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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0화 (30/412)

열넷의 나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상당한 미인이다.

숱이 고르면서도 좀 두꺼운 눈썹은 매서운 눈매와 잘 어울렸고, 유일한 화장인 것 같은 붉은색 굵은 아이라인이 하얀 얼굴 위에 확실한 포인트가 되어주고 있다. 이대로 자라면 매서운 인상의 미녀가 될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키는 아실리에보다 좀 작으려나?

그런 것보다도 남의 방 문을 두 짝이나 작살내놓은 주제에 매우 기세가 좋다. 심지어 얼마나 거세게 걷어찼는지 문이 열린 뒤로도 한참 풍성한 치맛자락이 펄럭일 정도였다.

음.

생각해보니 어차피 자기집이니까 남의 방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네. 아무튼 초면에 굉장한 배짱을 내보이며 자신을 셰릴 츠신 오가토르프라 소개한 소녀는 그런 기행만으로 그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넌 누구냐."

뒤에서 대체 왜 욕실에 그러고 앉아있는 거냐고 얼굴로 물어보는 하녀와 달리, 셰릴은 그런 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나에게 자기 소개를 요구해 왔다.

그것만으로도 진짜 존나 범상치 않은 인간인 건 확실한 거 같다. 이게 사춘기의 힘인가? 아니면 그냥 천재라는 인종은 죄다 이런 건가? 이래서 에카프 경은 그렇게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딸아이를 걱정했던 것인가?

수많은 의문이 치솟았지만 그보다도 더 치열하게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순식간에 형태를 갖춘 그것이 내면에 자리잡았을 때 난 깊은 탄식을 내뱉을 뻔 했다.

그것은 괘씸함이었다.

그렇다! 그녀의 자기 소개를 듣자마자 나는 유일한 대사를 빼앗긴 단역 조연마냥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히 엘드미아 에가를 앞에 두고 그런 자기 소개를 해?

결국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엘드미아 에가다!"

남의 집 손님 방 욕조 위에 서서 자기보다 머리 하나 작은 여자아이에게 경쟁심을 느끼며 당당하게 소리치는 이상한 놈이 있었다.

근데 그 놈이 나였다.

갑자기 괘씸함보다 자괴감이 더 높아지려는 순간, 소녀의 굵은 단무지 눈썹이 꿈틀거린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자색 눈동자에서 불꽃마냥 튀기는 격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나와 같은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아버님이 데려왔다는 손님이 너냐?"

"에카프 경의 딸이라는 게 너냐?"

뭔가...뭔가 일어나고 있다.

노린 것조차 아닌데 둘이 물어보고자 하는 것마저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불쾌감이 대폭 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 나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대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이 썩어가고 있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다.

""괘씸해!""

결국 기어이 마지막 외침마저도 똑같아진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렇기에 소녀도 깨달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필요 없다는 것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눈빛만 부딪치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오늘...하나의 태양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여긴 어디?

오가토르프 가문 응접실.

나는 누구?

떨어진 태양. 쭈구리 엘드미아 에가.

너무나도 행동의 유사점이 느껴서 갑자기 자존심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결국 열네 살 된 꼬맹이를 그딴 이유로 두들겨 팬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하녀들이 잔뜩 달려와 셰릴을 말리기 전까지 나는 오지게 두들겨 맞아야 했다. 그걸 열심히 막자,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겼다. 정말 머리카락이 다 뽑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온 에카프 경 덕에 상황은 가까스로 종결되었고, 우리는 곧장 응접실로 끌려와 버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둘 다 응접실에 끌려온 건 맞았으나 서서 혼나는 건 셰릴 뿐이었고 난 느긋하게 앉아서 부녀의 대화를 경청할 뿐이었다.

얻어 맞아주기만 한 나는 죄가 없으니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구나."

엿새 동안의 행군과 경계 속에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았던 에카프 경의 얼굴에 초췌함이 자리 잡으려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럴만하긴 해. 내가 데려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제안하고 그 제안을 받아 데려온 건데 그 애를 갑자기 딸내미가 뚜드려 팼다면 온갖 생각이 다 들긴 할 거야.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습니다."

