망치면 신념 위반이고, 같이 도망쳐도 잡힐 테니까. 나는 라그니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비룡까지 끌고 온 마당에 도망쳐봤자 잡히는 결말밖에 더 있겠어? 차라리 방심하길 빌면서 찔러보는 게 낫지. 아무튼, 그런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니 됐다."
"...헤헤."
"뭘 헤실거리고 있어. 최악을 면한 거 뿐이니까 방심하지는 마라."
정말 비룡을 끌고 왔다 하더라도, 대형 비룡이 아닌 이상 비룡을 조종하는 건 비전투 요원일 수밖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위험이 크게 줄어들었다. 당장은 그 사실에 안도하기로 하며 우리는 걸음을 이어나갔다.
◈
인원이 보충된 전투력 측정기들과 조우하게 된 것은 정확히 이틀 뒤였다.
"여어, 우리 친구들이 신세를 지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긴 녀석들은 모험가 길드 인근 지역에서 나타났다. 지난 번에 두 놈을 팼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역이었다.
처음엔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복수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연출의 냄새가 나서 납득하게 되었다. 모험가로 예상되는 놈들이 여덟 명. 생각보다 많고, 처음 두 녀석과는 느낌도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강하다는 느낌은 없다. 애당초 이런 일을 받는 이상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고 있진 않겠지. 채용 기준은 결국 동네 깡패보다는 쎈 정도였으리라.
"어 맞아. 앞으로는 친구 잘 간수해라. 그럼 이만!"
"으앗?!"
그대로 라그니스를 안아 든 채 옆의 골목길로 달려 들어갔다.
"저, 저! 저 씨발! 저 새끼 잡아!"
잡을 수 있겠냐. 그래도 집과 오그웬을 오고 가며 살아온 짬밥이 있는데. 당장 머릿속에 그려지는 루트로만 따라가도 중간부터는 라그니스를 안고 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 그저 안겨 있기만 하면 되는 라그니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까, 깜짝 놀랐잖아!"
"겨우 이 정도로 놀라십니까 변경백님. 지금은 내가 좀 안고 뛰어야 하니까 꽉 잡고 있기나 하시죠. 설명은 나중에 해 줄게."
내가 놀랐던 거랑 비교하면 놀란 축에도 끼지 않을 것이다. 뭐, 내가 자세하게 안 물어보고 지레짐작한 탓이니 라그니스에게 뭐라 할 건 아니지만.
추격은 생각보다 끈질겼지만, 배배 꼬인 길을 종횡무진 달리고 몇몇 집의 지붕을 조금 타고 나니 결국 포기한 듯 싶었다. 그제야 여유가 생긴 라그니스가 겨우 숨을 고르며 질문해 왔다.
"그 사람들, 강했던 거야?"
"그다지?"
"그런데 왜 도망친거야?"
"이 짓을 몇 번 반복해야 여관으로 직접 찾아올까 궁금해서."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기에 잠깐 앉아서 부가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으니 시간을 때우다 보면 놈들도 오늘의 방침을 정하고 다른 행동을 취하겠지.
부디 그게 오늘 여관 앞에서 대기한다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아직은 내가 상정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자신 있게 말해 보는 거지만, 방금 녀석들도 결국 내가 뭐 하는 놈인지 그리고 실력은 어떤지 알아볼 요량으로 던져 놓은 실험쥐에 가까운 것들이라고 본다. 골목으로 유인해서 싸운다면야 죄다 때려 눕히겠지만...그렇게 할 경우 경계도가 확 올라겠지."
"그래서 오러를 안썼던 거야?"
"어. 맞...응?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옛날에 대장 죽일 때 썼었잖아."
대장이라. 3년 전에 아실리에를 건드리려는 야욕을 드러내서 냅다 차 죽인 놈을 말하는 건 알겠는데...
아실리에도 오러로 느껴지지 않고 버프마냥 느껴진다는 걸 얘는 어떻게 오러라고 알아차린 거지? 표정 관리도 못하고 벙쪄있자 되려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영지 기사들이 오러로 대련하는 걸 봐서 알아. 오러가 없으면 따라 할 수 없는 움직임 같은 건 많이 봐 왔었거든. 그때 그게 오러 없이 가능한 속도는 아니었잖아."
