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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62화 (62/412)

검에는 정말 아무 기능도 없고 그냥 튼튼할 뿐인거니 이상한 기대는 하지 말라는 발쿤의 의미없는 조언이 조금 이어진 뒤에야 나는 드워프 지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보니 긴은 그대로 머물러서 간만에 회포나 풀려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검이 튼튼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닌가? 얀스의 롱 소드는 튼튼하지 못해서 작살났는데?

발쿤이 저리도 걱정하는 걸 보니 이세계 전사들은 너무 이능적인 힘에 익숙해서 검에도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때 도적 새끼들도 마검이라는 착각에 눈이 돌아가긴 했지."

새삼 내 첫 살인에 기여한 병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발쿤이 우려하는 게 그런 영역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면 뭐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우연히 드워프와 인연이 닿아 엄청난 검을 헐값에 얻는 기연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중2병 걸린 꼬맹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면 충분히 걱정할 만하다.

당연히 정신연령 30세를 초과한 엘드미아는 그딴 망상을 품지 않으니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 거 없어도 이미 발쿤이 몇 번이나 언급한 튼튼하다는 특징만으로도 싱글벙글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족 놈과 싸울 때처럼 휘두르는 것 정도로 내구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게 분명하니까.

물론 동화주고 샀던 롱 소드가 금화로 바뀐 건 너무 갭이 크지만, 기회가 왔는데 안 살 이유도 없다. 돈이 없었으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두둑하게 금화까지 받아 놓은 입장에서 밥줄이자 생명줄인 검에 돈 쓰는 걸 아낀다는 건 정신나간 짓이지.

"그렇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검을 차고 온거구나?"

곧 있을 제국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라그니스의 자택을 방문하자마자 반 강제적으로 건네주게 된 검을 찬찬히 훑어보던 그녀가 내 자초지종을 다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물건을 겨우 금화 한 개에 팔다니. 정말 드워프들의 감각은 이해를 못하겠다니까. 덕분에 네가 좋은 무기를 쓰게 된 건 잘된 일이지만."

당연히 그녀가 한 평생 검이라고는 제대로 만져보지도 않았는데 명검을 구분할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드워프들의 대장기술에는 연금술과 마법이 함께 한다고, 라그니스는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덕분에 오히려 일반적인 전사보다 마법사들이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의 가치를 더 명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다나? 기왕이면 기겁하며 빼앗아가다시피 하기 전에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

"난 또 어디서 감당 못할 물건을 주워왔거나 과소비라도 한 줄 알았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 생각없는 놈은 아니잖냐..."

"수도 생활에 물들어서 방탕한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이 수두룩해."

"그렇게 절제없이 사는 놈도 아닌데 말이지..."

아무튼 내 새로운 검으로 인해 일어난 작은 해프닝을 제외하면 우리의 이야기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별다른 변동사항은 없었다. 지난번에 날 안내해줬던 레니사라는 이름의 여기사와 내가 수행원으로 동행하고, 라드넬반데스가 용사를 구경하기위해 동행한다는 정도의 구체적인 사안을 전달받은 게 대부분이었다. 사용인들을 다 합친다해도 10명을 겨우 넘기는, 귀족치고는 굉장히 조촐한 구성이었다.

"변경백이라 하더라도 내가 겪은 일이 있으니까. 어차피 다 아는 마당에 쓸데없이 몸집만 키워봤자 비웃음만 당하겠지."

귀족들의 수행원과 사용인은 결국 권력의 과시다. 이게 또 단순한 허영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를 해준 상대방에 대한 예의에도 포함된다.

하루 이틀 파티만 깔짝하고 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국 측에서 제시한 것은 일주일 정도의 교류였는데, 보통 그렇게 묵게 될 경우 아무리 약소 귀족이라 하더라도 20명 이상의 사용인을 대동해서 움직이는 법이다.

그만한 인원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와도 그걸 먹이고 재워 줄 정도의 역량이 된다는 것이 포인트인, 내 감각에서는 매우 사치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격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적게 가면 초대한 자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것마냥 여기고 예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라그니스는 그걸 감안하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사실 스승님도 용사를 구경하러 가겠다고 하셨지만 내 체면을 위한 거 아닐까? 보고 싶었다면 진즉에 보러 갈 수도 있는 분이니까."

그야말로 소수 정예라는 느낌. 물론 그래봤자 변경백의 이름과 라드넬반데스의 명성을 제외하면 나나 레니사는 별 거 아닌 수준에 불과했지만 라그니스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굳이 부정할 이유도 없기에 그냥 웃어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간단한 담소 후 무탈하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에서조차 레비엥 변경백의 수행원으로 간다는 이유로 업무에서 제외되다시피 한 나는 폐던전에서 느꼈던 감각을 되새기는 식으로 훈련을 하며 시간을 떼웠다. 아무래도 마력을 다루는 내 입장에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이 감각이 필수일 것만 같았기에, 검술을 단련하는 시간마저 쪼개가며 열심히 복습했다.

