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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64화 (64/412)

제국.

원래 이름보다 그 한 단어로 더 많이 불리며 인류 영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의 국명은 에슈누아라고 한다.

나도 살면서 딱 한 번 들어봤다. 바로 지금.

"제국 에슈누아의 수도 비스팀 텔 누아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이티스엘 왕국의 변경백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변경백."

분명 원래대로라면 훨씬 길었을 듯한 소개를 약식으로 내뱉으며 금빛 장발이 잘 어울리는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남자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라그니스를 맞이했다.

그래 씨발. 꼬와서 이렇게 표현한거지 겁나게 잘 생긴 귀족이 매력 넘치는 미소로 맞이한 게 사실이다. 그야말로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꽃미남이라서 순간 아실리에가 왜 날 보고 미남으로 분류하지 않았는지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이세계 미남 허들 존나 높네 진짜. 물론 그 정도 외모가 흔한 게 아니니 나도 이제서야 깨달은 거겠지만, 너무 격차가 커서 화가 날 정도다.

"나는 에스델 라 벤데라고 하오. 가문의 이름으로 황제 폐하의 땅 일부를 수호하고 있지."

제국의 영지는 모두 황제의 것이다. 그래서 지도에 표기가 되는 작은 마을 하나까지도 황명 아래 이름이 지어진다.

하지만 딱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죽은 이의 위업을 기리거나 후작에게 영토를 줄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즉, 저 사람이 죽은 사람이 아닌 이상 후작이라는 말이다.

"직접 맞이 해주실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대한 환대 감사드립니다 벤데 후작 각하. "

게이트에서 우릴 맞이해준 건 벤데 후작 혼자였으나 성대하다는 라그니스의 표현에는 틀림이 없다. 제국의 후작 정도 되는 이가 접대를 맡으면 그 측근이 우선 손님을 맞이해서 후작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아마 이 만남 이후에는 부하를 시켜서 숙소로 안내하고 다시금 정식으로 자리를 가지겠지만 그런 자리가 마련되기도 전에 직접 얼굴을 비춘다는 건 이례적인 행동이라고 알고 있다.

"마족의 위협으로부터 대륙을 수호하는 이들을 맞이하는데 당연한 일이지.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용사의 출정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있으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의 대답에 라드넬반데스와 라그니스 모두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후작이라 하더라도 제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사과라는 말을 함부로 담을 수는 없다.

즉, 저 말은 황제가 전하는 말이다.

그것도 한낱 왕국의 이름 뿐인 변경백에게.

"...감사합니다."

라그니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 뿐이었으리라. 조금 앞서 나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바라보는 라드넬반데스의 표정에 그늘이 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의중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고민을 멈추기로 했다.

제국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지도, 그로 인해 라그니스가 지금 무슨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는지도 내가 생각할 게 아니다. 라그니스가 할 일이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애였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게이트 홀을 거닐어 밖으로 나온 끝에 벤데 후작은 자신의 측근이라 칭한 남자를 소개한 뒤 자리를 떠났다. 다시 올라탄 마차는 그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난 아직까지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그니스는 가만히 내버려 둔 체 제국의 수도를 구경했다.

솔직히 도시 자체는 왕국과 큰 차이가 없어보였지만 공원같은 게 좀 더 많이 보이는 점이라던가, 시민들의 평균적인 복식의 수준은 차이가 많이 나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륙 한 켠에서 마족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평화롭고 풍족한 도시다.

"태평하게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안드는 것 마냥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리는 라그니스에게 난 당당하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근데 제국이라해도 수도는 별 거 없네. 비슷비슷하다."

정강이를 걷어차려는 라그니스의 시도를 요리조리 피하다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목적지라는 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결국 마차에서 내려 안내를 받으면서, 나는 솔직한 심정을 입 밖으로 내버렸다.

"목적지라는 게 아카데미였어...?"

"용사가 교육을 받고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 난 개인 교습같은 걸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 훈련이 진짜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물론 셰릴도 아카데미는 다니고 있지만...용사잖아? 뭐라도 다를 줄 알았지. 근데 정규 교육과정을 밟고 있다니, 아무리 나이만 놓고보면 그럴 수 있다치더라도 좀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보니 용사는 정확히 몇 살인거야?"

"이제 재작년인가 작년인가에 성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네. 나랑 동갑이거나 한 살 더 많았을거야."

세상을 구할 용사이자 자신의 영토를 수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할 지도 모르는 변수일텐데도 별 관심이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아무튼 라그니스는 그렇게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지난 번에 너랑 이야기하고 알아보니까 용사가 발탁된 게 4년 전이더라."

