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이랑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셨어. 어떻게 거기까지 추측한 거야?"
어째서인지 매우 기쁜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놀라는 라그니스였다.
"그냥 뒤가 구려서...?"
솔직히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타당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상황을 예측하거나 예상한다는 행위는 천재가 아닌 이상 결국 경험과 지식에 기반하는 법이니까. 당장에 국왕의 이름조차 모르는 이가 해외 정세를 아무 정보 없이 추측해서 맞춘다면 누구라도 기겁할 게 분명하다. 방금 내 모습이 라그니스에게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니 순간 쫄렸다.
"당장에 너나 셰릴이 다니는 아카데미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겠어? 그냥 규모가 다를 뿐이지 하는 짓은 비슷해 보였을 뿐이야."
"흐음...그런가?"
"무엇보다 벌써 용사 교육에 5년이나 지났잖아. 이제와서 그런 말을 내뱉는다는 건 결과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무능함을 들춰내는 일에 가까울 텐데 너무 서스럼없이 제안한 것도 캥기는 부분이고. 자신 있으니까 와서 보라는 식의 형태에 가깝다고 생각해 본거야."
어떻게든 내가 생각해낸 게 별거 아니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황급히 살을 덧붙이면서 속으로는 한 번 더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내가 말했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핵무기 시연회 같은 거잖아 이거?
우리가 키운 대對마왕 결전 병기를 보아라. 곧 마왕을 죽이고 마계를 제패할 우리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줄을 잘 서야 할 것이다. 딱 이런 느낌으로 부르는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들기 시작한다.
...어?
"생각하다보니 어이가 없고 화가 나네?"
"으, 으응?"
"누구는 마왕군 때문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날아가고 이를 갈며 살고 있는데 정작 용사를 뽑았다는 새끼들은 그거로 정치 놀음에 가까운 짓거리나 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사실 용사 교육은 진즉에 끝났는데 간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이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말 나도 모르게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며 이가 갈리기 시작했다. 국가 간의 힘 겨루기는 결국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해야하니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결국 다 사업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류의 주적이라는 식으로 마왕군을 세계의 위협인 것마냥 포장해놓고도 그딴 짓을 하고 있다는 건 도를 넘는 기만질인데? 마왕군 지휘관만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누군가도 살생부에 올려야하는 상황으로만 느껴지는 건 과한 생각인가?
어찌된 게 시간이 지날수록 순 개 같은 것들만 튀어나오는 기분이지?
"에, 엘드미아? 괜찮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내 주먹에 손을 올린 라그니스의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와. 이게 진짜 빡침이라는 건가? 순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어...? 아, 미안. 정말 미안. 잠깐 정신을 놨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스스로 절제가 안될 정도로 치밀어 오른 화 때문에 통증도 제대로 못 느끼고 있다가 손바닥에 생긴 상처를 보고 나서야 알싸하게 아파왔다.
"...잠깐 기다려봐."
그런 나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라그니스가 책상으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마나 활성화를 돕는 분말이야."
그녀가 들고 온 건 전생에서 우리 아버지가 수시로 먹던 용각산 통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심지어 들어있는 것도 비슷하게 생긴 가루였기에 순간 나도 모르게 거부감부터 일어났지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조금 쥐어 내 손바닥에 난 상처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으아, 용각산 가루가 상처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순간 소름 끼쳤어. 하지만 상처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건데도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성력만큼은 아니어도 자가 회복력은 높일 수 있으니까. 이 분말은 그 효과를 더 증진 시켜줘. 검사가 손바닥에 쉽게 상처를 내면 안되지."
두 손을 포개어 상처를 어루어 만져주며 마법을 쓰기 시작한 라그니스는 애써 웃어보였다.
"...다행히 그렇게 크게 상처가 나진 않았네. 네 마력을 운용해서 주먹을 쥐었으면 손바닥에 구멍이 나지 않았을까?"
"그건...하. 그러게 말이다. 손등으로 손가락이 튀어나왔겠네."
"으윽. 그건 좀 많이 징그럽다."
"흐. 미안하다. 간만에 봤는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네."
충동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꼴이었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만의 추측에 감정이 휘둘리다니, 이 세계에서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없었던 같은데 말이지.
