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딱 한 번 멀쩡히 피할 수 있는 걸 안 피하는 대신 한 걸음 더 파고 들어 강제적으로 놈의 공세를 끊고 연격을 먹이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허벅지에 칼침 맞을 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살갗만 좀 베인 것으로 끝났기에 아무런 부담도 없다.
"네가 터져 죽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강화를 푸는 게 먼저 일까!"
"크아아악!"
놈은 강하다. 하지만 나보다 아주 조금 더 강하다. 그마저도 기술적으로 강한게 아니라 육체적인 능력이 좀 더 강한 상태다.
결국 기술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오라아앗!"
내 뒤 켠에서 익숙한 외침과 함께 바닥이 울리고 굉음이 터져나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예카트리나의 워 해머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끔찍한 파열음은 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족 놈들이 맞지는 않은 듯 하다. 이어져 들리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일행들이 마족과 전투를 치르고 있음을 알려왔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놈이 나를 두고 협공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어중간하게 끼어들면 자신이 그들을 지켜야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확신했기에 내린 판단일 것이다. 더 심한 경우는 오히려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될 정도의 실력이라 판단한 끝에 내린 결단.
놈이 내린 결론이 그렇다면 저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를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난 내 뒤를 보며 감히 한 눈을 판 놈을 더욱 몰아 붙였다.
"한눈? 한눈을 팔아?! 그럴 시간이 있냐?! 아주 씨발 내가 만만하지 이 새끼야?!"
"크윽! 왜 하필 이럴 때 이 따위 방해가!"
"못 돼먹은 짓거리를 했으면 내가 왜 그랬을까를 놓고 후회해야지 어딜 남 탓을 하고 있어!"
입으로 떠드는 힘조차 아끼고 싶지만 여유를 보여 놈을 초조하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덕분에 칼 피하며 마법사 놈 살펴보고 이 놈까지 상대하려니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법이지!"
"뭐라 지껄이는거냐!"
놈의 얼굴에서 혈관 하나가 터졌다. 내 공격을 막아내는 움직임만 그대로일 뿐, 그런 현상이 신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단 눈으로 보는 것 외에도 휘몰아치는 마력이 느껴졌다. 오감이 놈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마력의 소용돌이에 반응한다. 피냄새 말고도 뭔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입 안에서도 한 평생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맛이 느껴질 정도다.
"보라색 맛 났다! 네가 터지는 게 먼저일 거 같구나!"
"크아악! 마법사아아아!!"
"끝났습니다!"
끝난 건 놈의 목숨이었구요!
마법사의 외침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녀석의 몸을 터트리기 위해 휘몰아치던 무모한 강화가 사라지는 걸 눈치채는 것보다도 먼저 검이 움직였다.
놈의 목을 떨궈내기 위해 날아간 검이, 그걸 막으려고 들어 올려진 놈의 검을 그대로 밀어버리며 목적을 달성한 것은 찰나의 순간에 맞춰 강화 효과가 완전히 빠져 버렸기에 나올 수 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오감에 뭔가 하나 덧대어진 것만 같은 오묘한 느낌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예배당 전체로 뻗어져 나간다.
우욱. 멀미할 거 같아.
"이건 또 뭔 개 같은 상황이냐..."
저 마법사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건가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갔지만, 이질감과 현기증만 느껴질 뿐 신체 능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감각이 둔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체불명의 그 무언가로 인해 평소보다도 마력이 더 짙게 느껴진다.
덕분에 난 지금 마력이 물처럼 형상화 되어 보이는 지경이다.
"엘드미아! 괜찮나!"
"예! 마법사를 치겠습니다!"
뒤에서는 아직도 전투 중이다. 보여서는 안 되는 색이 보이는 거 같고 나서는 안되는 냄새와 맛이 느껴지는 기분이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냥 그 정도였기에 난 허물어지는 마족 놈이 떨군 검을 집어들고 게이트 앞에 있는 마법사를 향해 달려갔다. 내 검은 놈이 아주 작살을 내놔서 언제 부러질지 모를 상태였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내 추억의 검이 저렇게 가는구나 씨발!
"크윽! 잊지 않겠다!"
건방진 새끼가 여기서 죽을 놈이 다음을 기약하고 자빠졌어! 오히려 내가 내 검의 원한을 잊지 않아야하는 상황이거늘!
"그게 네 유언이다 이 자식아!"
여섯 걸음. 내 능력의 상한선까지 강화를 했는데도 그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제발 놈이 무영창같은 개짓거리는 할 수 없길 바라면서 두 걸음을 내딛었을 때 놈의 손으로 모여드는 마력이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무영창은 아닌지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지만 무슨 랩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 빠르다.
