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이어진 라그니스와의 대화는 평범했다.
사이사이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네, 마법적 성취가 빨라서 라드넬반데스가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는 걸 넘어 매번 경탄을 금치 못하네, 생존했던 가문의 식솔들이 소문을 듣고 모이고 있네 뭐네 하는 식의 이야기들 뒤로는 나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매일매일을 스펙타클하게 사는 부류는 아니다보니 할 이야기는 별로 없음에도 라그니스는 상당히 집요하게 내 일상에 대해 열성적으로 질문했다.
솔직히 조금 쫄 정도였다.
"아무튼 난 따로 준비할 건 없다는 거지?"
한 차례 심문과도 같은 일상 대화가 끝난 뒤 이제 슬슬 길드에 가봐야 할 거 같아 확인차 물어보자 라그니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엘드미아는 내 호위로 가는 거니까. 오히려 조금 불편하겠지만 우리 쪽에서 맞춰주는 장비와 의복으로 움직여줬으면 해."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준다는데 어려울 거 없지."
군대도 아니고 말이야.
어차피 변경백의 개인 호위라는 위치라서 누구 하나 함부로 나에게 태클을 걸거나 부려 먹을 수 없다. 여행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다. 그래도 꼴에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에 가는 건데 위협이랄 게 있겠어?
......뭔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반응하면 계속 사건이 터졌던 거 같지만 이번 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럼 구체적인 일정이 정해지면 오가토르프 가로 사람을 보낼게."
사용인들이 있다 보니 밖까지 배웅 할 수 없는 걸 내켜하지 않는 라그니스를 뒤로한 채 나는 저택을 떠났다. 이미 우리가 처음 수도에 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맡겨두었던 장비를 되찾고, 추가적인 물품을 구매하며 길드에 돌아왔을 땐 이미 노을이 지고 밤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길드도 통상적인 의뢰 업무는 접어둔 뒤 식당 운영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는 시간대에 딱 맞춰 도착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마냥 엔그림이 나와서 마중해줬다.
"딱 좋은 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말하시는 걸 보아하니 제가 처음 도착한 건 아닌가봅니다?"
"하하. 맞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이지요. 딱 좋은 시간이라는 건 식사 준비가 지금 막 끝났기 때문에 드린 말입니다."
단순히 성실한 건지 그저 약속을 잡았으니 하루 종일 길드에서 죽치고 앉아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딱히 내가 늦게 온 것은 아니었기에 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처음엔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야기하진 않겠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로비가 시끄러운 꼬라지를 보아하니 오히려 여기서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비밀 유지가 잘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분명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바로 옆 사람과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만큼 시끄러워질 게 눈에 훤하다.
그야말로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수준이다. 이 시간에 길드에 올 일은 별로 없다보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적잖게 놀라고 있는데 엔그림이 그런 나를 알아차린 것인지 부연 설명을 해줬다.
"평소보다 시끄러운 게 맞습니다. 할인을 좀 했죠."
감탄하며 둘러보니 술과 음식이 평소보다 거의 반값에 가깝게 팔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돈을 풀 정도로 신중한 문제를 정말 녹급에 불과한 나한테 의뢰하는 게 맞는 건가 싶지만 그건 뭐 엔그림 본인이 내린 판단이니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 내 실력이 그거밖에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내 한 몸은 건사할 수 있겠지.
"여어, 길드장. 마침 딱 맞춰서 오셨...뭐야. 마지막 인원이 광견이었어?"
터질듯한 근육이 가죽 갑옷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금발의 여전사가 나와 엔그림을 발견하자마자 반응했다. 그녀가 있는 테이블을 보니 그녀를 제외하고도 남자 둘에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 각자 특색있는 모습이었지만 결국 우리를 보고 반응한 여전사만큼 존재감을 어필하지는 못했다.
여전사는 정말 보자마자 라드넬반데스의 핏줄이 아닌지 의심부터 할 만큼 거구에 근육질을 자랑했다. 나도 이젠 작은 키가 아닌데 분명 일어나면 나보다 조금 더 키가 클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통통하니 예쁘장해서 정말 괴리감이 장난 아니다.
이를 악물면 턱 끝에 근육이 일어날 것만같은 몸에 저런 아기자기한 얼굴이라니. 만화를 찢고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광견은 녹급이 아니던가? 길드장의 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꽤 의외긴 하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먼저 기울이고 있던 대머리의 남자는 날카로운 얼굴 위에 풍부한 감정을 담으며 웃어보였다. 다른 이들도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고, 엔그림은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내가 앉기 편하게 의자를 빼주었다.
"이번에 그의 실력을 확신할 수 있는 의뢰가 있었거든요. 아무런 문제 없을 겁니다."
"하하핫! 그걸 의심하지는 않아. 아, 광견 씨도 벌써부터 그 정도로 두각을 드러낸 게 대단하다는 의미였으니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아줘. 굳이 따지면 칭찬이거든."
