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속 집사라는 거창한 호칭을 달고 옷까지 갖춰 입었다 한들 특별할 건 없다.
새벽에 일어나 셰릴의 대련 상대를 해주고,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하녀들과 함께 방을 정리하며, 그날의 일정에 맞춰 필요한 물품같은 걸 챙겨 미리 마차에 싣는 등의 준비를 하는 게 고작이다. 좀 더 귀찮은 일이라고 해봤자 그녀가 연회에 참가하면 붙어다니며 귀족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미리 알려주거나 기억해주는 생체 메모장 역할을 하는 것이 있겠다.
원래대로라면 오가토르프 가문의 명성이 있다 보니 꽤나 바쁜 위치였겠지만, 셰릴은 달랐다.
"오늘은 의뢰를 받으러 갈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야. 기껏 향수까지 뿌렸는데 그럴거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러라고 일부러 말 안한거야."
사람 놀려먹는 데 점점 능숙해지는 셰릴을 바라보며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일주일 중 6일을 사용인 대동 금지의 영역인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그녀였기에 난 사실 업무다운 업무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간단한 정리 몇 가지만 하고나면 하루 대부분을 기사들과의 훈련으로 보내는 게 일과였다. 그나마 강의가 비는 날이 생겨야 기껏 외출을 하는 셰릴을 따라다니게 되는데, 셰릴은 그마저도 놀러가거나 쇼핑을 하려고 나가는 게 아니라 모험가 길드의 의뢰를 받으러 간다. 하필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나보다.
괘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괘씸한 것은 무려 이 괘씸함의 화신과도 같은 셰릴이 청靑급 모험가였다는 사실이다.
처음 들었을 땐 그래봤자 6번째 등급인 녹綠급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한 단계가 더 높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말이 한 단계지, 실질적으로 한 사람의 모험가로서 제대로 인정받는 건 청급부터 시작이라고 할 정도로 녹과 청은 보는 시선이 다르다. 청급 아래의 세 가지 등급은 그냥 사람 취급 해주기 힘든 녀석들을 걸러내기 위한 3중 필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한 가문의 차기 가주인 꼬마애가 혼자 뽈뽈뽈 나가 몬스터를 잡고 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고 호위조차 안 붙인다는 건 좀 많이 신기했지만 몇 번 다니다보니 알게 모르게 숨어서 지켜보는 기사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절 아무런 도움도 안 주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납치 및 암살을 시도하는 수준의 문제가 되어야 도와주는 듯 싶다.
물론 이건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의뢰에 동행할 것을 요구했으니까.
당연히 이제 막 모험가가 되어 아무런 색도 칠해지지 않은 철제 등급표를 딸랑거리는 신입이 청급 의뢰를 같이 다닐 수는 없다. 덕분에 셰릴의 보좌라는 합법적인 사유를 핑계 삼아 평일 아무 때나 모험가 길드로 가서 닥치는대로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넘는 세월 동안 정말 열심히 활동한 결과가 내 목에 걸려있는 녹급 등급표였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처음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의문 중 하나인 '수도의 모험가 길드에는 대체 무슨 의뢰가 있고 어떻게 유지 될 수 있나'가 해결된 것도 이때였다.
수도에 위치한 모험가 길드 퇴치 의뢰는 단순하다. 엄청 쉽거나. 엄청 어렵거나. 말 그대로 중간이 없다.
어려운 의뢰는 내용만 봐도 이게 소설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가는 수준이다. 무슨 무슨 산맥에서 만티코어가 나타나서 도시를 습격하는 중이다, 막 어디에서는 상급 악마가 소환되서 작살이 났다더라 하는 의뢰가 하루가 멀다하고 붙었다가 사라진다. 마왕군만 문제인 게 아닌 세계였다는 걸 이때 처음 피부로 깨달았다.
그에 비해 쉬운 의뢰는 정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석적인 의뢰였다. 인근 마을에 나타난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지하 수로에 발생한 몬스터 퇴치. 최근 수가 늘어난 것으로 판명되는 위험도 낮은 몬스터 무리의 사냥 등등. 이런 수준보다 난이도가 오른다 싶으면 하나같이 수도에서 거리가 멀어진다. 그야말로 저레벨 사냥터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실전 체험을 위한 방목형 테마파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형태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나름 재력은 있으면서 안전하게 실력을 쌓고 싶은 이들은 수도 모험가 길드에서부터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대상이 고객이니, 길드 입장에서는 돈을 못 벌 수가 없다. 소모성 상품들을 아예 길드 내부에서 판매하는 모습을 보니 꽤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죽 갑옷을 걸쳐 입고, 외투를 비롯해 처음 오그웬을 떠났을 때 챙겼던 침낭같은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비슷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셰릴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나보다는 좀 더 가벼운 경량화 처리된 가죽 갑옷과 그리브를 입고, 철제 건틀릿을 롱소드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모험가였다.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를 염두한 것인지 몇 달 전까지는 걸치지 않던 숏 케이프까지 걸치고 있었다.
