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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4화 (34/412)

인원 관리 담당자를 만나 마차를 배정받고나니 출발까지 거의 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늘 내일 안에 결착을 낼 문제가 아닌가보군."

보통 인근에서 발생한 토벌 의뢰는 새벽부터 출발해 오전 안에 도착해서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한 나라의 수도 인근인 만큼 치안이 안정적이지 못 하다는 걸 마냥 두고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 탓이다. 거의 11시가 다 되어 출발한다는 것부터 매우 보기 드문 형태였다.

"이건 촉이 온다. 도착하고나면 입은 내가 털테니까 넌 나랑 무조건 같이 다니자."

"입을 턴다...?"

"공적인 대화는 내가 그럴싸하게 주도하겠다고. 의뢰서에서 좀 두리뭉실하게 적혀있는 내용들도 그렇고, 평소에 못 보던 놈들이 길드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지금 여기도 한 반절은 분위기가 다른 모험가들이 와 있잖아? 아무래도 제대로 파악 못한 게 있는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흐음.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이 똑똑한 계집애는 욱해서 잘못 판단하는 꼴을 안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내가 왜 의혹을 느끼고 있는지 설명조차 안 했는데도 이미 내가 의문을 제시함과 동시에 평소 자신이 해오던 사고방식을 보류하고 다방면으로 짱구를 굴리면서 자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천재가 영재교육을 받으면 이렇게 되는건가?

"그래도 이렇게 집단으로 움직일 때 실수하는 게 낫지. 나중에 가봐야 아는거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셰릴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나보다 오래 모험가 일을 해왔음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직도 밑바닥 인간들의 기 싸움과 불공정 협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새삼 이해할 필요도 없긴 하다. 아마 앞으로 평생 이해하지 못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아무튼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애로사항을 말로 해결해야 할 때는 내가 나서는 편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숙이고 들어가면 이용 해먹으려는 것들이 8할 이상인 밑바닥 언저리인 것이다.

혹여라도 실수가 없도록 계약서를 다시 훑어봤지만, 도적 토벌 임무를 진행함에 있어 구체적인 명령 체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런 경우 도망만 안 치면 알아서 하는 게 보통인 만큼 나와 셰릴이 붙어다녀도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의뢰 보수는 기본급에 죽인 적에 따라 추가금이 오는 형태라서 상황을 보기 위해 조금 소극적으로 있어도 같은 모험가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미리 쫄 필요는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동감이야."

마지막으로 서로의 장비를 점검하고 간단한 비상식을 구매하고 나서야 인원점검을 마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쌀쌀하긴 했지만 오랜만의 장거리 이동이다보니 흘러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진 않은 이동길이었다. 음. 이러고 있으니 두돈반을 타고 이동하던 군 복무의 악몽이 떠오르는군. 고문관 하나 때문에 고생했던 좋지 않은 기억이다.

순간 불안이 엄습해서 같은 마차에 타고 있는 모험가들을 훑어봤지만 딱히 존재가 오히려 방해일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은 듯 했다. 물론 그런 놈들은 언제나 멀쩡 해 보이는 외견을 가지고 뒤늦게 사람을 엿 먹이기 마련이니 방심할 수는 없다.

"형씨. 엘드미아 에가라고 했던가?"

"응?"

셰릴도 쪽잠에 빠져 들어서 할 일이 없어진 탓에 멍 때리고 있던 와중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사내가 험악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며 말을 걸었다. 뭐 시비라도 거나 싶어서 고개를 기울이려는데 금방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권한다.

"아까 길드에서 봤었거든. 난 가룬이라고 해. 수도 출신인가?"

"오그웬 출신인데, 수도에 1년 좀 넘게 있었지."

웃으며 인사할 줄 아는 참된 문명인이었군. 인상을 쓰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그런 얼굴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까 그 당텔 패거리들 때문에 알려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지."

"그 졸렬한 성범죄자 새끼?"

"크흐흐. 그래. 그 새끼. 원래 나랑 같은 만델리 항구에서 움직이던 녀석이라서 꼴 같지 않은 걸 좀 자주 봤지."

"이거 운을 띄우는 걸 보아하니 상습범이구만?"

"예리한 형씨였구만."

내 정신연령과 비슷할 법한 연배의 얼굴에게 자꾸 형씨 소리 듣는 것도 어색한 일이지만, 외견만 놓고보면 동안인 20대 정도 여겨질 수준의 덩치를 지닌 내 탓이겠지. 항구 출신이라는 거보면 고된 일로 좀 일찍 삭았을 수도 있는 거고.

