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안개와 공기를 맞으며 말을 달리는 건 꽤나 쌀쌀했다.
목적지인 폐던전에 도착하려면 4시간 가까이 말을 달려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만큼,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며 달린 덕에 속도를 많이 내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어쩐지 나 빼고 모두 말을 타기 전에 좀 두터워보이는 망토를 두른다 싶었다.
결국 해가 온전히 뜰 때까지는 참고 견디려고 했지만,그게 또 쉽지가 않아서 경험 부족에서 온 준비 미숙을 통감하며 간만에 정령을 불러내야 했다. 솔직히 한 시간동안 입 꾹 닫고 달린 것만해도 노력했다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의 추위였다.
그렇게 정령의 도움을 받아 체온을 올리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경악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어?! 정령?!"
"뭐? 정령?"
새된 비명의 주인은 예카트리나와 렐리에였다. 정령 친화력이 남다른건지 예카트리나는 분명 내 앞을 달리고 있었는데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였고, 이내 예카트리나와 렐리에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나와 속도를 맞추며 다가왔다. 가엔달과 긴마저도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결국 그 정도에서 그친 듯 싶었다.
"뭐야? 뭐야? 정령술이라고? 진짜?"
"아니 세상에 진짜네? 에가 씨, 정령술도 쓸 줄 알아요?"
"그, 뭐냐. 길러준 엘프한테 배워서 조금..."
"뭐?! 엘프가 길러줬다고?!"
"와! 듣던거보다 더 재밌는 사람이었네?"
대체 나에대해 무슨 이야기를 주워듣고 살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탐구심보다는 흥미로 눈동자를 빛내는 렐리에와 달리 상당히 열성적인 탐구심을 내비치는 예카트리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엘드미아. 혹시 어렸을 때부터 정령과 소통을 할 수 있었다던가 그런건가? 그래서 엘프가 재능을 개화시켜준거고?"
"아뇨. 그냥 같이 살다보니 어느 샌가 소통할 수 있었는데요."
그 대답에 이번에는 렐리에가 한 번 더 놀라며 말을 걸었다.
"정말요? 그럼 원래는 정령을 느끼지 못했던거에요?"
"예, 뭐. 느낀다는 개념조차 이해를 못했죠. 아니 그보다. 예카트리나도 방금 제가 정령을 부른 걸 느꼈잖아요? 정령술 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전혀! 난 느낄 줄만 알아."
그건 또 그것대로 신기한 경우가 아닐까 싶어하고 있으니 옆에서 렐리에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마나를 느끼는거랑 마법을 쓰는거랑 별개인 것처럼 정령술도 쓸 수 있는 거랑 느끼는 건 별개에요. 엘프가 스승이었으면 아마 그런 경우는 생각도 못했으니 들어보지 못했겠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죠."
"아! 정령이랑 대화가 안 되는거군요?"
나도 처음엔 그거 때문에 고생 좀 했었던 터라 무슨 소리인지 바로 이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카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정령과 교감이 가능한 걸 매우 높게 취급하거든. 땅이 척박해서 그런가 유독 쉽지 않은 편이라서 말이지.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알았는데 정령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다른 나라 수백년 전 수준이더라고."
예카트리나의 말에 따르면 샤머니즘에 가까운 개념으로 순전히 친화력 높은 이의 감에만 의존하다시피 하는 게 러빌의 정령술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술에 능한 자는 거의 천재에 가까운 이들이라, 정작 타국보다 정령술에 대한 이론적인 개념은 부족한 반면 능력적인 부분은 월등히 뛰어나다고 하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야생에 가까운 나라임이 분명하다.
남들은 공부해서 쓰는 걸 '되는데요?' 하나로 쓰는 재능충들이 꾸준하게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있는 나라다.
아무튼 그런 러빌에서 자란 예카트리나인만큼 자신의 정령 친화력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활용을 못해서 아쉬워하는 중이었다.
