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드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한창 저녁이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구체적인 보상은 일주일 안에 전달될 터이니 그때 방문해달라는 말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일반적인 저녁 시간도 한 시간 정도 넘겨버렸지만 초콜릿 좀 주워먹었다고 배가 고프진 않다. 사실 이 나이 때 이렇게 활동적으로 움직이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거 같은데 말이지.
"오늘은 꽤나 늦어버렸군. 아버님께 혼날지도."
기지개를 키면서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셰릴의 걸음에는 일말의 주저도, 미련도 없었다.
셰릴은 엔그림의 의뢰를 거절했다.
왜 거절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기에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예 모든 정보가 비공개인 탓에 아직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왜 거절했는지 안 물어보는군."
근데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마냥 갑작스럽게 셰릴이 물었다. 이미 모험가 셰릴은 진즉에 장사 접고 귀족 셰릴로 돌아온 탓인지 말에서부터 살짝 고압적인 태도가 묻어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습이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보다 정말 가끔씩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파고 들어오는 게 더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내가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나?"
"아니 난 당연히 네가 의뢰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의 경중을 물어보는 것부터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심각한 일이면 무조건 받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가 거절하고 나서야 모험가로서 활동할 때엔 나름대로 선을 긋고 행동한다는 걸 깨달았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궁금증이 안 생긴다고?"
갑자기 뭐가 불만인 것인지 또 다시 분노의 단무지를 일으키며 나를 째려보는 태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걸 있다고 할 생각도 없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할 텐데 뭘 새삼스럽게."
이 괘씸한 꼬맹이는 나보다 머리가 좋다. 내가 15살 때는 뭐했더라? 애니메이션과 만화책에 빠져 살았던 거 같은데?
한창 검도를 한답시고 움직였던 것도 그 무렵이긴 했지만, 두각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냥 또래보다 조금 더 진심인 수준에 불과했었다. 지금 셰릴 옆에 당시의 내가 있다면 자괴감에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내린 판단이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난 존중한다. 딱히 궁금할 이유는 없지."
"...괘씸하군."
"아니 왜 또?"
정작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분에서는 대답도 해주지 않으며 셰릴은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괘씸한 꼬맹이 같으니.
"근데 너는 안 받아도 나는 받는다?"
"음?"
"길드장이 말했던 거. 난 흥미가 있으니까 받을 거라고."
"...그럼 아까 그 자리에서 말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마치 왜 번거롭게 발품을 두 번 파냐는 듯이 바라보지만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이었다.
"둘이서 이야기를 좀 해보다가 의견이 갈려서 나 혼자만 받아보려고 한다...라는 형태가 모험가스럽지 않겠어?"
모험가도, 일반 평민들도 귀족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보고 기억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나도 셰릴도 당당하게 얼굴과 이름을 팔고 다니며 모험가 흉내를 내는 것이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말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하는 계급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엔그림의 눈에 우리는 그저 젊은 나이에 실력이 뛰어난 모험가에 불과하다. 그리고 둘이서 페어를 짜고 움직이는 모험가 중 하나의 의뢰를 두고 자연스럽게 갈라져서 행동하는 경우는 없다.
애당초 그럴 거면 페어로 움직일 이유가 없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견 조정이 잘 안될 수는 있어도, 난 안 할래. 어 그럼 나만 좀 해볼게 라는 식으로 즉석해서 페어를 쪼개는 것에 아무런 주저도 없는 모습은 결코 모험가들에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가 괜히 우리가 대체 뭐하는 애들인지 의심해서 조사하기 시작하면 셰릴의 취미생활에 장기적인 애로사항이 꽃피게 될 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확실히 그 부분은 생각 못했군."
턱을 괸 채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주억거린 셰릴이었지만, 이내 아직 의문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질문을 이었다.
"하지만 왜? 아무런 정보도 사전에 밝힐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어떤 위험을 동반할지 네가 예상 못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마왕군 지휘관 멱을 따야하는데 경험은 많을수록 좋지."
"...진심인가?"
"내 생에서 가장 진심인 것 중 하나인데?"
혹시라도 현재의 삶에 안주할까봐 나는 항상 지휘관을 죽인다는 말을 되새기고 입에 담는다. 전생의 나는 그렇게 아주 진취적이지도, 목표를 향해 삶을 불사를 정도로 열정적이지도 못했기에 생긴 버릇이다. 어느 순간에 쥐도새도 모르게 의지가 사그라들어서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바랄지도 모르는 나를 경계하기 위한 의식인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에카프 경과 나의 거래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는 가문에 전하지 않았다고 한들, 셰릴마저도 이걸 농담으로 취급할 줄은 몰랐다. 하다못해 오그웬에 있던 진 녀석마저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줬는데.
"아무튼 그러하다. 나 혼자만으로도 받아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다시 가볼거야."
"...최대한 물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은 다음에 판단해라."
