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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1화 (21/412)

머리가 아프다.

미미한 현기증과 어째서인지 몰라도 강하게 몰아치는 강풍 속에서 느껴지는 건 혼란뿐이었다.

분명...엘드미아가 마무리를 짓는다며 떠난 뒤. 진이 경비대를 불러오길 기다리며 이모님과 여관 앞의 핏자국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나중에 엘드미아가 돌아왔을 때 따듯한 차라도 하나 내줘야겠다며 들어가는 이모님을 향해 잠깐 고개를 돌렸던 것도.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정신이 드셨나보군요. 리엔 아가씨."

몸은 짐짝마냥 묶여 있다. 뒤늦게 내가 후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날아가는 동안 추울 수 있기에 취한 조치인 것 같다. 덕분에 분명 엄청 바람이 몰아치는 거 같지만 춥지는 않았다.

그렇게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 감도 안 오는 인물의 품에 안긴 채 아래로 펼쳐지는 아찔한 전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비룡이었군요."

"아가씨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가 함께 추측하신 건가요? 영특한 판단이라 여겨지는군요."

목소리의 주인은 젊은 남자였지만 기억에는 없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잊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다는 건 변함없으니 알 바 아니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자신과 엘드미아가 취한 모든 행동을 예상하였다는 반증과도 같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양동이었던 건가요?"

"맞습니다. 사실 그 친구를 염두했다기보다 국왕파의 방해를 염두한 거였죠. 비룡 두 마리를 구하고 수중에 있던 비룡 조종사를 패로 써야한다는 건 뼈 아픈 지출이었습니다만...이렇게 성공했으니 보람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룡기사가 이딴 저질스러운 납치에 가담해 놓고 보람을 느끼다니, 귀족파의 명예가 시궁창에서 구르고 있었군요. 이렇게 날아갈 때가 아니라 온 도시의 하수구를 파헤쳐야할 때 아닙니까? 얼마 남지 않은 명예를 똥더미에서 되찾으려면 1, 2년으로는 부족할 텐데 말이죠."

"흐음. 참신하고 신랄한 표현이군요. 3년이나 냉혹한 환경 속에서 생존만으로도 벅차셨을 텐데 배움과 공부를 등한시 하지 않으신 건가요? 변경백께서 보셨으면 분명 자랑스러워하셨을 겁니다. 그 분도 언변이 신랄하기 그지없는 편이었으니까요."

한순간 부모님을 들먹인 모욕인가 싶었지만, 라그니스는 남자의 태도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정적들에게 향할 때 아버지 엔그린 리엔 다 레비엥이 품은 세 치의 혀는 창칼과도 같았다.

그걸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한 번쯤은 봤을 거 같은데...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 비룡기사가 아닙니다. 제가 잘 기억나지 않으신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아쉬운 것 역시 사실이군요."

"반역입니다! 비룡기사도 아니면서 비룡을 몰고 검술을 익혔다니!"

"뭐, 안 들키면 그만이지요."

너무나도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한 반응에 라그니스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아가씨는 아직 귀족들의 어두운 면을 알지 못하셔서 그렇겠지만, 의외로 수도를 좀 벗어나면 몰래몰래 승룡술乘龍術을 익히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불순한 의도라기보다 언젠가 비룡기사가 되길 꿈꾸며 선행학습을 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 대부분에 포함되지 않은 이도 있기 마련이지요."

"...엘드미아는 어떻게 되었죠?"

갑작스레 이야기를 끊고 주제를 바꾸자,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멀리서 보느라 뭐라 말하는 게 잘 들리지 않았는데, 엘드미아. 엘드미아 에가라고 했었던 거군요. 죽었을 겁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그런 자신의 기분은 아랑곳도 하지 않으며, 남자는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전 미끼를 놓더라도 완벽한 미끼를 둬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비룡 조종사 쪽에는 기사 시험에 통과하는 일만 남은 친구들 넷을 배치해 뒀습니다. 그 친구가 아무리 좀 싸운다 하더라도 결국 근본 없는 막싸움에 불과하더군요. 그들을 상대로는 몇 합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쏙 들어갔다. 동시에 심장이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근본 없는 막싸움?'

최소 11살 때부터 오러를 써왔고, 120년을 살아온 엘프에게 기술을 배우고 있는 엘드미아가?

자신들의 수를 모두 읽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자였지만, 엘드미아의 실력만큼은 완벽하게 오판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계도가 확 올랐겠지.'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는 건물 지붕 위에서, 엘드미아가 했던 말이 소름과 함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음? 우시는 겁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라그니스를 인식하며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낮게 목을 울렸다.

"종종 영애분들이 야성미가 넘치는 남자가 좋다는 이야기하긴 했습니다만...그 친구는 야성미가 아니라 양아치에 가까웠습니다. 평민인 건 둘째 치더라도 말이죠.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대답할 수 없었다. 남자의 착각이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마지막 역전의 한 수라는 걸 깨달았기에, 그녀는 침묵하는 것을 선택했다.

라그니스는 웃고 있었다.

"그래서 그 델트라는 인간이 직접 비룡을 몰고 가기로 했다고?"

예상보다 훨씬 탑승감이 좋은 비룡에 놀란 것도 수십 분 전의 일이다.

