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6화 (26/412)

에카프 츠신 오가토르프.

평범한 기사도 아니고 왕국 최연소 기사단장임과 동시에 왕의 10검 중 3검으로 뽑힐만큼 출중한 검술 실력을 가졌으며, 뛰어난 지휘력까지 겸비한 이티스엘 왕국의 자랑 중 하나로 통하는 기사.

놀랍게도 그는 6년 전 내가 도적놈들을 죽인 그날 정찰기수의 역할을 맡고서 마을을 조사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왜 정찰기수를 했던건가 싶었는데, 역으로 그가 정찰기수를 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사항이었다더라.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판단했다는데, 잘난 사람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게 맞았던 거겠지.

하긴 마왕이 뭔 뒷집 똥개새끼도 아니고, 그 마왕의 군대가 왕국을 수백 년 만에 습격했으니 심각한 사건이 맞다.

"밤이 깊어지고 나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네. 몇 세기만의 침공이었기에 신중하게 움직이다 보니...너무 늦어졌지."

그렇게 발견한 게 다 박살 난 마을과 그나마 사망 시각이 다른 것으로 추정되는 도적들의 시체 그리고 아직 마르지 않은 흙더미와 미처 다 매장하지 못했던 내 부모님의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나 더 확인해 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어서 그대로 오그웬으로 와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듯하다.

우리 오두막이 잘 보이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날은 피곤해서 정말 일찍 잠들었으니까. 참으로 절묘하게 빗겨간 인연이었다.

"헌데...생존자가 있었다니. 심지어 그 도적들을 그 어린 나이에 죽였다고?"

"제 인간성에 하자가 있어 보이는 상황인 건 이해합니다만, 유품마저 빼앗길 위기에 부모님의 무덤을 욕보이는 짓을 용납하기 힘들어서 내린 결론이라는 걸 이해해주셨으면 하네요."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우리는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출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거라네. 도적 놈들을 죽였으면 잘한 거지."

어울리지 않게 얼타는 표정을 짓는 라드넬반데스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8살난 어린애가 사람을 여섯이나 죽였는데 저런 반응이 가당키나 한 건가? 이세계 인간성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네.

"자네가 하고자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만...사실 나도 마찬가지라네. 8살이라는 나이는 기술의 문제를 떠나 근력의 문제조차 극복하기 힘든 나이지. 자네의 공을 치하해도 모자란 자리에 이렇게 질문만 던지게 돼서 미안하지만...너무 놀라운 사실이라 그러니 양해를 구하고 싶군."

"그게...사실 어릴 적에 말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인연은 둘째 치더라도 이렇게 어이없게 과거의 살인이 들통난 이상 마력을 숨기기엔 글러버렸기에, 나는 적당히 이야기를 각색해서 전달하기로 했다.

지나가던 마법사의 도움으로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었고, 그걸 반복하다 보니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엔 그걸로 몸을 강화해서 죽였다. 하지만 스승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봉인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델트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다.

대충 그런 내용으로 딱히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밥 먹듯이 쓸 수 있다는 것을 구태여 말하는 대신 생명의 위기 때 목숨을 걸고 쓰는 느낌이 나는 정도로 설명해주자 세 사람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생존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정말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도 무사한 게 기적이로군. 그런 게 가능한 사람도 처음이고."

"나도 실제로 그 짓거리하다가 터져죽는 놈을 봐서 하는 말인데...진짜 기적이다."

실제 목격담을 입에 담은 라드넬반데스 덕분에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지만, 그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도 라드넬반데스였다.

"확실히 오러가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아. 그런데도 이런 성장이라니, 라그니스. 이래서 일부러 데려온 거였구나."

"네. 스승님."

살짝 눈을 돌려 바라보자 라그니스는 굳은 표정을 풀고 옅게 웃고 있었다.

"두 번에 걸쳐 저를 구원해줬을 뿐만 아니라 재능까지 지닌 남자입니다. 선대의 유지를 잇는 자가 은인에게 마땅한 보상과 기회조차 드리지 못할 수는 없지요."

"확실히...아무리 8살부터 단련했다 하더라도 감탄스러운 성취입니다. 모든 기사의 자녀들이 저렇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제 딸조차 몇 수는 접어야 할 수준이군요."

"확실히 자네 딸이 잘나긴 했지만 8살 때부터 저런 두각을 드러낸 친구랑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의 딸인데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십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올 뻔했지만 에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교할 수 없지요."

이거 졸지에 내가 다 민망하고 뻘줌해져 버리는군.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에카프가 목을 축인 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의 목적은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의 원수를 갚는 것인가?"