"내가 애도 아니고 그걸 모를까."
엔그림도 명색이 길드장인데 설마 파바에라 새끼마냥 정보를 숨겨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취미가 있을라고.
◈
그렇게 다음 날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느긋하게 움직인 나는 엔그림을 찾아갔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아무 때나 찾아간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전날의 일들 덕에 그를 독대하는 건 큰 어려움이 없었다.
"길드장께서 보시기엔 저 혼자서도 그 일에 도움이 될 거 같습니까?"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반가워하면서도 혹여 셰릴과의 페어가 깨진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해준 것이다. 딱히 별 느낌 없던 엔그림에 대한 평가가 호감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며 적당히 둘러댄 나는 다시 한 번 본론을 언급했다.
"두 분 말고도 부탁을 드린 이들이 있습니다. 파티를 꾸리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엔그림이 원하는 인재들은 단순했다. 아직 크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으나 명백히 등급 이상의 실력을 소유한 자. 그리고 의뢰를 제대로 파악하고 완수할 줄 아는 자들이 보일 때마다 찌르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죄다 수긍하면 일개 소대가 움직이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막 찌르지는 않죠. 표현이 그렇다는 겁니다. 애당초 그런 인재들이 넘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은 넓고 병신들은 많던데 인재들은 항상 부족한가보다. 아무튼 딱히 문제는 없는 듯 싶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일단 의뢰를 수주하시려면 보안을 위해서 가벼운 금제禁制를 거는 것도 동의해주셔야 합니다."
"까짓거 그럽시다."
애당초 뭐가 됐든 하려고 온거다. 금제라고 해봤자 정보 누설을 경계하는 거지 의뢰를 받으면 죽거나 완수 전까지는 벗어날 수 없다 같은 저주에 가까운 것도 아니다.
"정말 깔끔하게 수긍하시는군요."
"이미 오늘 여기 온 거부터가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내 반응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엔그림은 소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입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한 번 더 방문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침 새벽에 다른 모험가 분도 동참 의사를 밝히셨거든요. 엘드미아님이 오신 덕에 오늘 바로 계약 후 의뢰에 대해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식사 정도는 먹여주는 거죠?"
"물론입니다."
공짜로 밥도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난 흔쾌히 수락한 뒤 엔그림과 웃는 얼굴로 악수하고는 유쾌한 기분을 안아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어? 저 새끼 저거?"
그리고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기가 무섭게 유쾌함 수치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새끼 내가 말했지? 니 얼굴 기억한다고."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자신의 무리와 함께 죽상을 쓰며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인물. 아동 성범죄자 당텔이었다.
그 순간.
정말 오랜만에 나쁜 엘드미아와 더 나쁜 엘드미아가 나타났다.
그리고 아주 열성적으로 발광하며 외쳤다.
-갤럭티카!
-팬텀!
"나도 너한테 말하지 않았냐. 잊는 순간 뒈지니까 잘 기억해두라고."
스스로 조울증이 있는 게 아닌지 나중에 진지하게 의심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리 한 켠을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은 나락마저 뚫고 좆박기 시작했다.
"대가리가 나빠서 이해를 못했나. 얼굴 잊고 마주치면 죽여버린다는 말이 그렇게 해석하기 힘들었냐? 얼굴을 기억했으면 날 보자마자 코 쳐맞은 개새끼마냥 도망쳤어야지."
유독 지천에 널린 머저리들과 엮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 행동은 별도이기에 나 역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놈들조차 당당하게 다가오는데 내가 쫀 것마냥 뒤로 물러선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
내가 오히려 더 빠른 걸음으로 자기들에게 가까워지자 녀석들의 험악했던 얼굴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기 위한 전조가 스쳐지나가려 한다. 그럴 수는 없다. 놈들은 오늘 뒤지게 맞아야한다.
다른 놈들이었으면 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는데 당텔 이 놈은 용서가 안 된다.
도적만도 못한 놈들을 죽이고 정의실현에 일조하려던 가룬도 죽었는데 아동 성범죄자 새끼가 왜 지금까지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 있어? 살아있더라도 죄스럽게 여기면서 대가리 박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언성을 높여?
가룬이 죽은 그 순간부터 당텔은 나에게 있어 존재만으로도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를 일으키는 요소일 뿐이었다.
"차라리 만델리 항까지 기어갈 테니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넌 좀 맞아야 해."
"뭐, 뭐? 너 어떻게 그걸..."
"식상한 질문 하지 말고 입 닫아라 혀 잘린다!"
-꽝!!
"아어아앍!"
진짜 앞 뒤 안가리고 뛰어들어 휘두른 상남자 펀치가 당텔의 안면을 파고 든 다음에야 수직 하강 하던 기분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단 일격에 강냉이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몰골을 본 당텔 일행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봐줄 생각 없이 달려드는 순간 주변에서 모험가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 엘드미아가 또 미쳤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세상이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