호쾌하게 웃어 보이는 여전사의 손사래에 바람이 이는 듯한 느낌마저 받으며, 나는 그저 따라 웃었다. 난 정작 이들을 다 모르는데 이들은 모두 날 아는 눈치라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다른 반응을 하기 힘들었다.
난 진짜 광견으로 자리잡은건가? 여기서는 아예 이름 대신으로 불러버리는 수준이네.
"저 친구 멀쩡히 이름도 있는데 자꾸 그런 별칭으로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겠어 예카트리나?"
대머리 옆에서 자신의 풍성한 턱수염과 머리털의 위용을 뽐내던 남성이 외견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넌지시 경고를 주자, 여전사가 귀엽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급당황을 하며 말했다.
"어어어? 그런가? 그런 건가? 이거 미안해! 이명은 결국 존재감이 있으니까 얻은 거라고 생각해서 뭐든 좋을 줄 알았거든. 실례였나 보네."
보아하니 라드넬반데스의 직계가 아닌 외국인이었나 보다. 그녀 옆에 앉아있던 검보랏빛 단발 머리가 인상적인 여성이 말을 덧붙여줬다.
"예카트리나는 러빌 사람이라서요. 이런 부분에서 좀 약하니까 너무 괘념치 마세요 에가 씨."
아니 진짜 나만 이들을 모르고 다 나를 아나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난 결국 더 깊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끊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 괜찮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보다 저는 여러분들을 모르는데 여러분들은 저를 알고 있는 이 상황이 더 심각하게 다가오니 누가 좀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사실 그 '누가'는 이미 정해져있었기에 난 엔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이제 막 목을 축이던 엔그림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이분들께 언질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예카트리나 씨가 보인 반응이 있으니 아시겠지만 말이지요."
"그걸로 책 잡을 생각 없으니 통성명이나 시켜주시죠. 먹으면서 들을 테니까요."
나도 슬슬 배가 고팠기에 식탁 가득 놓여있는 음식들 중 칠면조 다리를 잡고 먹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한 차례 웃어보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예카트리나는 단발 머리가 말한 것처럼 러빌에서 온 전사였다. 예쁘장한 얼굴과 달리 장엄하기 그지없는 골격과 근육이 러빌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걸 보면 그야말로 전사의 나라인 듯 싶다. 자신의 덩치에 걸맞는 거대한 워해머를 무슨 나무 봉 휘두르는 것마냥 사용하는 청급 모험가라고 하니, 분명 오러를 무리 없이 쓰는 실력일 것이다.
단발 머리 여성은 렐리에 라는 이름의 마법사였다. 나를 이름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성으로 부른 것으로 봐서 나름 상류 계급인 줄 알았는데...숨기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몰라도 성은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청급 모험가임에도 '별을 품은 자'로 분류되는 수준 높은 마법사였다.
나도 마법은 모닥불 지피는 정도밖에 못 쓰는 놈인지라 자세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저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보던 서클 같은 개념의 호칭인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터라 어느 정도 수준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자격증과도 같은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윗급인 자紫급은 되어야 인정받는 게 보통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낸 걸 보면 저 치도 천재에 속하는 사람인 듯 싶다.
털보 아저씨는 긴이라는 짧은 이름의 청급 모험가였다. 드워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체형이라고 생각했더니 진짜 드워프라는 게 반전인 남자였다.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거인으로 통할 게 분명할 정도로, 얼핏 봐서는 키가 좀 작은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진국인 건 대머리 아저씨였다.
가엔달이라고 자신을 밝힌 이 대머리 아저씨의 이명은 무려 웨펀 마스터였다.
"다른 분들도 만만치 않게 놀라운데 가엔달 씨는 한 술 더 뜨네요."
"주변에서 막 부르던 게 어찌저찌 이명으로 굳은 것뿐이지. 대단한 실력은 아니야."
말은 그렇게해도 정말 어지간한 무기는 쥐는 족족 다 쓸 줄 안다고 하니 이명에 걸맞는 실력인 것은 확실했다. 아직 청급에 속해있지만 단순히 실적이 부족해서인 거지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라 금방 자급으로 올라갈 거라고 한다. 다 듣고나니 난 참으로 평범하게 느껴지는군.
아무튼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나에 대한 소개로 돌아올 때 즈음엔 다 같이 식사를 하며 나름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수준까지는 친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모두가 이미 알고 계시는 것처럼 이쪽은 엘드미아 에가 씨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광견이라고 불리지만..."
"아아. 실력 좀 있는 놈들은 광검光劍이라고 부른다지?"
"에? 뭐요?"
뭔 검? 광검?
"음.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해. 마법이 아닌 건 확실한데 마법 같은 검술을 쓴다고."
심지어 렐리에마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도 거기에 반박을 하지 않는 광경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뭔데? 왜 나만 내 이명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