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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54화 (54/412)

나와 가엔달이 잠에서 깬 건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김없이 향긋한 스튜 내음을 맡으며 몸을 일으켰지만, 괜히 화장실이 가고 싶어질 경우 귀찮아질 것이 뻔했기에 몸만 가볍게 푼 뒤 움직이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마을에서 물자를 사가는 집단이 있다더라."

놀랍게도 우리가 잠든 사이 예카트리나와 렐리에는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마을까지 가서 탐문을 마치고 돌아왔었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주는 파티원들의 모습에 내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둘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을까지는 말을 타고 여유롭게 달려서 20분은 가야했고,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방문했으며 슬슬 방문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한다. 가엔달이 살펴봤을 때 던전 주변에는 말이 없었으니 놈들이 이동하더라도 순전히 도보로만 오고 갔다는 결론이 나왔다.

"보통 6, 7명이 무리지어 내려오고 그 때마다 술집에서 반나절을 놀다가 돌아갔다고 해."

의심할 여지없이 철저하게 계획적인 스트레스 관리다.

마족 놈의 머리에서 나온건지, 다른 누군가가 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건지는 몰라도 덕분에 놈들을 향한 나의 경계도가 조금은 올랐다.

그래도 잘 맞추면 경비 교대 인원까지 해서 반절은 깎고 시작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우리는 정보를 구해온 두 사람에게 아낌 없는 박수를 선사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의뢰 난이도가 떡락을 한다니! 정말 멋진 팀이다.

"내일 오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않을테니 접근하는 기척이 있으면 일단 경계하고 보면 될 겁니다. 피곤하시겠지만 3시간 간격으로 불침번을 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두 사람은 못해도 4시간 간격으로 서게 될 거 아닌가? 걱정말게나."

어차피 모닥불 옆에 있으니 필요없다고 망토 없이 움직이는 나를 위해 자신의 것을 건네주는 긴의 호의에 감동하며, 나와 가엔달은 지체없이 폐던전으로 향했다.

밤의 숲 속은 아무리 달빛과 별빛이 있다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둠이 내린다. 숲 속 오두막에서 살아온 만큼 밤 눈은 꽤 밝은 편이었지만, 오히려 가엔달이 밤눈이 약한 게 문제였기에 우리는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다.

정찰 계획은 지극히 단순하다. 죽치고 앉아서 동향을 살펴보는 것.

아무리 길드원을 가장하고 있다 한들 놈들도 본격적인 활동에는 주의를 기울일 것이 분명한 이상, 던전 밖에서 별도의 행동을 하려면 밤 늦게 혹은 새벽 일찍일 것이다. 만약 그런 외적인 활동이 전혀 없다면, 던전 내에서 뭔가 개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자 구비를 위한 마을 방문은 분명 점심 무렵부터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의 시간대일 것라고 나는 추측했다.

놈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던전 내부에서 생활한다. 그마저도 밖에 나오는 건 경비 업무 정도.

이제부터 알게 되겠지만 그 외에 외부적인 활동이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제한적일텐데, 수개월 간 그렇게 긴장감 속에서 빛 없이 활동하면 정신적으로 지칠 수 밖에 없다.

이미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반나절 가까이 마을 술집에 보낸다는 발상까지 한 놈이 그 사실을 간과할 리 없다. 술집의 운영 시간까지 염두해서 최대한 빛을 쬐게 만든 뒤 돌아와서는 하루 정도 푹 쉬게 하는 것까지 염두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과연. 스트레스 관리라. 그 생각은 미처 못했군."

"저희야 뭐 아무리 던전에서 장기 활동을 한다하더라도 2주를 넘기기 힘드니까요. 놈들은 숨어있는 입장이니 반드시 필요한 상황일 겁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이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 방문하기 시작한 것만해도 수개월은 되었다고 하니, 그런 형태로 관리하지 않는 이상 극도로 예민해져서 저들끼리 트러블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가엔달의 말대로 경비를 서는 인력조차 나태해진 감이 없었다는 건 최소한 관리가 허술하게 되진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한 만큼, 내 의견에 더욱 힘을 실어줬다.

"자네는 정말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는 다방면으로 도가 텄군? 거기까지 생각 할 수 있다니. 놀랐네."

"그냥 뭐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추측 같아 보이진 않네만..."

뭔가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 끝에 우리는 십여 분을 뛰어 가엔달이 체크해두었던 안전한 감시 위치에 도착했다.

긴이 신전의 구조를 띄고 있다고해서 입구도 그런가 싶었는데, 의외로 입구는 흙과 풀더미가 얼기설기 엉켜있는 동굴과도 같은 형태였다. 하여간 이 세계의 던전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를 구조다.

"그럼 전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잠시 주변에서 눈에 띄는 흔적이 있나 확인 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무슨 흔적을 찾아보는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굳은 신뢰를 보내오는 가엔달에게 보답하기 위해 난 열심히 그리고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주변을 배회했다.

우선적으로 찾아보려는 건 단순하다. 장기간 거주하면서 채집할 법한 약용 식물이나 자재로 쓰일만한 덩쿨 및 땔감용 목재의 상태. 그리고 사람의 흔적같은 것들.