"그보다 에가 씨가 정령술을 쓴다는 소문은 하나도 없던데?"
"그렇겠죠. 전투에서는 쓰질 않으니."
"왜요?"
"정령들 기분 나빠할까봐요."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정령의 사고는 아실리에와 함께 할 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달리 내가 싸움과 관련된 목적으로 정령의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겪은 고생만 나열해도 군생활의 고생담을 씹어먹을 수준이다.
"제가 정령 친화력이 그리 높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유독 제가 전투에 도움을 바라면 까칠하게 나와서 그냥 싸울 때는 안 씁니다."
"...? 그냥 명령하면 되는거잖아요?"
"무슨 큰일날 소리를, 저보다 강한 상대한테 어떻게 명령을 합니까."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자기들 마음, 돕는 것도 일상적인 것 외에는 대부분 자기들 마음인 존재들이다. 한낱 인간인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배짱으로 명령을 하겠는가?
당연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렐리에는 '어라? 이상하다?'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스승께서는 그 말에 별 말씀 안 하셨어요?"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했죠."
물론 처음 들었을 때는 보기 드물게 박장대소를 한 그녀였지만 자연의 존재를 대할 때 겸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다며 별 말 안하던 아실리에였다.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으면 그 대상에게 겸허해지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
"으음. 뭐, 저도 정령술사를 많이 만나본 게 아니니까 뭐라 할 말은 없네요. 스승님께서 그랬다면 그게 맞는 거 겠죠."
대충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이는 렐리에는 참으로 바람직한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틀리다' 와 '다르다'를 구분할 줄 아는 이는 항상 곁에 둬야하는 법이지. 의뢰 이후에도 좋은 관계가 유지되길 바란다.
"그건 또 내가 보고 만나왔던 정령술사들에게는 들어보지 못한 배움인 걸. 혹시 엘드미아 나름대로 정령과의 교감에 대해 해 줄 조언이 없을까?"
그건 예카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후후. 그리고 사실 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실리에조차 깜짝 놀랄 개꿀팁을 지니고 있는 몸이지. 좋은 관계를 위해서라도 꿀팁 대방출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이건 진짜 자신있게 말해드릴 수 있는 조언입니다.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된 것도, 정령 친화력이 높은 예카트리나 씨인것도 인연이니 까짓 거 알려드리죠."
"진짜?! 뭔데 뭔데?"
"정령은 인간의 언어를 모릅니다."
"에?"
"어?"
말의 박차를 가하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은 둘에게 나는 계속 설명해주었다.
"간단한 겁니다. 제국 공용어로 대화하니까 우리도 말이 통하는거지, 당장 예카트리나만 해도 러빌 어로 말하면 전 모를 거 아닙니까?"
"그렇...지?"
"정령은 인간과의 모든 소통이 다 그래요. 정령들은 언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의사를 이해합니다."
정령이란 존재가 없던 곳에서 살던 나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건 거의 콜롬버스의 달걀 급의 발상이다. 엘프인 아실리에마저도 처음 들었을 때 기립박수를 칠 정도였으니까.
나는 원래 없던 정령 친화력이 갑자기 생긴 경우라서 정령들조차 나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였었다. 정령술사들이 정령에게 관심을 구해야하는 것과 달리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안 통했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정령들은 사람을 대할 때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로 대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그 개체 하나로만 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과의 대화 방식을 이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 아실리에도, 예카트리나도, 나도 다 다른 사람이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다 다른 의사소통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한테 말하듯이 개미한테 말한다고 통할 리 없으니, 새로운 의사 소통 방법을 배워가며 새롭게 다가가는 생명체인 것이다.
그 어느 종족보다도 하나의 인격체라는 개념을 존중 할 줄 아는 정신나간 발상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령이 현신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는 대상자의 사고를 빌려 말을 하기에 얼핏 보기에는 언어라는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거로 여겨지지만, 전혀 다릅니다. 벙어리가 소환하면 말조차 안 할걸요?"
