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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1화 (31/412)

오가토르프 저택에 적응하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수월했다.

어쭙잖게 배려하거나 눈치를 보는 일 없도록 아예 라그니스와 연관되어 왔다는 부분을 삭제하고 소개한 게 컸다고 생각한다. 나름 재능이 있어 보이는 아이와 재수좋게 마주쳐서 어쩌다보니 데려왔다, 정도로 해결된 자기소개 후에 보여준 넘치는 성실함은 가문 사람들과 사용인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매우 열심히 부딪치게 되었던 셰릴을 제외하면 근면성실유능의 대명사 엘드미아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쌀쌀하군."

그렇게 에카프 경에게 고용된 지 1년 하고도 5개월 정도 지난 거 같다. 수도에 온 뒤로는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이맘때가 되면 아실리에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라 괜히 적적해진다.

분명 꽤 열심히 살았음에도 이번엔 그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 갔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변화라고 부를 만한 일은 많이 있다.

15살이 되며 키가 조금 더 커져서 이젠 정말 아무도 15살이라 믿어 주지 않을 지경이 되었으며, 근육도 더 붙고, 검술도 발전했다. 오러를 정제하는 방법을 익히고 이를 응용할 수 있게 되어 마력을 더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는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꾸준히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아실리에에게도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래 길러 온 말이 슬슬 죽을 때가 된 거 같다는 이야기, 머리를 좀 짧게 잘라봤다는 이야기, 알리샤의 끈질긴 요구 끝에 지금은 알리샤의 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가끔씩 오두막을 점검하러 간다는 이야기 등등.

8살부터 함께 해 온 말이 슬슬 오늘 내일 한다는 걸 제외하면 하나같이 좋은 이야기뿐이라서 안심할 수 있었다.

마왕군과의 전쟁이 7년째인데 나쁜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 삶의 터전을 작살낸 놈이 아직 죽지 않은 거 같다는 게 가장 다행이었다.

"엘드미아!"

멀리서 어렴풋하게 들리는, 이제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셰릴의 외침이 순식간에 의식을 깨웠다. 절대 두 번 부르지 않는 그녀의 외침에는 말로 반응하기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나는 준비해 놨던 가죽 건틀릿과 연습용 장검을 들고 뛰어갔다.

가문의 종자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서 셰릴이 있는 정원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전력으로 뛰어서 30초나 걸렸을까? 2월임에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소녀에게 다가가 나름 정중하게 들고 있던 건틀릿과 장검을 건넸다.

"받아."

잘 관리된 백금발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승마복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오가토르프 가문의 장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가주 에카프와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인다.

나는 그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세를 유지했다. 원래 사용인인 입장이라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까지 꿇은 채 받드는 것이 예의였지만, 그녀는 예외였다.

시선을 피하면 귓방망이를 후려 치고 무릎을 꿇으면 안면에 니킥을 갈긴다. 이유는 씨발 나도 모르겠다. 딴 놈들은 안 때리면서 나만 때린다.

첫 대면으로부터 1년이 넘게 흘렀음에도 이 괘씸한 꼬맹이는 한결같은 괴팍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건 절대 사춘기 같은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타고난 거지.

짧게는 3초에서 길게는 10초까지. 가끔 얘가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체불명의 아이컨텍을 시전하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하며 애 얼굴이나 찬찬히 뜯어보는 시간으로 여기고 있다.

음. 오늘은 붉은색 아이라인이 평소보다 더 잘 먹은 거 같구나.

볼 때마다 생각한다. 셰릴은 귀엽다.

귀엽지 않았으면 애저녁에 볼기짝에 불이 나도록 맞았을 테니까.

아직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얘는 대충이라도 귀여워야 할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괴짜 셰릴 츠신 오가토르프는 그렇게 수 초 정도 눈을 마주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검과 건틀릿을 받아들었다. 저 정체불명의 행동이 이제는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자리 잡아."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자질구레한 대답을 정말 싫어한다. 그랬기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건틀릿을 끼고 장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짧은 정적 후, 아무런 신호도 없이 셰릴이 앞으로 튕겨 나오며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그게 신호다. 날 없는 가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정원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전속 집사로 일한 1년간 이어지고 있는 아침 일과였다.

처음엔 이런 요상한 직책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보고 시간이 있을 땐 열심히 운동하며 내 할 일을 다 할 뿐인 사용인이었다.

당연히 일은 잘했다. 예법을 제외한 업무적인 측면의 모든 것들은 결국 상식과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었고,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나는 남들이 세 번 듣고 이해할 걸 한 번이면 이해할 정도는 됐다.

