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3화 (53/412)

가엔달이 돌아온 건 한 시간이 조금 넘은 뒤였다.

"대담하다고 해야할지 무모하다고 해야할지, 상당히 방심하고 있는 거 같...아니 이게 무슨 맛있는 냄새인가?"

오자마자 예카트리나가 준비한 스튜 향기에 정신을 못 차리는 가엔달을 보고 우리는 웃을 수 없었다. 이 향기로운 스튜 냄새를 맡으면서 벌써 30분 넘게 침 흘리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그는 구원자였지 절대 웃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일단 먹고 시작하시죠."

장기 의뢰가 아닌 덕에 엔그림이 챙겨준 식자재는 신선도를 걱정하지 않고 최대한 맛에 치중한 상태였고, 그 재료들을 손질해서 과감하게 스튜를 끓이기로 결단을 내린 예카트리나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뱃속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온기를 제외하더라도 스튜는 정말 맛있었다.

"어떻게 야영을 하면서 이런 음식이 나올 수 있는거지?"

빈 말이 아니라 어지간한 여관에서 파는 스튜보다 맛있다. 이것만큼은 그리운 알리샤 여사님의 스튜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모두가 입을 모아 스튜를 칭찬하자 호쾌하게 웃어보인 예카트리나가 근육만큼이나 풍만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재료도 재료지만 스튜만큼은 자신 있지!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재료가 들어간거라 흔히 먹어본 맛이 아닐거야!"

"아! 그때 그 정체불명의 액체를 넣은거군요! 정말 요긴하네 쓰이네요 그거."

같이 활동하는 렐리에는 이미 그녀의 요리를 맛본 적이 있는지 짐작가는 게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체불명의 액체? 러빌 사람들은 비전의 치킨 스톡 제작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예카트리나. 아까의 조언에 대한 댓가로 그 재료가 뭔지 나중에 구체적으로 좀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입맛에 맞다니 기분 좋네. 음식은 나눌수록 기쁜법이지! 얼마든지 알려줄게!"

이제는 첫인상을 진즉에 박살 낸 다재다능 문화전사 예카트리나였다.

"후. 역시 식사는 중요하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는군. 아무튼, 대수로울 건 없으니 먹으면서 듣게나."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식에 혼을 빼앗겼던 가엔달이 적당히 배를 채우고는 정찰의 결과를 전달해주기 시작했다.

"주변은 의외로 정상적이라네. 적당한 몬스터. 적당한 모험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폐던전에 자리잡은 마족 숭배자 놈들이 있을 거라는 의심 자체를 안 하고 있는 듯 해."

오히려 놈들은 당당하게 모험가 길드 소속을 흉내내며 접근하는 이들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안에 거기까지 볼 기회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의뢰는 참 운이 좋은 거 같다는 가엔달의 의견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교대는 할텐데...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군.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본 녀석들은 경비를 대충 서지 않았다는 점이네. 놈들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고 얼마나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움직인다고 봐도 되겠지."

"그래도 아예 날로 먹는 의뢰는 아니었구먼."

엔그림이 전해준 정보로는 궁수로 활동하던 년놈 둘에 마법사 한 놈을 제외하면 전부 평범한 전사 계열의 모험가라고 했던가. 개인적으로는 마법사씩이나 되어서 이런 일에 가담한 놈이 사상적으로도 의욕적으로도 가장 위험하다고 여겨지지만, 다른 놈들도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합류한 건 아닌가보다. 나이대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고 했으니 의욕만 충만하고 준비는 덜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으나, 한 때 귀족이었던 놈들은 마인드부터가 다르니 경계를 늦출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가장 다행인 점은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휴식을 취하든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의 접근 자체는 방관하고 있다는 거네요. 본격적으로 습격에 들어가려고 할 때도 이점으로 다가올테니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도적놈들 때처럼 또 에가 씨의 기습을 볼 수 있겠는데요?"

아무래도 도적들을 상대할 때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일행들은 지근거리에서 자연스럽게 기습을 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염두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역시 놈들을 상대로 실력을 한 번 보여주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되도록이면 교대 타이밍에 맞춰서 4명 정도는 처리하고 시작하면 좋을텐데 말이지."

"응? 그래도 따로 처리하는 게 낫지 않나요?"

"저렇게 경계를 하고 있으면 오히려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길 환경에서야 좀 풀어질 거라는 느낌이 강하군. 교대 인원들도 별 거 아닌 거 같으면 빨리 정리하고 들어가고 싶을테니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을까 싶네. 어떻게 생각하나 엘드미아?"

별 생각 없던 부분이라 가엔달의 추측이 너무나도 그럴싸하게 들려왔다. 딱히 생각해둔 것도 없을 뿐더러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도 않다보니 상당히 매력적인 작전이었다.