아니야?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아하니 뭔가를 느껴서 알아차린 게 아니라 순전히 기억하는 움직임에 기인해서 가능과 불가능을 나눠 지레짐작한 듯 싶다.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지만, 이미 나도 모르게 반응해 버린 이상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난 또 네가 오러를 느끼는 줄 알았지."
"그게...그렇게 막 아무나 깨우칠 수는 없어. 넌 이해 못 하겠지만."
사실 나도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며 천재인 척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그 뒤로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저런 녀석들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신중하기 그지없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 신중함을 죄다 소진한 결과가 쟤들이 아닌 이상,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될 게 분명해. 벌써 6일이 지났으니 이제 9일 남았나? 대놓고 싸우지 않고 이렇게 도망만 치더라도 매우 초조할걸? 마음 같아서는 한 3일은 이렇게 해 먹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최선은 안 싸우고 끝내는 것이다. 싸우는 순간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일어나는 거니까. 물론 사건이 사건인 만큼 그런 건 불가능하겠지만 바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뭔가 되는대로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움직이는구나?"
진심이 담긴 눈빛이 괘씸하기 그지없어서 그대로 꿀밤을 먹여줬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되고 어두워진 거리를 지나 여관으로 돌아오자,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또 도망쳐 보시지?"
아무래도 추적자의 신중함과 인내심을 다 소진한 결과가 저 놈들이었나 보다.
어쩐지 좀 빨리 포기한다 싶더니, 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알리샤의 여관 앞에 있었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명백하게 입구를 가로 막으면서.
"시간에 쪼들렸다는 느낌이 확 드니까 좋기도 한데...너희 혹시 안에 있는 우리 알리샤 여사님이나 다른 꼬맹이들 건드렸니?"
"흐. 니네가 또 도망치면 건드리게 되겠지."
"엘드미아아아!! 이 씨발 새끼들 좀 가게에서 치워!!"
문을 잠궈버린 걸까. 보아하니 아무 문제없는 거 같으니 마음은 놓인다. 비록 그 외침에 문에 기대고 있던 놈이 쾅쾅 벽을 두드리며 위협을 시도했지만 알리샤 여사님은 한결 같은 욕지거리로 보답해 줄 뿐이었다.
"진짜 감당할 수 있겠냐? 시끄러워지면 경비 오는 것도 순식간인데?"
사실 말하면서도 눈치 채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은 내 물음에 비웃음으로 답한다.
녀석들이 우리가 오는 타이밍에 맞춰 대기했을 리 없다. 우리를 놓친 순간부터 고용주에게 가 상황을 설명하고, 여관에 와서 대기 중인 거겠지. 야간 순찰조가 돌기 시작하는 건 6시 이후부터로 알고 있지만 주변은 제대로 된 인기척조차 없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도시 순찰대부터 매수해 버렸다는 현실에 허탈해질 정도다. 하긴 생각해 보니 그것도 돈 있는 놈들의 발상이긴 해.
"네까짓 놈은 알 바 아니다. 사실 우리는 네 여자친구한테 볼 일이 있거든."
"알아 병신아."
"그러니...뭐?"
"알고 있다고. 그렇게 티가 나는데 모르겠냐?"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녀석들에게 시간이 없고 돈은 많으며 도시와의 유착 관계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대로 날 쓰러뜨리거나 도망치게 한 뒤 라그니스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정도로 크게 방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근처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까? 건물 안에 있을까? 비룡을 타고 도망친다는 가설이 맞다면 지시만 내려놓은 채 이미 도시를 나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거야 지금부터 알아내면 되는 문제이니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라고 한다."
검을 뽑으며 신념 주입을 위한 인사를 건넸다. 내가 검을 뽑을 거라고는 예상한 건지 비웃음은 변함 없다. 녀석들은 자신만만하게 하나둘씩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매우 바람직하다.
"일단 알리샤 여사님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너희 모두 사이좋게 허벅지에 칼침부터 맞고 교육을 시작하자."
본격적인 신념 주입은 그 다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