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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4화 (24/412)

아실리에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차 없는 등짝 스매쉬를 후려갈렸다.

결국 펑펑 울면서 내 등짝을 거덜 낼 기세로 두드리는 아실리에를 진정시키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요한 나는 라그니스와 알리샤의 도움까지 받고 나서야 겨우겨우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높이가 엄청 높아서 오히려 떨어지기까지 여유가 있어서 안전...'

'누나 심장 터져서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야이 씨발 눈치 없는 새끼야!'

'넌 정말 눈치가 없니!'

하지만 마지막에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여자 셋에게 손바닥으로 두드려 맞아버렸다. 진짜. 진짜 더럽게 아팠다.

'말도 안 되는 사건까지 해결해 놓고 몰매를 맞게 될 줄이야.'

'솔직히 옆에서 본 입장에서는 음유시인도 울고 갈 영웅적인 모습이었습니다만...가족의 눈으로 보면 복장 터질만 하죠.'

내 툴툴거리는 하소연을 들어 주던 기에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놓은 대답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론이었다.

결국 기에스와 비룡은 성인이 된 라그니스가 변경백으로 인정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첫 만남이 어찌 되었든 그는 라그니스를 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고, 사정을 들은 알리샤가 방을 공짜로 빌려 준 덕에 그녀의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경비대의 취조를 다 같이 받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생길 뻔했지만 주변의 증언 덕에 안 생기고 넘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라그니스의 생일이 다가왔다.

"이것만큼은 딱히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수백 미터 위의 하늘에서 그 무모한 짓을 해 놓고서 마지막에 빠지고 싶다고?"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침착함을 연기하던 라그니스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이란 말은 묫자리에서나 쓰는 거야."

"쓸데없는 말로 둘러댈 생각 말고."

평소라면 그냥저냥 흘려 들었을 거면서 라그니스는 더없이 완고한 자세를 취하며 날 붙잡았다. 물론 이렇게 얼굴 보는 것도 마지막일 터이니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없지만, 그런 건 그냥 적당히 이야기 나누다가 국왕파의 일행들이 왔을 때 자리를 비켜줘도 된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동행을 요구했고, 심지어 아실리에마저 거기에 동조해 버려서 난 꼼짝도 못한 채 알리샤의 여관에서 시간을 때우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당초 내 목적은 내 주변을 건드리는 놈들을 향한 철저한 응징과 보복에 불과했다. 물론 이번엔 원치 않게 죽음으로 사죄하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결과적으로 내 볼일은 이미 끝났다. 몸의 이상도 없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다시금 단련의 나날로 돌아가기 바쁜 몸이다. 꽤 큰 사건을 겪어 버렸다고 한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더 위험하고 더 큰일이니까.

비록 델트도 죽고 포획한 놈들은 하나같이 정보가 부실해서 꼬리를 물고 물어 귀족파의 뒤통수를 후려 버리겠다는 라그니스의 원대한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거기까지는 계획 안 했거든."

"그런 무른 태도는 좋지 않아. 다름 아닌 변경백으로 살아갈 거면 더욱 그렇지."

겨우 16살인 소녀에게 할 조언은 아니지만, 결국, 내 상식이 어떻든 간에 이 세계에서는 성인이다. 오늘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어 변경백의 자리를 이어받은 그녀의 앞길은 상당한 가시밭길이 펼쳐질 게 분명했다. 비록 수호해야 하는 영지가 없으니 한동안은 이름과 재산뿐인 변경백이겠지만, 그 영향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져나갈 것이고 이번과는 비교도 안 될 치밀한 권모술수가 그녀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더 이상 널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 엘드미아는 없는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걸 자각해야지."

"이젠 오빠도 아니고 아저씨야?"

"정..."

"그래, 정신 연령 30세를 초과한 엘드미아는 아저씨에 버금가는 지성이 깃들어 계시겠죠."

건방지게 대사를 가로챈 대가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려 주었다.

"잘 아네."

"...엘드미아도 같이 가면 안 돼?"

"난 아실리에에게 2년을 더 훈련받고 우리 마을 작살낸 지휘관 새끼 목 따러 가야 해서 바빠."

델트라는 놈이 나와 검 한 번도 섞지 못하고 죽어 버린 건 철저하게 상황 탓이었다. 상식 밖의 일에 직면 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사고의 정리 과정을 강화된 신체로 파고들어 단칼에 죽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작정하고 마력을 끌어올려 전력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순간의 차이로 반격이 들어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놈의 목을 베는 순간, 모든 상황을 뒤늦게 이해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표정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순간에는 그 모든 무모한 시도들이 맞아떨어지며 한 번에 성공했다는 점에 순수하게 기쁨을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면승부였으면 죽는 건 나였다.

