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마족들은 게이트로 군대조차 한 방에 옮기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한다지만 인간들에겐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그래도 한 번에 수백 명을 옮기는 게 안 될 뿐이지, 이동 수단으로써의 역할은 제대로 해낸다. 덕분에 이 어중간한 판타지 세계에서 게이트는 비행기와 전철 따위는 코웃음치며 씹어먹을 수 있는 절대적인 교통 수단 겸 운송 수단으로 군림하고 있다.
공간을 도약하게 해주는 이동인 만큼 너무나 당연하게도 더럽게 비싸다.
말로는 관리 비용이랑 수준 낮은 마법사라도 아무 문제 없이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일종의 배터리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꽤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탓이라고 하는데...글쎄올시다. 초기 투자비용만 제외하면 오히려 식대가 만만치않게 깨지는 비룡보다 훨씬 싸게 먹힐 거 같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게이트를 반대편 게이트랑 연결해서 아예 고정시켜 사용하던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그 때 그 때 통로를 연결해서 쓰는 방법이 있다는데, 일반적인 게이트들은 당연히 후자다. 무슨 지하철 호선 나누는 것도 아니고, 관리와 유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전자와 같은 게이트는 일종의 핫라인이라서 어지간한 귀족들도 이용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왕가 혹은 그에 준하는 이들의 특권이다. 왕의 허락이 없이 사용하면 반역죄로 즉결 처형도 가능하다고 하니 참으로 살벌하기 그지 없다.
"오늘 우리가 사용할 게이트이기도 하지."
자택에서 나올 때와 달리 묘하게 긴장한 라그니스가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한다. 다시금 힘을 쌓는 중이라하더라도 변경백이라는 호칭이 결코 꿀리는 위치는 아닐텐데도 그녀는 평소에 보기 힘들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납치도 당해본 마당에 뭘 그렇게 긴장해? 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인 게, 이번 제국 방문에는 그녀 입장에서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해도 그녀는 왕국 최전선의 변경백이다. 그건 비단 왕국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족 대 인류 간 전쟁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이대로 왕국이 버틸 수 있다면 언젠가는 용사의 도움을 받아 전장에 나서서 국토를 수복해야하는 의무를 가진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마법적 재능을 용사와 비교된 상태에서 제국을 방문하고 자신의 실력을 내비치는 건, 모르긴 몰라도 여러모로 의의가 클 것이다.
게다가 용사잖아? 잘 되면 큰 힘이 되어주지 않겠어?
"너무 긴장하면 될 것도 안 된다. 심호흡 좀 해."
"그, 그렇게 눈에 띄어?"
"아주 목각인형같다. 그 어느 때보다 예쁘고 위엄 넘치니 조금은 긴장을 풀어라."
"...그, 그래?"
결국 모든 인상의 첫 단추는 외모와 행동이다보니 속물적으로 보일지라도 당장 칭찬해줄 수 있는 건 그거 뿐이라고 생각해서 말해봤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래. 그 정도면 용사 주변에 미녀들만 모여있는 게 아닌 이상 용사도 혹 할거니 아무 걱정..."
"뭐라는 거야 미친 놈아!"
-짜악!
얼굴을 붉히며 웃던 라그니스가 급정색을 넘어선 분노를 터트리며 번개 같은 속도로 귓방망이를 후려쳤다.
진짜, 진짜 더럽게 아파서 순간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너무나도 진심으로 화나 보여서 화도 못내고 반박도 못한 채 그대로 맹목적인 사과를 한 뒤 쭈그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대체...왜...?
◈
내 볼따구에 시뻘건 손바닥이 남은 뒤로 매우 매우 불편한 가시 방석이 되어버린 마차는 분노 상태의 라그니스와 쭈그리인 나를 태운 채 빠르게 달려 게이트에 도착했다. 어디 비밀스럽게 숨겨놓았나 싶었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수도 중앙에 있는 게이트 홀에서 조금 더 엄중히 지켜지고 있을 뿐이었다.
수도에 살면서도 매번 지나가다가 한번 겉만 훑어보는 게 고작이었던 곳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지만...분노한 라그니스의 눈치를 보느라 티도 내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까지 도달해서 마차를 내리자 정말 오랜만에 보는 라드넬반데스가 반겨주었다. 1년 만임에도 한결 같이 거대하고 전사같은 육체의 마법사는 익숙하게 봐왔던 것보다 좀 더 고급져보이는 무장을 한 상태였다.
"오랜만이군! 근데 자네 얼굴은 왜 그 모양인가?"
아직도 욱씬 거리는 게 착각은 아니었나보다. 나중에 부어 오르는 거 아닐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드넬반데스 경. 이건 그...어쩌다보니."