"뭐야 생각보다 얼마 안 됐네?"

지난 번에 분명 6,7년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던거 같은데 결국은 내 체감 시간에 불과했었나보다. 그렇다는건 12살에서 13살 때 학습과 성과를 모두 보여준 희대의 천재라는 소리인가?

"그러게. 진짜 벌써 한 10년은 된거 같은데 말이야. 4년 전이면 네가 나랑 처음 만났을 때잖아?"

"그...렇네? 그 양아치 대장. 맞지?"

발길질 한 번으로 죽여버린 게 분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후후. 맞아. 아무튼 용사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성과를 보여줬나봐. 밖으로 도는 소문은 나쁘지 않다더라."

라그니스가 이야기해준 것들은 도적을 섬멸했다, 몬스터 군락을 토벌했다 같은 식상한 내용들이었지만 그 횟수나 규모는 꽤나 놀라운 수준이었다. 겨우 4년 동안 제국 인근의 좋은 일은 대부분 혼자 도맡아서 한 수준에 가깝다는 게 내 냉정한 평가다.

"왕국과 협력해서 연합군으로 전선에 출정하는 것도 머지 않았다고하니...좀 기대가 되긴 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기대를 많이 해도 된다."

"그렇게까진 아니고. 어차피 기대 미만이면 우리 엘드미아 에가 씨께서 어떻게든 해주지 않겠어?"

"신이 점지한 용사가 기대 미만이면 이미 볼장 다 본 거 아닐까."

나도 환생이라는 특이 케이스이다보니 선택받았다면 선택받은 축에 들어가겠지만 결국 전쟁에 휘말리기 전까지는 지극히 평범했다. 마왕의 대적자라는 숙명을 타고나는 용사하고 비교되는 수준은 아니지.

"너도 특출나다면 특출난 편이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특출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렇다치더라도 조금 튀는 놈으로 대처가 가능한 게 용사라면 그건 그것대로 실망스럽지 않겠니?"

난 많이 실망할 거 같은데.

라그니스는 그것도 그렇네라는 싱거운 대답이나 하며 웃어보일 뿐이었다. 담소를 나누며 아카데미를 거닐자 저 반대편에서 생판 처음 보는 안경남이 뛰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라드넬반데스의 반응과 표정을 보아하니 저 남자가 이 사건의 원흉임이 분명하군. 해맑게 웃으며 활기 넘치게 다가온 남자는 그대로 라드넬반데스의 육중한 꿀밤을 얻어 맞아버렸다.

"으껙!"

"이 모자란 놈!"

사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냥 재능있다고 칭찬하기 위해 자신이 본 사람 중 재능있던 사람을 언급했을 뿐 아닌가? 이렇게 거대한 나비효과로 이어질거라고 상상하지 못한거냐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상상하지 못했는데요 라는 대답말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의 불합리함이다.

그런데도 라드넬반데스는 그가 실언을 했다고 확신하며 정수리를 쪼갤 기세로 연신 꿀밤을 먹였고 안경남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머리를 막아야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마법사라는 게! 말을! 함부로! 하고!"

그래도 나름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 거 같으면서도 만나자마자 저렇게 반가워하며 다가왔는데 연신 쥐어박히는 꼴을 보고 있자하니 영 마음이 편치는 않았는지, 결국 라그니스가 나선 뒤에야 안경남의 두개골은 안녕할 수 있게 되었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어 라그니스. 그나저나 본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그새 성장했구나! 네 재능은 정말 볼 때마다 놀랍기 그지없어."

사제 지간이다보니 아무래도 라그니스와도 구면이었나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탓에 난 결국 어중간하게 안경남의 이름도 알지 못한 상태로 그들을 따라다녀야만 했다.

"아카데미에 귀족 특권을 통해 참관하는 형태로 지내게 될 거야. 숙소에 대한 건 따로 이야기 들은 게 있니?"

"아뇨. 벤데 후작께서 준비하셨다는 이야기 외엔 딱히 들은 게 없어요."

"귀족이 준비해주면 알아서 잘 해주겠지. 그러면 마침 다음이 내 수업 시간이니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나랑 같이 가서 용사를 보도록 하자."

"빨라서 좋네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떤 과목을 가르치시는 건가요?"

"하하하! 스승님의 제자가 가르칠 게 뭐가 있겠어."

넉살 좋은 웃음 끝에, 마치 사악한 훈련 조교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인상을 바꾼 안경남이 말했다.

"실전이지."

저, 저 웃는 꼬라지 봐. 저 놈도 정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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