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어디?
오그웬 외곽에 구축된 자칭 '라비엥 변경백 호위단'의 야영지 내에 있는 지휘관 텐트.
나는 누구?
분위기에 압도돼서 동행하라는 라그니스의 강압적 태도에 찍소리 못하고 끌려 온 쭈구리 엘드미아.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진짜 내가 알고 있던 라그니스라는 계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주 그냥 귀족 그 자체였다. 귀족들의 조기교육은 1살부터 시작인 건가? 그간 대체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숨기고 살아온 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쫄았다.
병사들이 호위하던 마차는 라그니스를 모셔가기 위함이었다. 숨 막히는 인사 외에 어떠한 말도 필요 없는 것처럼 그대로 마차에 올라탄 라그니스에게 이끌려 이대로 수도까지 납치되는 건 아닌가 싶어 오들오들 떨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도시에서 물자보급을 받고 앞서 있었던 납치에 대한 보고도 받을 겸 3일 정도는 머문다고 한다.
말을 탔던 사람들은 다섯이었지만 지금 동행 중인 사람은 둘뿐이었다. 에카프 경과 라그니스의 스승. 실질적으로는 이 둘이 호위단을 대표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부관인 듯 싶었다.
그들은 라그니스에게 직접 지난 사건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그건 비단 델트의 납치 사건뿐만 아니라 변경백의 영지가 작살난 뒤부터 라그니스가 지나온 족적 전체를 의미 했고, 이를 예상하고 호위단을 기다리는 동안 방에 박혀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시간을 보내왔던 라그니스는 매우 깔끔하고 명확하게 사건들을 정리해가며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렇게 한 차례 정리되고 나서야 겨우겨우 사적인 주제로 말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변경백께서 오그웬에 계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화장실가기도 두려워 차마저도 조심히 홀짝이던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지만 그들은 불쌍한 엘드미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마차에서 라그니스에게 미리 이렇게 될 것이고, 이게 귀족과 귀족이 아닌 자를 놓고 대화할 때 좀 어쩔 수 없는 예법이니 이해해 달라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쭈구리가 된 처지에서는 편치 않은 게 사실이다.
왕의 3검이자 왕국 기사단의 기사단장 중 한 명이기도 한 에카프 츠신 오가토르프는 오래전부터 선대 라비엥 변경백과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선대 변경백은 마왕군의 변화를 가장 먼저 경고하던 인물이었고, 그런 선대의 주장을 제대로 고민하고 받아들이며 같이 목소리를 높혔던 게 에카프였다. 자연스럽게 왕래가 잦아질 수밖에 없었겠지.
덕분이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당당하게 자신이 나서는 것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관계가 가벼운 수준은 아니었나 보다.
"몸을 추스르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에카프 경도 6년 전에 인연이 닿은 곳이었죠?"
6년이면 우리 마을이 작살났던 시기인데, 조사를 위해 방문한 적이 있던 걸까? 막상 기억을 되새겨보면 딱히 누군가 마을까지 왔다 간 적은 없으니 그냥 오그웬에 머물러 정황을 보고 받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에카프는 별말 없이 가벼운 끄덕임만으로 라그니스의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뭔가 불편한 걸 건드린 건가 싶었는데 그냥 말이 적은 것인지 정작 라그니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하며 자기 스승에게로 화두를 옮겼다. 이미 자기들끼리는 다 아는 사이였고 이 이야기의 메인은 그들이었기에 별다른 자기소개조차 없이 이야기는 막 진행되었다.
역시 내가 끼어들 자리는 딱히 없었다. 사무치도록 아실리에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스승님께서 부족한 제자를 위해 도와주신 은혜는 평생에 걸쳐 갚아나가겠습니다."
"사제 관계에 그딴 거 없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 만큼은 진정한 네츄럴 본 마법사 그 자체인 노인이었지만, 그는 꼬깔 모자와 로브 대신 딱 봐도 튼튼해 보이는 가죽 갑옷과 후드 달린 케이프를 걸친 채 벨트에 몇 개의 약병과 마법서, 장검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한손검 한 자루와 지팡이 하나씩을 차고 있는 파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장에서 싸우는 마법사라면 저렇게 갖추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긴 했지만, 얼굴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어르신이 무슨 마초 보디빌더마냥 무지막지한 떡대를 유지하며 그러고 있으니 두렵기 짝이 없다. 선글라스 하나 끼워주면 매우 잘 어울릴 거 같다.
늙음이라 적고 살아남음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전투적인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그는 몇 안 되는 대성한 배틀 메이지였다. 길 가다가 마주치면 어지간한 놈들은 바로 눈을 내리깔 정도로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고, 말투도 그랬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왕국법조차 우리를 남으로 구분짓지 않는다. 결국 가족과도 같을진대 어찌 너한테 보답을 받고 일을 행했겠느냐. 앞으로 정진하여 선대 변경백의 뒤를 이을 생각만 하거라."