"솔직히 염두를 안 하고 있던 부분이라서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엔달 씨의 추측은 굉장히 그럴싸하다고 생각되네요.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겠어요."

"위험하지 않겠나?"

"엔그림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겨우 한 명있는 마법사나 두 명 뿐인 활잡이를 경계 근무에 투입하지는 않을테니까요. 접근전만 놓고보면 문제 없습니다."

결국 실력지상주의인 세상에서 가문에 무슨 사단이 나든 자신이 잘났으면 굳이 마족과 손 잡을 필요도 없이 다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실력이 있는 놈들은 마족을 극도로 날이 서있는 왕국의 경계 영역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수준의 위험요소 정도로 여기고 거리를 뒀겠지.

"마족과 손을 잡는다는 극단적인 선택지 말고는 길이 없던 놈들입니다. 실력은 거기서 거기일테니 위험할 것도 없죠."

당연히 경비보다는 던전 내부에 산개해있을 놈들이 더 위험요소였다. 밖에 있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가 정리되나 마침 식사를 마친 긴이 길드에서 받아온 내부 지도를 펼쳐 보이며 품에서 모노클을 꺼내 착용했다.

"어디보자...말로는 고블린들이 무리짓고 있던 던전이라 들었는데 구조는 신전같군. 과거 고대 신을 모시던 종교 중 땅과 연관된 신전들이 이렇게 지하로 파고드는 구조로 지어졌지."

역시 드워프답게 전문적인 지식을 웅얼거리며 지도를 끌어안고 하나 하나 체크하던 긴이 이내 잔뜩 X자를 그린 지도를 자신의 도끼 면 위에 펼쳐 보였다.

"엉겨붙는 늪의 신을 모시던 신전이다. 20년 정도 전에 다른 지역에서 떠오른 걸 조사한 적이 있지. 표시한 곳은 무조건 무너져 내렸다. 고의적으로 비틀어놓은 구조적인 문제와 당시 신전을 짓기위한 조건에 부합한 땅의 특성 때문에 관리가 끊기면 금방 박살나게 설계되어있거든."

"허어, 꽤 신기하군요. 그런 불완전한 건축을 일부러 하면서까지 섬겨야만 했던 고대의 신이라니."

가엔달의 말대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건축물이긴 했다. 신전이라기보다 비밀기지에 더 가깝지 않나 이거?

그렇게 의문을 느끼는 사이 목탄을 쥔 손등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긴이 대답해줬다.

"일종의 악신惡神으로 여겨졌다는 모양이야. 배척 받는 종교답게 비밀과 보안에 철저했던 거지. 의도치않게 신도들의 발길이 끊기거나, 고의적으로 정보를 훼손해야할 경우 박살내기 위한 방범장치였다는 게 우리들의 결론이었네."

"응? 그래도 던전화되서 모습을 드러낸 뒤로도 멀쩡히 유지되었으니 길드에서 지도를 남길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

"지도 보면 폐던전 지정일이 3년 전이지? 한 달만 관리 안 해줘도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다네. 무조건 박살났어."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청급에서 머물고 있으며 엔그림은 또 어떻게 알고 찾아냈는지 몰라도 긴이 설명해줄 때마다 안 그래도 그다지 높게 느껴지지 않았던 의뢰의 난이도가 점점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되게 신기하네요. 그래도 던전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이런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몰랐을 텐데 대체 어떻게 멀쩡히 유지되었던거죠?"

연신 감탄하던 렐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던진 의문은 우리 모두 공감할만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어보인 긴이 지도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게 참 재미있는 부분이지. 사람의 발길이 자주 닿는 곳의 바닥을 밟는 것만으로도 유지가 되는 구조라네. 인위적으로 안 밟지 않는 이상 반드시 밟게 되는 그런 곳들. 장기간 방치되면 그 바닥들이 파괴되어 튀어오르면서 붕괴가 일어나지."

"세상에...신전이 하나의 거대한 기계장치인거네요."

"그 말대로야. 뭐, 덕분에 우리의 일이 한결 편해졌으니 다행 아니겠는가."

긴이 표시한 X자만 해도 십여개에 달했으니 정말 편해지긴 했다. 그 뒤로도 취침실과 비품실 같은 것을 추측하며 몇 가지 표식을 더 새겨 넣으며 계획을 정리하자 어느 덧 해가 중천에 떠오른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정찰을 나가서 교대 인원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4시간 동안 이어진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정찰은 나중에 저와 가엔달씨가 하기로 하죠."

"오, 그런 기술도 배운건가?"

"같이 산 세월이 길었으니까요. 답답하진 않을 겁니다."

숲이 제 집과 다름 없는 엘프에게 칭찬까지 들어가며 직접 전수 받은 추적술과 정찰 기술인데, 설마 꿀리겠어?

아쉽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과는 인연이 없었기에 우선은 우리 둘만 먼저 취침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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