전생에서는 서바이벌의 서 자도 몰랐던 나였지만, 아실리에에게 집중 케어를 받으며 자란 지금의 나는 밤 중에도 정령의 도움 없이도 어느 정도의 흔적은 어렵지않게 추적할 정도로 능숙한 실력의 소유자다. 그것도 숲에 특화된 추적자. 인간의 몸으로 엘프의 기술을 터득한 내게 숲은 앞마당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해보니 나 좀 굉장할지도?

조사는 해가 떨어지고 숲 속에 완전히 어둠이 내린 뒤로도 20분 정도 더 이어졌다. 그 사이 던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경비를 서던 이들이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대화를 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온 정도다.

그리고 다시 감시 포인트로 돌아온 나는 탐탁치 않은 결과를 가엔달에게 보고해야 했다.

"저 놈들 주변에 건드린 게 없네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땔감으로 쓸만한 것들조차 녀석들이 머문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많이 널려있다. 나무를 벤 흔적도 없는 거보면 벌목을 해서 충당한 것조차 아닐 것이다.

"땔감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필품을 마을에서 구비하는데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다는 것도 문제고, 물자가 떨어질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시도조차 안 했다는 것도 문제로군."

놈들은 명백하게 남들 눈을 피해 숨어있다.

그 말은 어떤 대외적인 자금벌이 수단도 없었다는 의미이며, 꼬리를 잡힐까봐 도적질조차 안하고 그저 꾸준히 던전을 감시하는 길드원인것 마냥 수 개월을 버틴 놈들이라는 소리였다.

"마족이 자금까지 지원해가며 저 안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거나,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 3 세력이 있다는 이야기인건가..."

쎄한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가엔달 씨는 마족을 본 적 있습니까?"

"딱 한 번. 전장의 정찰조 의뢰를 맡았을 때 간접적으로 봤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기억을 되새긴 가엔달이 이어 말했다.

"마왕군에도 일개 병사는 존재하지. 근데 그 일개 병사가 타워실드로 이뤄진 방진을 몸으로 부딪쳐서 깨버리는 게 마왕군의 기본 전술일 정도로 강함의 정도가 달라. 물론 그 정도 마족들이라면 마법이 없는 이상 우리도 어렵지 않게 상대 할 수 있을 거라고 보네. 하지만..."

"이런 곳에 투입되는 마족이라면 일반 병사급은 아닐 거라는 게 문제겠네요."

"그렇지. 우리의 기준으로 따져본다 하더라도 일반 병사에게 맡길 일은 아니니까."

그래. 못 해도 특전사를 집어 넣어 놨겠지. 가엔달의 심각한 얼굴을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도 뭘 알고 있을 놈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으니까.

무엇보다 전쟁은 왕국만 하는 게 아니라 마족들도 하고 있다. 벌써 수년 째. 가엔달이 지금 상상하는 것처럼 막 엄청나게 강한 마족을 이런 비밀 임무에 투입하는 건 인재 낭비다. 전장에 투입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왕국군을 갈아엎는 게 제대로 된 활용법이지.

끽 해봤자 놈들 20명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마족 한 명 혹은 분대 규모의 마족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계획을 진두지휘하는 머리 하나 정도 더 있을수는 있겠네.

단언컨데, 그 정도면 좀 무리한다는 가정 하에 혼자서도 이길 수 있다.

"사람은 미지의 사태를 겪을 때 긍정적인 발상보다는 부정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음?"

"아침에 놀러 나간 애가 밤 늦게까지 안 돌아오면 애가 다른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좀 늦게 오는가보다 라는 생각보다는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걱정부터 한다는 소리지요."

"...우리의 생각도 너무 부정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로군."

솔직히 개 뜬금 없는 소리로 여겨질거라 생각했는데 참으로 생각이 깊은 가엔달이었다. 덕분에 난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가 생각한 걸 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네. 마족이라 하더라도 결국 나라를 이루고 있는 종족이고, 수 년 간 이어진 전쟁에서 저희를 압도하지 못 하고 있는 비슷한 생명체잖습니까? 정말 강한 마족이라면 전장에 투입해서 조금이라도 전선을 유리하게 만들기 바쁘겠죠. 여기 있는 건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특수부대 같은, 다섯에서 여섯 명 정도 되는...십인대 미만 규모의 인원일거라 판단하는 게 현재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보면 앞서 생각했던 20명을 다 찢어버릴 정도로 강한 녀석 한 명일 가능성도 매우 낮다.

비효율적이니까. 20명을 썰어먹는 놈보다는 5~6명 정도 썰어먹는 놈이 상대적으로 더 흔한 법이다. 그거로 충분하면 그렇게 쓰는 게 정상이겠지.

"대신 저희가 알 수 없는 모종의 형태로 마왕군과 직접적인 연락이 가능하거나,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있다고는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음...맞는 말일세. 마족이라는 사실에 지레 겁부터 집어 먹었군. 자네와 같이 와서 정말 다행이야."

한결 밝아진 가엔달의 얼굴은 그를 향한 나의 신뢰감을 더욱 상승시켰다. 자기보다 명백하게 어린 이의 의견도 허투루 듣지 않는 리더라니. 이번 의뢰가 성공하면 엔그림은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될 것이다.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진짜라는 소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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