왠지 이거 열심히 연습하면 공간은 몰라도 마력은 가를 수 있을 거 같거든. 그게 뭔 도움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마력쓰는 마족놈들이 있으면 같이 갈라져 죽는 상황 정도는 바랄 수 있지 않겠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의욕도 충전되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보았지만, 당연히 그런 노력 조금 했다고 결과가 나올 나였다면 진즉에 날아다녔겠지.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아쉬움만 가득 찬 채로 시간이 흘러 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도착한 라그니스의 자택 앞은 두 대의 마차와 거기에 짐을 싣는 사용인들로 인해 정말 보기 드문 혼잡함을 야기하고 있었다. 몇 안되는 호위병들을 사열해서 무언가의 내용을 하달하던 레니사가 나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받아주며 라그니스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리자, 지난 번에 들었던 위엄을 흉내내는 라그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들어가신다."

대답과 동시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 라그니스가 크게 웃으며 반겨줬다.

"뭐야 그게!"

"아침부터 바쁜 변경백님께 큰 웃음을 드리기 위한 회심의 일격이지. 이게 내가 일주일 간 입고 다녀야 하는 옷인가?"

쓸데없이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과장된 인사를 건넨 뒤 그녀 옆에 세워진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의복을 바라보자 라그니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입어야하는 옷가지들도 준비해준다고 해서 좀 불안했던 거에 비해 굉장히 준수한 의상이었다.

"가문의 기사들에게 지급해주던 복장이야. 수도에서 제작했던 덕에 도안이 남아 있었지."

"그래서 레니사도 비슷한 걸 입고 있었던 거였군?"

다른 건 알 수 없어도 레비엥 가문이 제복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가문이라는 건 틀림없다.

하얀 제복에 와인색 반 망토라. 디자인만 놓고보면 암살 참 잘하게 생겼지만 그건 오롯이 나만의 감성인 듯 하다.

"음...네가 워낙 덩치가 산만해서 어떨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옷걸이가 괜찮네?"

평균 신장 165에 기사 씩이나 되는 사람들도 잘해봐야 180이 안되는 마당에 홀로 190을 바라보려 하고 있으니 독보적이긴 하다. 우리 부모님도 나름 키가 컸던 걸 생각해보면 유전적인 부분도 무시 못하겠지.

생각해보니 예카트리나도 거의 나와 비슷한 눈높이였지. 러빌 사람들이라고 딱히 장신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그녀도 사실 엄청 잘 먹고 잘 큰 귀한 집안의 자식이 아닐까?

"엘프도 인정한 미남 아니겠어? 이 정도는 되어야 꾸미고 다니는거지."

"거짓말하지마. 아실리에 씨가 미남은 아니라고 항상 말하고 다녔는데."

"...편지에 쓸 내용이 늘었군."

근데 대체 뭔 대화를 했길래 얘한테 항상 그런 말하는 상황이 나온건지 궁금했지만 늑장을 부릴 수도 없는 상황이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하고 출발 할 채비를 마쳤다.

"라드넬반데스 경은?"

"다른 볼 일이 있어서 게이트에서 합류하시기로 했어."

"그럼 그 때까지는 내가 잘 생긴 얼굴과 풍채로 행렬을 빛내야겠군. 말도 멋진 놈으로 준비해줬겠지?"

"뭔 헛소리야. 넌 나랑 같이 마차타고 가야지."

"왜죠?"

"수행원이니까."

"아니 그건 레니사도 있는데?"

"넌 셰릴 전속집사 일 하면서 그래도 좀 배웠을 거 아냐. 레니사는 태생이 기사라서 그런 건 못해."

세상에! 내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었구나!

"전 무보수 노동은 안합니다 레비엥 변...악! 아파! 그만!"

"어련히 알아서 챙겨 줄테니 입다무세요, 엘드미아 씨?"

그래도 챙겨준다니까 착한 내가 참는다...!

"좋아. 변경백께서 두 말 할 리 없으니 믿는다."

그렇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준비하자 이제와서 벙찐 표정을 지어보이는 라그니스가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서두르라는 의미로 까딱까딱 손짓하자 라그니스는 그제서야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도 잘 지켜줘."

"꼴에 제국인데 뭔 일이 생기겠어?"

최근 이런 말 할 때마다 뭔가 일이 일어났던 거 같은 기시감이 느껴지는데...아니겠지.

그래도 제국이고, 무려 용사를 보러가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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