삽으로 평탄화를 하라고 지시 받으면 평탄화가 대체 뭔 뜻인지 고민하는 꼬마 애들 옆에 있는 말년 병장인 격이다. 당연히 진짜 완전히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업무는 존재하지 않았고, 난 순식간에 이해가 빠른 아이, 암산도 가능한 똑똑한 아이 정도의 취급을 받으며 온갖 업무에서 달갑지 않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유지되던 균형이 그렇게 세 달도 체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제안 받은 대련에서 이긴 뒤로 급격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엄연히 수습 기사 과정을 거치고 있는 친구였다. 자기보다 4살이나 어린애를 상대하는 거로 심각하게 방심하고 있던 친구이기도 했으며, 가주가 직접 대련을 시킨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 이해 못 할 정도로 눈치가 없거나 머리가 좀 안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 따져 보니 안타까운 친구였지만 봐줄 생각까지는 안 들어서 그냥 한 방에 턱을 후려 기절시키는 거로 이겼다.

이미 내 실력을 애저녁에 알고 있던 에카프가 굳이 뒤늦게 이런 연극을 펼친 이유를 뒤늦게 이해해 버렸지만, 이미 오가토르프 가문의 소가주 전속 집사가 된 뒤였다.

그때 그 수습 기사 친구와 비슷한 공격을 해서 지금 나에게 역공 당한 셰릴을 보고 있자 하니 문득 떠오른 추억이다.

"말해."

두서 없는 아가씨지만 지난 세월 덕에 나는 셰릴 한정으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듣는 스킬이 생겼다.

이건 자신이 뭘 잘못해서 이렇게 한 방에 역공을 당한건지 모르겠으니 내 입으로 말하라는 의미다.

"사람은 마나를 잘 두르지 않은 이상 검에 베이면 죽거나 다친단다."

셰릴은 영리하다. 상대방의 입에서 당연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당연함을 꼬집어 반박하려 들지 않고 일단 끝까지 들을 줄 아는 침착함을 겸비하고 있다. 이제 겨우 15살인데도 받은 교육의 차이인건지 내 머릿속에 흔히 떠오르는 또래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 15살인 애한테 이러면 죽네 저러면 죽네 하는 이야기를 해야하는 꼴이 골때리긴 한데 세상이 그런 세상인 탓이라 생각하며 넘어갔다.

"근데 베인 상처가 쌓이고 쌓여 피를 너무 많이 흘려도 죽어."

"...내가 너무 큰 공격만 노려?"

이야기를 듣고 비교해서 정리하는 것도 잘한다. 똑똑하긴.

"바로 그거지. 연습도 실전이라 생각하기에 상대방을 죽일 기세로 전력을 다하는 건 좋지만 그게 너무 알기 쉬운 방법이라서 효과가 별로야."

자세를 풀고 다시 견제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단번에 알아들은 셰릴이 이번엔 찌르기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예 상대방을 꿰뚫을 목적으로 한 보 이상 깊게 들어왔기에, 옆으로 가볍게 튕겨 흘리며 칼날을 쥔 채 크로스 가드로 셰릴의 이마를 노리고 휘둘렀다. 뚝. 하고 거의 코앞에서 멈췄음에도 셰릴은 눈을 감지 않는다. 정확히 자신의 왼쪽 단무지 눈썹 언저리에 있는 크로스 가드 끝자락에 시선이 가 있다.

이게 진짜 재능인가보다. 쟤도 사실 전생이나 환생한 게 아닐까?

"손에 쥔 검이 무기인거지 검날만 무기인 건 아니라고 하더라."

"왜 '하더라'야?"

"나도 그렇게 주워 들은 거니까?"

환생을 했어도 난 재능충이 아니다.

8살 때 고향을 잃고, 14살 때 비룡기사(추측)을 하늘에서 베어 죽이고, 왕국의 유명한 기사와 연이 닿아 복수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련을 거듭한다는 기가 막히게 개 쩌는 루트를 걷고 있을지언정, 그저 정신머리가 남들보다 좀 앞서 나가있을 뿐이다.

잘난 듯이 남을 가르칠 실력 따윈 없다. 대부분은 남의 지식이니까.

"왜 난 못 주워 듣는데."

셰릴의 왼쪽 단무지에 씰룩하고 경련이 일어났다. 아, 이거 이유는 몰라도 삐지기 일보 직전이다.

"넌 임마 바쁜 데다가 아카데미까지 가잖아. 선생들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다 고만고만한 또래들인데 걔들이 뭘 알겠냐."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단순 검술만 놓고 봤을 때 오가토르프 가문은 왕립 아카데미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하지는 않다. 그저 다양한 학문을 익히고 그 외의 것들을 체험하고 익힐 수 있다는 게 엄청난 메리트다 보니 아카데미가 우위에 있을 뿐이다.

내 대답에 어느 정도 납득한 셰릴이 불만을 가라앉힌 뒤로도 대련은 1시간 동안 짧은 휴식을 두며 계속 이어졌다.

쉽지 않은 일인데도 셰릴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아주 조금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저건 혈통의 힘인 걸까 조기교육의 힘인 걸까 고민해보며 새벽 추위가 무색할 정도로 땀을 흘린 셰릴을 목욕 시중 드는 메이드들에게 맡긴 뒤 나도 종자 숙소로 돌아와 씻고 환복을 준비했다.

볼 때마다 부담스러운 집사복과 회중시계를 갖추고 업무용 향수를 뿌린 뒤 롱소드와 벨트까지 찬 나는 서둘러 본관까지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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