이론적 교육보다는 물리적 교육를 더 중시할 거 같은데 직접 발품까지 팔아가며 뛰어난 이를 발굴하고 제자를 육성하는 데 그렇게나 열성적이라니, 역시 사람은 외모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내심 감탄하는 사이 다른 이와 달리 나를 바라보며 노인이 말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널 도와 준 저 젊은이에게 내가 은혜를 갚아야지. 인사가 늦었지만 귀족 놈들 격식이라는 게 좀 그런 거니 이해해 주게나. 나는 라드넬반데스 아크리산이라고 하는 마법사라네. 번잡하기 짝이 없는 이름 때문에 라드라고 불리는 라그니스의 마법 스승이자 별거 없는 책방의 주인이지."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책을 꽤 좋아하시나 봅니다?"
"응? 아하하핫! 그렇구만. 자네는 전사로군."
내가 아는 그 도서관이 아닌가? 라는 생각과 전사라고 확정하는 걸 보니 마법사들의 은어인 건가?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며 의아해했지만 라그니스가 옆에서 바로 설명을 덧붙여줬다.
"마법사들은 개인연구실을 책방이라고 불러. 마법사 협회의 건물 이름이 마도서관이거든."
소설에서나 보던 마탑이네 뭐네 하는 구조가 아닌가 보다. 그래도 마법사라는 직종이 책을 끼고 사는 건 매한가지구나 싶으며 납득하니 호쾌하게 웃던 라드넬반데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나저나...분명 아직 어린 나이일 텐데 놀랍기 그지없군. 자네도 올해에 성인이 되는가?"
"아직 2년 남았습니다."
"허어. 14살이라고? 에카프 자네 딸이랑 동갑 아닌가?"
"...맞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말이 적은 편인건지, 짧게 대답하면서도 에카프는 흥미가 동한 것처럼 나를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작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라드넬반데스였지만.
"그 태워 죽여도 시원찮았을 델트라는 놈을 일격에 죽여 버린 것도 놀랍지만 미친 세상에! 비룡에서 비룡으로 아무런 마법적 도움도 없이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강단이라니?! 발아래로 펼쳐지고 있었을 구름과 깨알 같은 전경을 보면서도 그럴 용기가 생기던가?"
"너무 높으니 오히려 떨어질 때까지 여유가 있어서 비룡 조종사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 여겼을 뿐입니다."
"하하하! 이거 아무리 봐도 제국 신성회에서 용사를 잘못 뽑아간 거 같은데!"
진짜 웃음소리마저 무슨 마법사가 아니라 야만전사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은 사실 전부 저런 게 아닐까? 아실리에와 어릴 적 잠깐 봤던 방문자를 제외하고는 직접 마법사를 만난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물론 그것도 놀랍지만 델트라는 놈이 데려왔던 졸개 4명을 죽인 것도 쉬이 넘길 수 없는 부분이군. 그놈 말로는 기사 시험마저 통과할 실력이었다는데 말이야. 그 나이에 벌써 오러를 깨우친 건가?"
"아뇨.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운에 의존했으니 실력이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죠."
오러 사용자는 오러 사용자를 알아볼 수 있다. 라그니스도 그 사실을 알기에 내가 이런 거짓말을 할 땐 굉장히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에카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 의아해하면서도 아무 말 않고 있었다.
"겸손하기도 하군. 하지만 단련된 육체부터 비범하기 그지없어. 대체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나?"
"어릴 적 인연이 닿은 엘프 모험가를 스승으로 두고 있습니다."
"엘프? 내가 엘프를 무시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난 자네 같은 근육질 엘프를 본 적이 없네만?"
"육체 단련은 뭐, 그냥 어쩌다 보니."
"허어. 어쩌다 보니 저렇게 될 육체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 기사단 놈들은 죄다 통곡하겠군."
귀족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바로 옆에 그래도 한 기사단의 단장인 사람을 두고도 말에 거침이 없다. 그리고 그런 거침없는 언행이 익숙한것처럼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고민하던 에카프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도 라드넬반데스님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군. 언제부터 단련을 한 건가?"
"8살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성장에 지장이 없을 만큼 해왔습니다."
"8살? 기사 집안인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기에 덤덤하게 대답해주려는 찰나, 라그니스가 내 손을 잡으며 제동을 걸었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한 번 마주친 그녀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는 6년 전 마왕군 습격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단련해왔죠."
"뭣?!"
"생존자가 있었단...?"
경악하며 놀라는 라드넬반데스와 달리 눈을 크게 뜨는 정도의 반응만 보이던 에카프가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만신전."
"예?"
"무너진 만신전 옆에 만들어진 무덤 두 개. 도적들의 시체. 다섯? 아니 여섯이었던가?"
진심 소름이 돋았다. 이 아저씨 기사가 아니라 무당인 건가? 적잖게 당황하는 나와 라드넬반데스의 시선이 에카프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게 자네였다고...? 아니, 어떻게 8살 아이가 그걸?"
세상에. 아까 말했던 6년 전에 오그웬에 왔다는 이야기가 작살난 우리 마을에 직접 정찰을 온 거였어?
고개를 돌려 라그니스를 바라보니 그녀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이미 예상한 눈치였다.
그녀는 그저 말없이 쥐고 있던 내 손을 조금 더 힘을 담아 쥘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