아마 당텔 놈을 줘 패느라 나도 모르게 좀 느슨해졌나보다.
"이해해. 나라도 그런 생각이 들면 사실여부를 떠나 무척 화가 날 테니까."
나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라그니스였기에, 그녀는 내 추태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며 넘어갔다. 대신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짐짓 활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제국의 요청을 우리가 마냥 거절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거든.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제국으로 가야할 거 같아."
"당연히 왕가에서 보상을 약속했겠지?"
"후후. 당연하지. 충분한 협의가 이뤄져서 사실 그건 문제가 안 돼."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가 문제라는 소리겠네. 날 불러서 그 이야기를 한다는 건 도움을 받고 싶다는거고?"
"으응. 맞아."
어차피 한 번 도와준 거 두 번 못 도와줄 이유도 없다.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해보라는 듯이 시선을 던지자, 아직 내 손을 쥐고 있던 라그니스의 손이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다. 내 손을 쥐고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자각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괜찮으면 같이 가주지 않을래?"
"제국으로?"
"...응."
"안 돼."
도움은 줄 수 있어도 시간의 문제는 어떻게 못 해준다. 내가 이미 복수를 달성했다면 모를까, 난 아직도 시간과 싸우는 중이니까. 변경백의 입장에서 제국까지 가려면 비룡도 못 타고 마차로 행렬을 이루면서 가야한다. 한 달은 걸리는 여정일 게 분명했다.
내 즉답에 나라 잃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라그니스가 불쌍했지만, 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너무 멀어."
하지만 내 한 마디에 나라 잃은 표정에 화색이 돌며 라그니스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 그거!! 마차로 안 가! 게이트로 갈 거야!"
"어? 그래?"
생각보다 왕국에서도 대대적인 지원을 하나보다. 게이트 그거 아무나 쓰는 거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지.
"그러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언제 갈 건데?"
"고마워!"
대답도 안 해주고 일단 와락 껴안고 보는 라그니스에게 이제 체통을 좀 지키라고 하려다가 그냥 등을 토닥여주기로 했다.
라드넬반데스가 있고, 주변의 조력자들이 있다고 해도 결국 라그니스는 고아다.
나는 아실리에 덕에 유사 가족 관계라도 느끼며 의지할 대상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모든 게 불안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힘들 때 나름 큰 힘이 되어준 나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언제 갈 건지 말해 빨리."
"준비는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빠르면 일주일? 에카프 경과 셰릴한테는 이미 이야기를 전달해놨으니 나중에 엘드미아 네 의사만 확실히 말하면 문제 없어."
"별문제 없겠네."
엔그림의 의뢰가 걸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서두르는 걸 보면 일주일 씩이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애당초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 저것 뜯어내서 의뢰를 빨리 끝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고. 어떻게든 되겠지.
한 차례 온 힘을 다해 나를 끌어안은 라그니스가 기쁨으로 상기된 얼굴을 내보이며 싱글벙글 말하기 시작했다.
"하. 정말 다행이..."
-똑. 똑.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차를 가져왔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앉자마자 종을 울렸었지. 차를 내오라는 거였나보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한 차례 목을 가다듬은 라그니스가 근엄하게 말했다.
"들어오거라."
"야이...!"
이 정신 나간 계집애 같으니! 자기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구나!
순식간에 등골을 타고 솟아오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라그니스를 번쩍 들어 반대편 소파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다시 앉아 태연함을 가장하기까지가 정말 영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 순간까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이해 못하고 있던 라그니스는 문이 반쯤 열릴 때 즈음해서 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소파에 바로 앉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추태를 부릴 뻔 했는지 이해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의 자제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노력은,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찻잔과 차를 세팅한 뒤 나감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었다.
"후아. 십 년 감수했다 진짜."
"후, 후! 까, 깜짝 놀랐어."
"정신 차려라 좀. 너 변경백이잖아. 그러다가 진짜 큰일난다."
이제 성인도 넘긴 다 큰 처자가 너무 막 달라 붙는다.
"나, 나도 아무한테나 막 이, 이러는 건 아...아닌...데..."
한 차례 질책하는 눈초리를 쏘아보내자,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고개 숙이는 라그니스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빨갛다는 감상밖에 안나오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