놀랍게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셰릴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정도면 소름이 끼치는 걸 뛰어넘어 신묘하기 그지없을 수준으로 발상이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난 실제 연령 30살 초과라는 거고 쟨 14살이라는 점이겠지. 어쨌든 에카프가 골머리를 썩는 부분은 저런 과감함과 뜬구름 잡는 발상도 포함되는 거 같았다. 겉으로 티만 안 냈지, 그녀와 비슷한 발상을 했던 내 입장에서 추측해보자면 그냥 자존감이 좀 높은 게 아닐까 싶은데, 당장은 알 길이 없다.

"후우...대체 그 앞뒤 안 가리는 성격 좀 어떻게 안되겠느냐."

에카프 경의 깊은 한숨과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오그웬의 야영지에서 라그니스가 했던 말이 떠올라 셰릴과 같이 쭈구리가 되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사과마저 똑같아 또다시 서로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이 상황은 모면해야한다는 것 역시 알았기에 그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라 에카프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그냥 나까지 사과했다는 사실에 당황할 뿐이었다.

"하...응? 아니, 자네가 미안해 할 건 전혀 없지."

결국 반쯤 억지에 가까운 훈계 끝에 나에게 사과한 셰릴을 시작으로 에카프 경은 본격적으로 나를 가문 구성원들에게 소개했다. 당연히 모든 정상인들과 나는 별 다른 거부 반응 없이 밝게 인사를 마칠 수 있었고, 그건 에카프 경의 아내이자 안주인이신 라비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저 셰릴만 문제인 것이다. 놀랄만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성별과 외형만 다른 도플갱어 같은 것. 엥? 그러면 도플갱어가 아니게 되겠군.

아무튼 당장은 다른 게 더 중요하기에 참지만 곧 다시 한 번 태양 쟁탈전을 벌이고 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좀..."

지금은 일단 에카프 경을 설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의 옆에서 실 끊어진 인형마냥 가만히 앉아 날 노려보기만 하는 셰릴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난 말을 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에카프 경께 식객으로 신세를 지면서 배움까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를 사용인으로 고용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마음가짐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네만, 변경백의 은인이자 친구이기도 한 자네를 우리 가문의 사용인으로 고용한다는 건...음..."

나는 인사를 모두 마친 뒤, 잠깐 에카프 경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근로계약서를 쓰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그를 설득 하는 중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열성적인 자기 어필이다.

처음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에카프 경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거절하며 날 손님으로 대우함과 동시에 의식주 및 교육까지 신경 써 주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전폭적인 지지가 없더라도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지식과 밑바탕이 더 중요했다. 단순히 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물론 많지만, 지금이기에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더욱 많았다.

그런 부분에서 에카프 경의 저택은 새로운 일터로 아주 적격이었다. 귀족의 저택이다 보니 임금도 높은 편이고, 평민들이 귀족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역의 관점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내 인생 목표가 기사인 것도 아닌데 에카프 경이 제공하는 교육이라는 건 나같은 평민들에겐 하등 의미 없는 지식일 뿐이다.

안 그래도 나중에 떠돌이 모험가 생활을 하게 되면 여기서 배운 것들을 쓸 일이 드물텐데 일부러 주입식 교육마냥 불필요한 교육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 차라리 사용인으로서 일하며 예절과 관습같은 건 약식으로만 이해하고 일머리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상식을 익히는데 할애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뿐이랴? 나의 경우에는 가문 기사들의 훈련마저도 마음껏 참여할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종자부터 시작해서 수 년 이상 일을 해 와야 가능한 일이다.

훈련이 필요 없으면 일 할 수 있고 훈련이 필요할 땐 일에서 빠질 수 있다니! 너무나도 완벽한 신의 직장으로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이런 저택 아니면 평생 알 수 없는 것도 분명 많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려 '츠신'이 붙는 대가문이다. 말도 안되는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한평생 구경조차 했을지 의문일 정도로 급이 다른 귀족이다.

손님으로 지내기엔 곳곳에 배움의 기회가 넘친다.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난 절대 그 꼴을 방치할 수 없는 놈이었다.

"그렇게 부탁하면 정말 더 이상 거절하기도 그렇군. 알겠네. 대신 이 사항에 대해서는 변경백께 확실히 전달할 것이라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결국 에카프 경이 승낙했다. 결국 편함에 안주하지 않는 자세와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는 주제를 위주로 진심을 담아 시도한 연설이 먹혀 들어 간 것이다.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생각이 변하면 말해 주게."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복수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지 않는 이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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