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하면 격정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셰릴의 분노를 달래며 냉정히 상황을 파악해본다.
승산? 고민할 가치도 없지. 셰릴은 오가토르프다. 오는 동안 죽인 놈들 정도의 실력이라면 10명이 동시에 완벽하게 합을 맞춰 공격하거나 그녀가 오러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검 한 번 섞을 때마다 목이 잘려나갈 거라고 호언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확실하다.
왕립 아카데미 수석은 딱지치기로 따낸 게 아닌 것이다. 설령 그게 딱지치기였다 한들 그 딱지에 맞는 것만으로도 놈들이 행동 불능이 될 것이라는 건 일말의 편견도 섞이지 않은 덤덤한 진실에 불과하다.
"비록 아직 진상이 완전히 규명된 게 아니라지만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즉결 처형감이군."
심지어 그녀는 다른 귀족 자제들처럼 온실 속 검사도 아니다. 내 눈에는 한참 어릴 뿐이지만 이미 언제든지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된 전사였다.
그런 그녀 혼자만 있어도 폐허에 모여있는 놈들은 몰라도 숲에 포진되어있는 놈들 정도는 죄다 도륙을 낼 수 있다.
거기에 마왕군 지휘관을 죽이기 위해 어릴 적부터 터무니없는 단련을 해 온 엘드미아 에가가 함께 한다? 안전빵이랍시고 수준 낮은 모험가만 노리던 놈들에겐 죽음뿐이지.
괘씸해도 이심전심에 가깝게 합이 잘맞는 우리는 그 정도 실력이 된다.
"다 죽여버리면 되니까 시답잖은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셰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냉정하게 내린 판단을 입에 담자 그녀도 순식간에 화를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우리들은 놈들을 도적으로 알고 왔다. 죄다 죽여서 파바뭐시기라는 놈 앞에 머리통을 던져놓는 것만으로도 사실 성과는 충분하다. 나머지는 길드에, 정 안되면 에카프 경이라는 인맥을 동원해 씨를 말려버리면 된다.
괜히 사탄새끼도 울고갈 놈의 행보에 눈이 돌아가서 평정심을 흐트릴 이유는 없다.
그것을 이해했기에 지극히 침착해진 단무지, 아니 셰릴이 입을 열었다.
"숲에 있는 놈들부터 죽일까?"
"걔들은 나중에. 나만하더라도 활 쏘던 놈들부터 시작해서 아홉 정도 죽이면서 들어왔으니까. 네가 죽인 놈들까지 합치면 실상 지휘부를 작살낸 뒤에 상대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죽인 놈들 중에 연락병 같은 게 섞여있을 경우 지휘부가 이변을 눈치챌 가능성이 있지."
뭐든 일단 대가리를 치고 시작하면 일이 쉬워지는 법이지.
"이대로 달려가서 지휘부부터 다 죽이고 시작한다. 잘 따라와."
◈
지극히 침착하고 아무런 주저없이 엘드미아는 선언한다.
이 상황에서 어떤 죽음의 위기도 느끼지 못 한다는 확신과 함께 움직이는 이 인간은 아침 대련과같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거나, 적의 능력을 오판해서 나오는 그릇된 자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아홉 명.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 숫자. 듣자마자 순간 표정이 바뀔 뻔한 것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분명 처음 숲 외곽에 있던 궁병들은 어렵지 않았다. 궁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검을 뽑아들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당황했고, 주변에 있던 이들은 반응을 했어도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만난 3인조들은 달랐다.
장기전을 생각하고 아무리 오러를 절제했다고는 하나, 기습으로 죽인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반응 속도와 판단력부터 달랐다. 마지막 한 녀석을 상대할 때는 3합까지 검을 맞대고 나서야 베어 죽일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조차 이런 기습이면 내 검을 받아낸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놈들은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인원을 척후로 쓸 정도의 여력은 되었던 거다.
"그런 거 치고 검이 꽤 깨끗하네?"
"놈들 거 뺏어서 던져 죽이면서 왔거든. 너도 기억해두면 좋을거야. 우리 손에 들린 게 결국 한낱 날붙이라는 걸 잊으면 한순간에 골로 가는 거라더라고. 상황을 알 수 없으면 자기 무기는 최상의 상태를 온전하는 게 좋대."
분명 그 이야기는 나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릴 적 우연한 계기로 아버지가 잠시 모셔왔던 고명한 소드 댄서에게 들었던 이야기였고, 그게 이런 식으로 응용될 거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뭐 나중에 검에 막 불 붙일 수 있거나 엄청난 명검을 손에 넣어서 피나 기름 따위 신경 안 쓰게 되면 몰라도 당장은 그렇지 않으니까."
상황에 맞지 않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엘드미아는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헝클어트렸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에게 조언을 해주는 오라비 같은 미소와 어조가 괘씸하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그랬다.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신을 압도하고, 그러면서도 과시하지 않으며, 말로는 두 개의 태양은 필요없다고 하면서도 항상 두드려맞을 때는 욕이나 내뱉으며 반격조차 안하는 그 모습을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엘드미아라는 남자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았다.
