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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27화 (27/412)

추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긴 했다.

이세계 평균은 몰라도 내 행적이 절대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알 수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진즉에 에카프의 이야기만 꺼내도 아실리에가 눈치 챌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닥치고 나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내 말을 들은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두려웠다. 그녀가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아하는 상황도 마주하기 싫고, 이별을 아쉬워하며 슬퍼하는 것도 싫었다.

"응.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 하게 하는 건 못 도와줘도 그 마왕군 지휘관을 잡는 건 도와줄 수 있다더라."

그래서 라그니스가 가르침을 빌미로 수도로의 동행을 요구했을 때조차 가능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긴 왕의 10검을 운운하며 핑계를 만들었다는 걸 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이세계가 이번에도 이세계 해버렸다.

반은 농담인 척 반은 진담인 척 해오며 그저 신념인 것으로 포장한 내면의 분노가, 어차피 기간 한정 행복에 불과한 것에 매달리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며 에카프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역정을 낸다.

"난 그것마저도 도와줄 수 없어."

당연하다. 그녀는 평범과 아주 조금 거리가 있을 뿐인 엘프 모험가였으니까. 아무리 내 삶의 은인이라 할지언정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건 남은 2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야. 네 목적을 달성하려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하는데도 온 몸을 옥죄이는 듯 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눈을 들어 그녀를 마주보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었다.

불합리함이 불러 일으키는 분노에 의해 움직일 때를 제외하면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지극히 별 거 아닌 사람.

"...그럼에도 엘디는 그 제안을 고민하고 있구나."

천천히 다가온 아실리에가 살며시 나를 끌어 안았다. 이미 그녀보다 키가 커진 내 눈에는 그녀의 머리카락만 한가득 보였지만, 날 끌어 안아주는 아실리에의 떨림은 굳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게 해줬다.

"엘프는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개념이 없어."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아실리에는 속삭인다.

"비단 엘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생종이 그래. 남는 게 시간이니까. 우리들에게 시간이란 언제나 여유로운 것에 지나지 않아. 늙어 죽는 엘프보다 삶에 미련이 없어 세계수로 회귀하는 엘프가 더 많은 이유지."

그 속삭임은 의연함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을 만큼 위태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인간들과 엮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흘러가는 그들에게 휩쓸리게 되어버려. 짧은 삶 속에서, 우리와 달리 바싹 뒤쫓아오는 세월이, 죽음이라는 그물을 던져 자신들을 끌고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고자 쉴 틈 없이 달리는 모습이, 출렁이는 불꽃으로 만든 보석과도 같아서 가까이서 홀린 듯이 보게 되지."

팔을 들어올려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점점 심해지는 떨림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그녀도 나처럼 이별을 원치 않게 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럼에도 그냥 거절하겠다고 말하지 못한 채 유지하고 있는 스스로의 침묵이, 눈을 돌리고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 찰나의 행복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게 수백 년에 걸친 불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끌리고...대부분 절망해. 그래서 그런 경험이 있는 엘프들이 항상 젊은 엘프들에게 충고해 줘. 인간을 대할 때는 항상 경계하고,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그래도 한없이 부족하다고."

8년.

나에게는 길지만 엘프인 그녀에게는 찰나와도 같다고 생각하며 제안한 기간은, 빠르게 흘러가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 너무나도 빨라서 끔찍하게 아픈 것이 되어버렸다.

"나, 나도 당연히 그걸 모르지 않았어. 숲을 나와 떠돌았던 60년간 항상 잊지 않은 조언이야. 엘디에 대한 관심이 애정으로 변할 때마다 되새겼는걸. 그렇게 1년, 2년 흘러가는 매 순간 의연하게 이별을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고."

단순히 내가 잠깐 갔다가 강해져서 돌아오는 정도의 문제였다면, 그녀는 웃으면서 보내줬을 것이다.

서로 헤어짐을 아쉬워한다는 걸 이야기로 확인하고, 결국 돌아와 웃으며 재회했을 것이다.