"그것도 있습니다만...어린 나이에 큰 일을 겪고 나니,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더군요. 그저 아무도 저를 해코지 할 엄두조차 못 내게 하는 게 목적입니다."

"권력을 원한다는 건가?"

"아뇨. 그냥 사실만 원합니다."

"사실?"

"네.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면 좋은 꼴 못 본다는 사실. 그게 권력이든 무력이든 제가 할 수 있는거라면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라그니스를 도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내가 한 말이 너무 직설적이었던 건지 라그니스가 몰래 내 옆구리를 찔렀지만 저런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차마 반응할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굉장히 장기적인 목표로군. 그 목표는 힘들지 몰라도 마을 파괴를 주도한 마왕군 지휘관을 죽이려는 복수는 도와줄 수도 있네. 실제로 그게 가능해진다면 왕국에도 큰 도움이 되는 거니까."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다시금 표정 변화없는 덤덤한 얼굴로 에카프는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면, 내 가문에 와서 가르침을 받을 의사가 있는가?"

나보다는 라그니스가 원하던 제안이, 결국 그의 입에서 나와 버렸다.

그 안에서 고민하는 척했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보호자 찬스를 쓰고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 라그니스는 아실리에와 상담하겠다는 내 이야기를 결코 흘려듣지 않았고, 에카프와 라드넬반데스 역시 아실리에가 스승이자 은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만큼 같이 수긍해줬다. 어차피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니, 마지막 날까지는 유예를 둘 수 있다며 말까지 빌려줬다. 그래도 누구 하나 강압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 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애당초 난 아실리에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필요가 없으니까.

라그니스를 구하기 위해 무모한 행동했다고 혼날 이유도 없다. 애당초 내가 아실리에를 구해주며 단순히 8년의 기간을 조건으로 걸어 시작된 계약의 관계니까. 그렇기에 사실 아실리에 역시 내가 죽든 말든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좀 더 빨리 자유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건 자명했다. 나는 진심으로 아실리에에게 쩔쩔매고 있으며 아실리에는 진심으로 내가 죽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당장 부모님이 살아계셔도 에카프를 따라가지 말라하면 내가 고민을 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냥 그렇군요라고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없이 에카프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8년이라는 계약이, 겨우 2년밖에 남지 않은 계약이 나로 하여금 에카프의 제안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고, 오러를 익혀 더 강해질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온갖 핑계로 거절하며 그냥 아실리에와 2년을 더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 켠에 존재한다.

그게 끝이 명시되어 있는 행복이기 때문인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말을 몰았음에도 오두막까지 순식간에 도착해 버렸다. 군마라서 힘이 좋은 건지 내가 생각에 빠져서 시간을 잊은 건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그냥 쓸데없이 힘이 넘치는 군마 탓을 하기로 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아직 4시 무렵일까, 겨우 일주일 조금 넘게 안 왔을 뿐인데도 오두막의 전경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실리에가 있었다.

은빛이 더 강하게 도는 백금발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빛을 받아 빛나는 것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귀를 쫑긋거리며 내 소리에 반응한 아실리에는 말에게 여물을 주다 말고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해줬다.

"어서 와 엘디."

"다녀왔어 누나."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적당히 우리 말 옆에 묶어두자 흥미롭다는 듯 이를 살펴본 아실리에가 물었다.

"아무리 봐도 군마인데? 네가 이걸 굳이 선물로 받았을 거 같지는 않고...아직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닌가 보네?"

"정확해. 누나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하는 문제가 생겼거든. 어차피 한 번 더 들려야한다고 그냥 빌려주더라고."

"이야기?"

의아함을 내비치는 아실리에의 얼굴을 보니 안 그래도 쉽게 떨어지지 않은 입이 더 안 열린다. 하지만 마냥 미룰 수 없는 일이기에 천천히 운을 뗐다.

"라그니스의 입지가 생각보다 엄청난 거 같더라고. 호위가 온 정도가 아니라 호위단이 왔어."

"어머나."

별 관심이 없다며 라그니스와 가벼운 작별 인사만 한 뒤 집에 돌아온 그녀였기에 역시 아무것도 모른 상태였다. 그래도 그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꽤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 호위단 대표 중 한 명이 왕의 3검인 에카프라는 사람이었어."

단순히 흥미 본위로만 귀를 쫑긋거리며 듣던 아실리에의 얼굴이 겨우 그 말만으로도 미묘하게 굳었다. 그 반응에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 아실리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에게 가문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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