"...쯧쯧. 뭔지 몰라도 조심하지 그랬나."
대성한 배틀메이지는 보지 않은 상황을 얼마 안 되는 증거만으로 추측할 수 있는 우월한 식견의 소유자인 것인지, 나와 라그니스를 두고 딱 두 번 눈동자를 굴린 라드넬반데스는 혀를 차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 손길이 마치 부당한 폭력에 휩쓸린 날 위로해주는 것 같아 감격할려는 그 때.
그리 덩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보다 큰 라드넬반데스가 내 귓가에 살짝 고개 숙여 속삭인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람이 눈치가 없으면 몸이 고생하는 법일세. 여자를 대할 때는 신중. 또 신중해야 해."
"아니, 제 억울함을 눈치채고 격려해주신 게 아닙니까?"
감격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대신 억울함이 치솟아서 반사적으로 반박하자 라드넬반데스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 장담하건데 자넨 억울할 게 없어. 내 말 명심하게나. 뭔지는 몰라도 나중에 꼭 그 때의 상황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너무나도 확고하고 결연한 눈으로 대답해서 차마 더 이상 반박은 못 했다.
허! 참나! 정신연령 30세를 초과한 이 몸이 눈치가 없다고? 허! 고민은 해보겠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
...없을 걸?
"세자 전하께서 잘 다녀오라고 하시더구나. 마음 같아서는 직접 배웅해주고 싶지만, 이번 초대는 왕국을 경유해서 온 게 아닌지라 체면 상 그러기 힘드시다면서 말이야."
그런 나를 두고 자연스럽게 라그니스에게 이야기를 전달한 라드넬반데스는 그 뒤로도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는 듯 싶었다.
물론 난 거기까진 알 필요가 없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충 초대 방식부터 해서 제국의 의도가 뻔하지만 최대한 잘 해보자라는 식의 내용인 걸 보아하니 라그니스가 신경 쓸 일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겠더라.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군요 에가 경."
그렇게 둘이 대화하는 동안 실질적인 경호 책임자인 레니사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아마 눈 인사만 하고 넘어간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변경백의 경호를 준비하는데 당연한 일이죠. 짧은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약식으로나마 이야기는 전달 받았습니다. 비서 겸 경호를 맡게 되셨다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원래 레비엥 가문을 섬겼던 사람이라더니 역시 남다른 예절과 충성의 소유자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에 가까운 내가 비서 역을 맡는다는 게 참 애매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라그니스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걱정마시지요. 오가토르프 가에서 배운 게 있으니 변경백의 이름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후후. 든든하기 그지없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주일은 같은 제복을 맞춰 입은 동료인데 호의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다.
"그럼 게이트를 열겠습니다."
하하호호 하며 짧은 우애를 다지는 사이 이야기를 정리한 라드넬반데스와 라그니스는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일행을 대기 시켰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짓하는 그녀 옆에 다가서자 라그니스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촌티나게 게이트 타는 거로 허둥거리진 않겠지?"
순간 바로 며칠 전에 게이트 타고 마족령까지 갔다 왔다고 이야기 할 뻔 했다. 그래도 나름 기밀 의뢰였는데 순식간에 폭로될 뻔 했네.
"게이트 타는 거 보다는 제국령은 어떤 모습일지가 더 궁금하네."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적어도 두 번은 탈 거니까 잠깐은 주변을 볼 수 있을거야."
"응? 두 번? 한 번에 가는 게 아니야?"
"그런 장거리 이동은 인류의 마도학으로는 아직 불가능해."
호오. 만능인 줄 알았더니 의외의 제약이 존재했었군. 마족들도 그런 장거리 이동은 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신기해 하는 사이 게이트 좌표를 고정시킨 관리자가 수신호를 보내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뭐, 이미 한 번 타봤던 만큼 대수로울 건 없었다. 그냥 걸어가는 게 전부였으니까. 혹시 몰라서 마차에 탑승한 인원들이 전부 내려 움직이느라 시간이 살짝 걸릴 뿐이지.
"우욱 씨발."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또 다시 감각에 혼란이 오는 터라 영 좋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살면서 게이트를 탈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 걸 감안하면 딱히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어쩌면 마력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각이 죄다 뒤틀리는 기분이군."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냥 살짝 현기증이 일어나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제국령 어딘가에 도착해서 뒤의 행렬이 따라오는 사이, 다음 게이트가 준비되는 동안 내친김에 마력을 운용하는 거에 대해 무언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싶어 꼼지락 거려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왕국 게이트와 달리 제국령의 게이트는 미리 준비가 되어있던 것인지 더 빨리 개방되었고, 뒷 사람들이 다 오기도 전에 우리는 다음 게이트를 타고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 밟아본 제국의 땅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화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