나는 맹렬히 날아가는 비룡 위에 앉아 비룡 조종사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마, 맞습니다. 만약 그 모험가들이 성공해서 에, 엘드미아님을 쓰러뜨리면 제가 영애를 모시고 가면 되고, 그들이 실패하더라도 잘못된 정보로 엘드미아님이 저희 쪽으로 와 죽, 아니. 시간을 끌게 될 테니..."

"죽을 거라고 여겼나보네? 아까 그 4명한테?"

"......."

"네가 한 것도 아닌데 뭘 쫄아. 오히려 대답 안 하면 손가락 자른다? 집으로 돌아올 때 네 손가락 흔적을 보며 찾아오게 해주려고?"

"죄,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델트는 엘드미아님이 그들에게 죽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걔들이 그렇게 쎄?"

오러도 못 쓰는 인간들이었는데.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을 기에스라 소개한 비룡 조종사가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저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만, 델트가 이번 일이 끝나면 기사 시험까지는 느긋하게 지내도 되지 않냐고 그들에게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일반 기사 시험 정도는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는 실력이었을 거라는 말이군?"

"정확하십니다."

역시 불합리한 세상이다. 오러 비스무리한 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나 심하다니.

왕국 일반 기사 시험이 구슬치기나 땅따먹기로 치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차이가 나버리면 도대체 이세계의 파워밸런스는 어떻게 틀어져 있는 것인지 감도 안온다.

그래도 그 델트라는 이름의 비룡기사일지도 모르는 놈이 내 실력을 완벽하게 오판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이 보인다.

"근데 넌 대체 왜 여기에 끌려왔냐? 비룡 조종사는 고급인력 아니야? 이런 음모에 휘둘리면 끝 아닌가?"

"부, 부모님의 빚 때문에..."

아니 씨발 세상에! 괘씸한 개새끼인 줄 알았던 비룡 조종사 기에스는 알고 보니 이 개 같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효자였다!

들어 보니 자수성가에 가까운 노력 끝에 비룡 조종사가 된 건 좋았는데, 되려 그 탓에 갑자기 늘어난 자식의 급여에 눈이 먼 부모님의 과소비가 심해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돈을 융통해 준 사채업이 귀족파 소속의 한 귀족의 소유였기에, 빚을 탕감하는 대가로 이 일을 돕게 되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 작업 당한 거 같은데?"

"예? 작업이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어조로, 기에스가 되물었기에 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작정하고 비룡 조종사 하나를 약점 잡고 써먹기 위해. 긴 시간에 걸쳐 접근하고 빚을 지운 거 같다는 식의 가설을 다 들은 기에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그게 가당키나 하는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사악한 발상을 할 수 있는 거죠?!"

"사기꾼들은 어디에나 넘치는 법이지. 네가 부모님 알기를 좆같이 아는 놈이었으면 모를까, 굉장히 효과적이지 않겠냐."

처음엔 모든 게 짜증나서 정말 틈만 나면 손가락 한 마디라도 잘라 버리고 싶었는데, 그도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정말 알 수 없군요. 비록 그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돌이켜보면 의심 가는 게 한 두 개가 아닌 거 같습니다."

"...야! 씨발 신경 쓰지 마! 내가 지금 구하러 가는 게 누구냐?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변경백이야. 국왕파와 만나기만하면 모든 재산과 권리를 온전히 계승받는 후계자라고. 네가 협조 안 해주고 혀 깨물고 죽었으면 추격은커녕 끝이었으니, 라그니스한테 네가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잘 말해 줄게."

"저, 정말입니까?"

"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어서 불효자한테는 가차 없는데 효자한테는 좀 약해요. 있던 죄도 없앨 수 있게 머리 좀 써볼 테니 나중에 말만 잘 맞춰. 개 같은 귀족 새끼들한테 휘둘렸으면 좋은 일 하나 정도는 생겨야지."

"...흐윽. 가, 감사합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드는 귀족파 새끼들이다. 하다 하다 평민들을 사채업으로 등쳐 먹네. 덕분에 생각치도 못한 인연이 생겨버렸지만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그래도 당장은 라그니스가 우선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정말 잘 따라잡을 수 있는 거 맞지? 결국 놓치면 나도 좆 되는 거고 너도 당장의 빚은 사라질지언정 똑같은 형태로 또 휘둘릴 수 있는 미래가 펼쳐질 텐데."

"그,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엘드미아님께서 델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셨기 때문에 이대로만 날아간다면 뒤를 따라 잡는 건 말 그대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비록 당장은 불가능하고 몇 시간은 날아가야 보이겠지만요."

"따라잡을 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따라잡아도 별다른 수가 없지 않나요?"

"목숨 걸고 개짓거리 한 번 할 거야."

"개, 개짓거리요?"

안 그래도 비룡기사일 수 있는 인간이다. 내 실력을 오판한 걸 다행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 덕분에 시간을 왕창 벌 수 있었기 때문인 거지, 그거로 놈을 이겨 먹을 수 있을 거라 믿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공중에서 놈을 이겨 먹을 방법이라고는 딱 하나뿐이었다.

"어. 놈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비룡 대가리를 찍어버릴 거야."

내가 생각해도 미친짓이지만 이거 말고는 진짜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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