그간 정제된 힘과 검술을 제외하면 이미 오래전에 엘드미아라는 사람은 완성되어 있었다는 듯이 항상 머리 위에 있다.
가끔 경박한건지 진중한건지 알 수 없는 기행을 펼치면서도 한결같이 내 앞에서 마치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것마냥 가르침을 준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조차 일부는 나의 천재성을 언급할 때마다 질투의 불씨가 타오르는데, 어떻게 천재도 아닌 네가 내 앞에 서서...보다 연장자인 이들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관대함과 애정으로 나를 대할 수 있는 걸까.
"야. 고민은 나중에 하고 가자. 뒤는 맡긴다."
1년 간 고민해 온 문제의 답이 갑자기 나올 리 없다. 그랬기에 나는 언제나처럼 엘드미아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괘씸하다."
"아오, 진짜 이 조막만한 게 때릴데도 없어가지고는."
가벼운 투덜거림을 신호로 그가 뛰쳐나갔다.
충분히 예상하고 오러를 끌어올렸음에도 순간 가속에서 살짝 뒤쳐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마치 더이상 잡을 수 없는 곳까지 달려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최대한 바짝 쫓기위해 힘썼다. 겨우 수 초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멀었던 거리가 단 번에 좁혀지며 적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까지 가까워진다.
바람이 귀를 잘라낼 기세로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사라지고, 수풀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엘드미아는 분명 한 번 더 가속할 것이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조차 능숙하게 응용하기 힘든 기교를 마치 당연한 것인냥 부리며 경계 중인 놈들 중 가장 빠르게 반응한 한 놈만 베고 지나갈 것이다.
나라면 뒤따라오는 나를 믿고 그리할 것이니까.
"비, 비사...?!"
-촤아악!
예상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간격에서 깔끔하게 호를 그리며 날아든 엘드미아의 검이, 소리에 반응하고 고함을 치려던 병사의 목을 절반 정도 베어버리면서 지나갔다. 반응이 느렸던 적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씨발!"
"모험가다! 척후가 뚫렸어!"
"비상! 비이이익?!"
바로 뒤따라가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의 복부를 베어 넘기고 다시 달리는 짧은 순간에 엘드미아는 이미 목표로 삼은 경로에 있는 적 둘을 더 베고 나아갔다. 긴장과 오러로 인해 최대치까지 예민해진 신경으로도 겨우 쫓을 만큼 빠른 속도로 놈들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달려드는 그가 어김없이 외친다.
"나는!"
첫 만남 때, 마치 자신과 같은 태도로 입에 담은 그 외침이 얼마나 괘씸했던가.
"저 새끼 오러 쓴다아악!"
"크억!"
다시 한 번 검이 휘둘러지고, 길을 가로 막으려던 둘이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한 명은 명백히 검의 간격보다 한 뼘 정도 멀리 있었을 텐데도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깊게 베인 경동맥을 부여잡은 채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의 외침에 반응하며 움직이는 수 많은 시선들이 마치 지시를 바라는 것처럼 혹은 누군가를 지키려는 것처럼 한곳으로 모이는 순간을 엘드미아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엘드미아!"
그 당돌한 모습에, 자신과 대등할지도 모르는 동갑내기를 처음으로 만났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휘둘렀다. 생각해보면 더 때려놔야했다.
저렇게 괘씸하게 홀로 앞장 서는 인물일 줄 알았으면 그래도 부족했다.
"씨발 막아! 막으라고!"
"저딴 새끼가 대체 왜...!"
그저 크게 주변을 휘두르는 것 같아 보이는 무심한 동작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의 손목과 목을 일격에 훑고 지나간다. 흩날리는 핏줄기마저 아름답게 만들 정도로 세련된 검로가 마치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것만 같아, 어떻게든 그 뒤를 바짝 쫓으며 그에게 신경이 쏠린 다른 놈들을 베어 넘긴다.
하지만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는 그의 검을 따라할 수는 없다.
"에가다!"
평범한 이가 저렇게까지 단련하는 데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오러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기술이라는 건 결국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철저한 단련 끝에 몸에 새겨지는거니까.
그렇기에 알 수 있다.
검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어린 시절의 엘드미아가, 검술조차 아닌 단순하기 그지없는 '무언가를 벤다는 동작'만이라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이.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검을 휘두르며 단련한 끝에 얻은 궤적이 바로 저것임을.
그게 단순히 어릴 적부터 검을 휘둘렀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기사 가문을 이어갈 자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오러 사용자가?!"
"개짓거리를 했으면 죽음을 앞에 두고 내가 왜 그랬을까나 후회해라 이 새끼야!!"
"으, 으아아악!"
비록 종종 튀어나오는 격 떨어지는 발언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자기과시가 가끔씩 거슬리긴 했지만, 제대로 된 검술까지 익히게 되어 날뛰는 그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