그런 놈이 있는데도, 그보다 더 뛰어난 놈도 많을 텐데도 마왕군은 여전하고 마왕도 못 죽인 채 6년이나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뛰어넘어야 할 강자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보니 이제까지는 그다지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강박증이 도질 수밖에.

"국왕파 쪽에는 뛰어난 기사들도 많아. 저들이 굳이 날 데려오기 위해 오늘의 각본을 짤 정도로 내 입지는 상당한 편이고. 네가 원한다면 충분히 교섭이 가능해."

기사에게 정식으로 검술을 배울 수 있게 말이야. 한없이 진지한 얼굴과 굳게 각오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라그니스는 단언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빈말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쁜 조건도 아니다.

기사의 도움을 못 받을 경우, 사비로 수도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에 날 집어넣어 배움의 기회를 줄 생각마저 할 것이다. 이미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은혜를 느끼고 있는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병사로도 못 쓰고 실력되면 복수하겠답시고 뛰쳐나가려는 놈을 누가 가르치겠어."

"그래도 네 재능을 보고 가르침을 베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의외로 그런 이야기도 많아."

"글쎄다. 왕의 10검 정도 되는 사람이 와서 배우라고 하면 생각은 해볼게."

그런 사람들에게 배우면 필요한 건 필요한 대로 배운 뒤, 재능이라 여겼던 게 사실 재능이 아니라는 게 들통나서 자연스럽게 쫓겨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꽤 매력적인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실력에 서열이 있잖아. 그냥 10번째여도 생각해 본다는 거야?"

"10검 씩이나 되는데 내가 가릴 처지는 아니지. 5검 이상이면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제발 데려가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니?"

드디어 좀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가벼운 농담으로 넘어가나 싶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

그러자.

"번복하지마."

나와는 다른 의미임이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라그니스가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졌다.

그 미소는...그래.

내가 라그니스가 양아치를 팼다고 거짓말했을 때 가소롭다는 듯이 보여줬던 미소와 매우 흡사했다. 덕분에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야 무서우니까 그렇게 웃지 마."

"호의가 가득한 미소가 무섭다니. 너무한걸."

"아니 무슨 호의가 가득이냐. 딱 봐도 '가소롭게 네가 나한테 그딴 조건을 걸어? 못 할 줄 알아?'라는 의도가 가득한 미소인데."

"그렇게 해서 엘드미아한테 이득이면 결국 호의가 가득한 미소인 게 아닐까?"

더욱 짙어지는 미소가 공포심을 자극한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아서 위압감에 지축이 울리는 듯한 착각마저...아니? 진짜로 울리네?

"도착했나 봐."

다행히 나 혼자 헛것을 느끼는 건 아니었는지 여관 밖을 바라보며 라그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뭘 끌고 오길래 이러나 싶어서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간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씨발."

여관으로 이어지는 길 중 가장 큰 대로의 사람들이 좌우로 길을 트며 비켜 나가고 있었다.

"마중 나온다는 게 이런 거였어?"

갈라지는 인파 너머로 딱 봐도 귀족과 기사와 마법사로 보이는 다섯 명의 인물들이 화려한 마갑을 두른 말 위에 올라탄 채 장엄하게 걸어온다.

"말했잖아.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 쓰는 각본이라고."

내 옆에 서면서 라그니스가 대답했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돌려 그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다섯 명의 기수들 뒤로 빽빽하게 도열한 채 발 맞추어 걸어오고 있는 병사들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컸다. 도시 경비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왕국군 제식 갑옷을 차려입은,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한 대의 마차를 호위하며 다가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동시에 왜 그녀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어제 작별 인사를 마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 알리샤 여관의 레비가 아니라 이티스엘 왕국을 지키던 라비엥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라그니스 리엔 다 라비엥이었다. 제대로 된 이별의 말조차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에카프 경."

어느새 앞으로 세 걸음 나아간 라그니스가 마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과도 같은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던 다섯 사람들 중 한 기사에게 말을 건넸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백금발과 맑은 자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기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말에서 내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의 제 3 검, 에카프 츠신 오가토프르가 왕국의 방패 레비엥 변경백께 인사 올립니다."

성인이기에, 그 어떠한 미사여구 없이 그저 변경백이라 칭하며 기사가 무릎 꿇었다.

그가 먼저 한쪽 무릎을 꿇자, 말에서 내린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무릎 꿇자 도열한 병사들마저 무릎 꿇었고, 병사들이 무릎을 꿇자 멍때리고 구경하던 시민들조차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같이 무릎 꿇었다.

나는 씨발 너무 놀라서 무릎 꿇을 타이밍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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