실타래마냥 예배당 전체에 퍼져있는 마력 중 일부가 놈의 손아귀로 말려들어가는 모습이 안 그래도 산만한 감각을 더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진짜 가지가지...으아 씨발 깜짝이야!"
그 중 가장 굵은 실로 보이는 마력 한 줄기가 내 옆을 스쳐지나가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거기에 대고 검을 휘두르자, 떨어지는 낙엽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던 마력 줄기가 갑자기 쏘아진 화살처럼 놈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내 강화된 감각으로 느껴도 저 정도 속도인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콰앙!
"우와아악?!"
그리고 그대로 폭발을 일으키며 놈의 마법이 실패했다.
"뭐, 뭐야 이건?"
내 눈을 의심할 것도 없이 결과가 나와버린 탓에 하마터면 달리는 것도 잊을 뻔 했네. 내가 지금 완성되어가는 마법을 검으로 끊은 건가?
"마, 말도 안돼. 대체 무슨 수작을?!"
"내가 물어보고 싶다! 나 뭐 한거냐?"
다시 두 걸음을 더 내딛으며 외친다. 제발 저 게이트를 타고 도망친다는 발상을 못할 정도로 당황했길 바라면서.
아직 당황이 남아있는 놈의 표정을 보아하니 가능성이 있을 법도 했는데, 거기에 공포가 얹어지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하다.
"제, 제기랄!"
아마 놈이 쓰려던 마법은 날 일시적으로 막는 목적에 불과했나보다. 그러니까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외쳤겠지만, 아무튼 놈은 내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에 더 신경을 쓴 건지 주저없이 게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코 앞에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미 놈의 몸이 반은 사라져가기 시작한다.
저걸 쫓아가도 괜찮나?
마족은 주저없이 게이트를 고정시키려고 했다.
아군이 있어서?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게 성립하려면 놈들을 따라 우리가 게이트를 넘어가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병력이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즉 저 너머엔 정체불명의 마족들이 부대 단위로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고정하는데 이렇게 오래걸렸으니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게이트를 닫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더 이상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놈을 따라 게이트에 뛰어 들었다.
전신의 솜털이 급성장 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그게 솜털이 아니라 내 마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닥이 마치 거대한 천 조각 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천 조각? 어쩌면 물 속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예민해진 감각은 마력을 그렇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진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 감각 속에서 게이트의 반대편이 다가옴을 깨달은 난 결국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씨발 정신없네 진짜!"
몸보다 먼저 튀어나간 손과 검 끝에 확실한 저항이 느껴진다. 놈의 키를 생각해서 어림짐작으로 휘둘렀지만 그건 분명 다른 놈들 목을 벨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온 난 놈의 시체를 보고 성공에 기뻐할 틈도 없이 얼을 타버렸다. 솔직히 기겁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정말 잘한 수준이다.
"와...저건 또 뭐냐 대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마족들과 그 너머에 있는 정체불명의 구체였던 것이다.
그건 형태가 온전하다고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유리 구슬 안에 갇혀있는 듯한 불길한 무언가였다. 어쩌면 지금 내 감각이 맛이 가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방금 내 손에 목이 날아간 마법사 놈이 마법을 쓸 때처럼 저 구체로 주변의 마력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이 게이트로 운반하려던 게 저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인간이다!"
"잡아! 계획이 틀어졌다!"
누가 내렸는지 알 수 없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충 봐도 수십 명에 달하는 마족들이 나를 노리고 달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몇몇은 저 정체불명의 거대한 구체를 보호하는 것처럼 가로 막았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결국 저것도 아까의 마법처럼 터지는 물건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
"틀렸어! 네놈들이 잡아야 할 건 내가 아니야!"
의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당장 주변에서 흘러 들어가는 마력의 줄기에 칼질을 하며 외쳤다. 아까처럼 베어지자마자 구체를 향해 쏘아지는 마력 줄기들이 마족들을 관통했지만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게 좀 아쉽다.
그런 마음 속에서 검을 거꾸로 들어 투창 던지듯 자세를 잡자, 나에게 달려오던 마족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내 판단이 옳다는 증거다.
"작은 엘드미아를 건드리면 아주 좆 된다는 걸 잊지 마라!"
온 힘을 다해 던진 검이 공기 뿐만 아니라 투척 경로에 있던 마족놈의 머리통 하나마저도 반으로 쪼개버리며 구체를 향해 날아간다.
내 손에서 검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날 잡기위해 달려들던 놈들이 사방팔방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하는 꼴이 영 좋지 않은 결과를 암시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게이트로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그런 판단보다도 빠르게 일어난 엄청난 폭발이 나를 게이트로 던져넣은 탓에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