벙어리는 말로 하는 소통이 주가 아니니까. 그렇다고해서 수화로 대화하진 않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말 한마디 없이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 분명했다.
"그, 그럼 정령술에서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들은 정령의 언어를 이해하는거죠. 그 쪽도 나름대로의 언어는 있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맞춰줄 뿐이지."
날 때부터 2개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그 중 한 개가 정령어인 것이다. 당연히 말이 잘 통하고 잘 도와주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와...생각도 못한 발상이네."
정령을 하나의 종족으로 여기지 않고 일종의 신적 존재로 여기면 시도 할 일이 없는 접근법일 것이다. 그렇기에 난 나의 추론에 상당히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 굳이 무언가를 전달할 때 말에 의존하는 것보다 그냥 행동으로 전달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그래요."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나 존재해왔다. 한 평생 말 없이 살던 사람이 갑자기 정령과 말하겠다고 많이 떠들어봤자 정령들에게 혼란만 줄 뿐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개체는 말 없는 개체이니까. 나처럼 0에 수렴하는 정령 친화력 때문에 정령들의 관심 밖에 있던 케이스가 아니면, 평소 자신이 해오던 방식으로 접근해야 정령들과 소통하기도 수월하다.
"어쩐지 아까도 말 한 마디 없이 정령을 부른다 싶더니 그런 이유에서 였던건가!"
예카트리나의 결론은 정확했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난 철저하게 바디랭귀지로 정령들과 소통을 튼 사람이다. 이제서야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 소통이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첫단추가 그래서 그런지 그냥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게 더 확실하다.
"이야, 이거는 나중에 쉴 때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할 거 같다. 괜찮지 엘드미아?"
"상관은 없는데 왜 나중을..."
"불청객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을거라 생각했던 예카트리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저 앞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그제야 우리의 속도가 조금씩 늦춰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거기에는 숲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열 댓 명의 불량해보이는 장정들이 있었다. 길 한가운데에 모닥불을 지피고 대충 널부러져 있는 꼴이 딱 봐도...
"딱 봐도 도적인데, 어쩔까?"
어느새 우리와 말 머리를 맞추고 달리던 가엔달이 물어보자 이제는 조금 빨리 걷는 거에 가깝게 속도를 늦춘 모두가 목젖을 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어떻게 족쳐야 빠르게 족치고 갈 길을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입을 연 긴이 내뱉은 말은 전혀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나. 이 정도 거리면 아직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긴 힘들걸세. 비밀리에 움직이는 이상 굳이 부딪쳐서 목격자를 남기는 것보단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게 낫겠지."
"흐음. 역시 그렇겠죠. 괜히 힘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거기에 동조하는 건 렐리에 뿐만 아니라 가엔달과 예카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이래서 내가 뽑힌거구나."
"응? 뭔가 말했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나보다. 가엔달의 되물음 속에서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들은 분명 나보다도 높은 등급의 모험가였지만, 다수의 사람을 상대로 싸운 경험은 나보다 적은 게 분명하다. 겨우 저렇게 어중간한 도적놈들을 상대하며 목격자가 살아남을 걸 걱정한다는 것만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충분히 이해는 됐다. 몬스터와 싸우는 감각과 사람과 싸우는 감각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심지어 주변에 있는 모험가들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과의 전투에서는 신중해질 수 밖에 없을것이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적의 능력을 고평가한 것이리라.
근데 쟤들이 어떻게 살아 남아? 다 죽는거지. 아무리 개활지라 하더라도 도적 나부랭이들이 오러 사용자에게서 살아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갈길도 바쁜데 어느 세월에 돌아갑니까. 길드장이 절 고용한 이유를 보여드릴 기회인 거 같으니, 이번엔 구경만 하시죠."
어차피 던전에서도 사람을 상대하며 싸우게 될테니 미리 그들의 판단을 수정해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여기며, 나는 정령들을 돌려보낸 뒤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