아무튼 친절한 가룬씨의 설명을 들어보니 아주 질이 나쁜 새끼였다. 만델리 항 인근에서는 여자만 보면 달라붙는 거로 유명해서 일부 도시에서는 아예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정도였다는 거 보면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놈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듣다보니 생각보다 그 쪽에서 수도로 올라온 이들이 꽤 된다는 뉘앙스여서 어느 정도 뒷담이 끝나자마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룬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쪽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거야? 들어보니 꽤 많이들 올라온 거 같은데, 흔한 일은 아니잖아?"

"응? 의외로 밖에 정보에 어둡구만 형씨. 마왕군이야 마왕군. 놈들이 항구를 개작살을 내놨지."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해주는 가룬과 달리 난 두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렸다.

"뭐, 형씨도 모험가 일을 하는 이상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서도...지난 7년 간 이어지던 전선이 결국 삐끗한거지. 듣기로는 별동대에 가까운 것들이 전선을 뚫고 들어왔다는 거 같았는데...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더 이상 항구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어."

어찌저찌 잘 버틴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마왕군의 위협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나보다.

가는 동안 할 것도 없다는 이유로 가룬은 내 질문에 꽤나 열심히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씁쓸하고 처참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선 인근의 도시에서는 가끔 씩 들려오는 승전보를 제외하면 항상 피폐하게 유지되는 전선 혹은 패배의 이야기밖에 들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가끔의 승리가 굉장히 크게 먹고 들어간 덕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에 가까운거지, 술집에 앉아 이야기만 주워듣다보면 대체 어떻게 왕국이 버티고 있는건지 이해가 안 될 수준이라며 가룬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별의 별 놈들이 다 나타나고 있어. 혼자서 마왕군 중대 하나를 초토화 시킨 검사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던가, 악마를 죽이기 위해 사용한 범위 마법에 잠복하고 있던 마왕군이 같이 쓸려나간 웃긴 이야기라던가. 덕분에 심심하진 않다는 게 몇 안되는 장점이겠군."

"그 외엔 다 단점으로 들리는 이야기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장점 아니겠어? 그러다보니 평범한 내 입장에서는 좀 오래 살고 싶어서 수도로 온 건데, 여긴 분위기가 딴 판이긴 하더라. 크흐흐 이 토벌 의뢰를 보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지만 말이지."

확실히 그도 모험가 짬밥이 있는 만큼 이번 의뢰가 일반적인 형태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나보다.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정보를 공유해준 가룬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내리더니 가벼운 인사와 함께 쿨하게 떠나버렸다.

"나중에 다 죽이고 또 보자고."

진짜 존나 쿨해서 험상궂게 보이던 얼굴이 개 상남자의 얼굴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야기도 나눈 마당에 같이 움직이자는 제안을 할 법도 한데 저러는 거 보면 꽤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긴거랑 다르게 유쾌한 사람이었네."

"와씨 깜짝이야!"

어깨에 머리 얹고 꼼짝도 안하고 자길래 영락없이 계속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셰릴은 가룬이 떠나자마자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기지개를 켰다.

"깼으면 좀 일어나지 그랬냐. 꼼짝도 못해서 삭신이 다 쑤셨는데."

"덕분에 잘 잤어."

전혀 원했던 대답이 아니지만 더 말해봤자 소용 없을 것이 뻔했기에 나도 그냥 기지개를 키고 일어나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확실히 이번 의뢰 좀 이상하긴하네."

"그러게. 대놓고 마을에서 내려버리네."

눈에 안 띄는 숲 속 인근부터 내려 포위하며 들어갈 줄 알았는데, 마차는 와인 농장에서 멈췄다. 숲 속 폐허라는 곳이 땅 속에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우리의 도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뭐 다른 건 더 없나 싶어 시선을 돌리던 내 시야 끝자락에 정말 조금도 달갑지 않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씨발."

"왜?"

"저거 봐라. 숙영지인데?"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셰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모험가를 칼받이로 쓰려는 속셈인걸까?"

셰릴이 물었지만 나도 확신을 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당장은 알 수가 없겠는데."

수도 인근에 위치한 와인 농장이니 당연히 귀족 정도는 되는 사람이 주인일거라고 생각은 했다. 2차까지 이어진 토벌 의뢰인 이상, 개인 사병으로는 어떻게 처리가 안될 수준일 거라고도 예상은 했다. 하지만 저렇게 전쟁이라도 하는 것마냥 숙영지를 꾸리고 준비하고 있을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가 진짜 도적이 맞긴 한건가?

"숙영지 배치를 보면...숲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구성된 거 같은데."

기사단장의 장녀다운 분석을 내놓은 셰릴의 두 눈이 의구심으로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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