"오늘은 좀 멀리 간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뭐 얼마나 멀리 가려고?"
"서쪽 와인 농장 인근에 있던 폐허에 도적들이 모이는 정황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움직이기 편하게 긴 머리카락을 뒤로 올려묶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셰릴이었지만, 난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네가 말하는 서쪽 와인 농장이 내가 아는 그곳이 맞다면 오고 가는 데만 하루가 걸릴 텐데?"
"거기 맞아."
"아니, 너 아카데미는 어쩌고?"
"말 안했던가? 방학이라고."
전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작년 이맘때인 10월 초 무렵에도 가을 방학이라며 일주일 정도 쉬었던 기억이 있었다. 세상에 가을 방학이라니! 현대 문명을 살았던 나조차 체험 해보지 못한 축제를 이 괘씸한 것이 만끽할 수 있다니 배가 아파올 지경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카데미는 너무 날로 먹는 거 같다. 방학이라니.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교육시켜달라고 항의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딴 항의를 넣는 순간 사용인 대동을 허가해달라는 탄원서도 같이 올라 갈 거다."
"너 공부 잘하잖아. 365일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막 짜릿하지 않아?"
셰릴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내 옆구리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그렇게 이제는 익숙해진 시덥잖은 헛소리나 던지며 우리는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배웅 속에서 저택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나온 거리는 북적거렸지만 평소에도 귀족이 아닌 방문자들이 오고 갈 때 쓰이는 문이었기에 모험가 차림의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까 네가 말한대로라면 토벌 의뢰나 정찰 의뢰 아니냐?"
"토벌."
"괜찮은 경험이 되겠군."
"괘씸하긴."
쟤 입에서 나에 대해 괘씸하다는 평가가 나왔다는 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소리다. 괘씸하기 그지없는 녀석 같으니.
내가 그래도 전생까지 포함한 나이가 있는데 겨우 15살 짜리가 나랑 사고방식이 비슷하게 굴러간다는 건 엄청 괘씸한 게 맞다.
◈
한참을 걸어 도착한 모험가 길드는 아침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평일 이 시간대에 길드에 오는 건 나에겐 낯선 경험이었기에 그 인파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수도에 이렇게나 모험가가 많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심지어 셰릴마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얘가 짬밥이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는 건, 뭔가 다른 일이 생겼다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네가 보기에도 그런거면 뭐 일 터진 거 아닐까?"
"글쎄. 분위기만 놓고보면 심각한 일은 아닌거 같으니 상관없을지도."
하긴 그냥 시끌벅적한 것에 가깝지 심각한 분위기가 맴돌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별 문제 없을 테니 우리는 개의치 않기로 하고 의뢰들이 붙어있는 거대한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의뢰들이 게시판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길드 접수원들이 붙여서 가지런한 의뢰서부터, 누군가 떼었다 붙였다하는 바람에 삐뚤거리고 지저분해진 의뢰서까지 산더미라서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사람까지 붐비다보니 게시판 앞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읏!"
그리고 그 뒤에서, 어떻게든 발 뒷꿈치를 들어 게시판을 확인하고자하는 165가 조금 넘는 키의 셰릴이 전력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너무 즐거운 광경이다!
저 깡충거리는 백금발 토끼를 봐라! 자기보다 15센티는 더 크고 덩치있는 나에게 부탁하면 될 걸 드높은 자존심과 행동력으로 인해 자진해서 지옥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품위를 지키겠답시고 자신을 밀치는 사람에게 역정도 못 내고 단무지 눈썹이나 꿈틀거리는 모습을! 폴짝 폴짝 뛰는 엉덩이로 다가가는 털복숭이의 손...어? 뭐?
순간 유쾌했던 기분이 팍 식어버리면서 성큼성큼 다가가 왼손으로는 셰릴을 당기고 오른손으로는 애 엉덩이에 손을 데려던 치한의 손모가지를 잡아 뒤로 내팽겨쳤다.
-쿠당탕!
나이는 짐작도 안된다. 20대 중반? 서른? 수염도 있고 피부도 상해서 모험가들의 나이를 짐작하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저분한 신발과 달리 딱히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은 장비들과 그다지 상한 데 없이 세월의 흔적만 느껴지는 가죽 흉갑등을 봤을 때 대수롭지는 않은 놈이 분명했다. 녀석이 쓰러지며 의자에 부딪치는 소리가 좀 컸던 탓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좀 쏠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뭐하는 새끼야?!"
"씨발? 뭐하는 새끼? 그 말이 왜 네 입에서 나와?"
냅다 바닥에 꽂아버리면 알아서 도망치거나 우물쭈물할 줄 알았더니 역정을 내며 눈알을 부라리는 꼴에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