"그래서 설령 엘디가 나에게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여겨서 우리의 계약을 조기에 끝맺는다 하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비록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 한다 한들, 능글맞게 남은 2년을 뒤로 미뤄두는 형태의 거래를 통해 다시 만날 여지를 고의적으로 남겨 뒀을 수도 있다. 불합리하다고 웃으면서도 그녀라면 적당히 속아 넘어가는 척 받아들여 줬을 것이다.

"그랬었는데...정작 엘디도 나와의 이별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게 기쁘면서도, 그럼에도 널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눈물이 멈추지를 않아...심지어 2년이나 더 빨리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게 슬퍼서 죽을 것만 같아."

하지만 그녀는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안다.

어릴 적 그녀와의 관계가 가볍게 끝날 거라 여기던 그 시절의 엘드미아가 입에 담고 실천해 온 모든 순간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너스레를 떨고 별 거 아닌 것처럼 웃으며 지내면서도 당장 그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6년 전 그 날을 향한 분노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가지 말라는 말조차 입에 담지 못 한다.

만약 내가 전생에서 평범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갈수록 피폐해지는 생활 속에서 제대로 된 독립조차 못했어도 꿈을 버리지 않고 희망을 품고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면 좋은 날이 올 거라 여기며 꿋꿋하게 살아가고자 마음 먹자마자 죽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그 죽음이 부모님을 죽인 강도가 휘두른 칼에 찔려 맞이한 게 아니었다면. 최소한 이세계에 환생하고 똑같이 다짐하며 살아가던 도중에 마을사람들과 부모님이 몰살 당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랬다면 아실리에를 만날 수도 없었겠지만, 만약에. 만약에 그랬음에도 아실리에를 만날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은 관계가 이어졌더라면.

그렇게 가정을 하고나서야 상상과 가정 속의 엘드미아가 아실리에의 곁에 멈춰 머물렀다. 반대로 말해 그렇게까지 가정하지 않으면 전생부터 중첩된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가 강박증을 자극해 멈추지 못했다.

명백한 트라우마였다. 올곧게 살고자 했던 평생의 의지가, 단순하고 불합리하며 부당하기 그지없는 폭력에 저항도 못하고 두 번이나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

아실리에 덕에 아무리 희석되었다한들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순식간에 갈라지고 다시 피가 흘러나오는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고마워 아실리에."

사과하지 않는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내가 혼자 날뛰다가 데인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 얻어맞은 꼴인데, 그로인해 생긴 트라우마로 아실리에에게 사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과는 날 그렇게 만든 놈들이 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사한다. 그런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일념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나를 지켜봐주고 지탱해줬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아실리에의 울음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진정을 한다하면서도 얼굴만 보면 눈물보가 터지는 게 반복되다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어버렸다.

"이제 좀 진정돼?"

"그럴 리가 있냐..."

그녀의 입장에서는 진정이고 나발이고 결국 눈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개복치를 바라보는 심정일 것이다. 내가 물어봐놓고도 참 양심 없는 질문이었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펑펑 울다가 기력이 빠져 배고파하는 아실리에를 두고 만들기 시작한 스튜가 완성 되었을 즈음에야 그녀는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면서 그녀를 식탁에 앉히고 테이블을 세팅하는 동안에도 축 쳐진 귀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고수하던 아실리에는 내가 맞은 편에 앉고나서야 입을 열었다.

"다녀와."

"응?"

근래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초췌해진 얼굴을 한 채로 아실리에는 말했다.

"불안하고 두렵지만, 엘디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니까. 실제로 마력을 다루기도 하고."

"......"

"어차피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면, 차라리 최고에게 제대로 배우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니까. 그러니까 다녀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아실리에의 눈은 토끼처럼 빨개져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네가 그 놈을 죽이고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대신 돌아오면 나랑 같이 여행이나 떠나자."

"...응."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엘디는 엄청 노력하고 고생할 테니까. 그리고 그 정도 되는 놈을 죽일 정도면 엄청 강해져서 어지간한 녀석들은 건드리지도 못 할 테니까."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스튜를 뜨며 아실리에는 힘들게 웃어보였다.

"나랑 여행하며 즐기는 정도의 사치는 부려도 될 거야."

그 말이 너무나도 고마워서 결국 나도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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