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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65화 (65/412)

지나가며 만나는 교수나 학생들의 인사를 조합하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지들리 산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들리는 라드넬반데스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는 배틀메이지였다.

라드넬반데스가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배틀메이지라고 해서 그의 제자들이 모두 배틀메이지인 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마법과 검술 두 분야 모두에 정통한 초인 중의 초인인 탓에 전사인 제자도 있고 마법사인 제자도 있고 아주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마냥 천재이기만해서 그렇게 대성한 것도 아닌지 가르치는 실력도 남 다르다고 하니, 나랑 자주 볼 일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왕국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굉장한 노인장이었다.

"오늘은 마족과 전선을 맞대고 있는 이티스엘에서 손님이 오셨다. 이야기를 미리 들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앞으로 일주일 간 함께 지낼 예정이니 알아서 잘하도록."

그런 라드넬반데스도 배틀메이지가 되고 싶다고 들어온 지망생들이 보이면 일단 재능부터 확인한다는데, 그걸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에 초빙되어 일타 강사로 활동할 정도면 헤실거리는 얼굴과 달리 굉장한 실력자이긴 하겠지.

"특히 에테네라. 너 말이다 너."

연병장에 모여있는 서른이 넘는 학생들 중 유독 한 명만 콕 집어서 지들리가 말하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라드넬반데스는 학장과 대화할 게 있다고 자리를 피한터라 연병장에는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서른 명 정도와 우리 밖에 없는 상태였다. 가끔씩 오고가는 인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교수진이나 관리인원에 가까워 보였다.

"에이, 내가 그래도 사교적인 건 선생님보다는 잘 하지."

비록 생도들 앞에서 위엄은 좀 떨어지더라도 말이야. 에테네라라고 불린 학생이 능글맞게 반박했음에도 뭐라 안 하는건지 못 하는건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지들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카데미가 어떤 분위기로 굴러가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그냥 학교잖아? 그것도 이세계 학교가 아니라 전생의 학교.

신분과 계급 차이가 명백한 판타지 세계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정말 낯설다.

"이티스엘의 변경백이신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이시다."

나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닌지 미묘하게 굳어있던 라그니스가 지들리의 말에 맞춰 살짝 앞으로 나와 가볍게 인사했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에서 승마복과 비슷한 활동복으로 갈아 입었음에도 드레스를 입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그 인사는, 옷에 따라 인사를 달리하는 셰릴 옆에 붙어있던 내 입장에서는 살짝 어색한 감이 있었다.

다행히 학생들은 그런 거에 신경 쓸 틈은 없어보였다. 특히 남학생들이.

"벼, 변경백?"

"와...이티스엘은 대체 어떤 나라인걸까."

"저렇게 젊은데 대체 무슨 일이..."

"저런 미모에 마법 실력까지 뛰어나다니 세상 불공평하네."

하나 같이 타당한 감탄이었지만 마지막 감탄을 듣고 나도 모르게 빵 터질 뻔했다.

풉. 그래, 뭐 라그니스가 귀여운 상이긴하지. 티가 날듯 말듯한 주근깨도 잘 어울리고. 근데 감탄할 미모라고 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을까 꼬맹아?

"반갑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냉랭하게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인사였다. 숙였던 고개가 다시 들어올려지자, 거기엔 오그웬에서 날 강제로 마차에 태웠던 귀족 라그니스가 있었다.

근데 묘하게 조금 짜증이 난 거 같으신데요...?

"이 쪽은 제 수행원이자 비서인 엘드미아 에가입니다. 수행원이라고는 하나 저와 같은 임시 생도의 자격으로 참관하는 것이니, 절차탁마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 내가 그런 위치였구나? 왜 또 나만 모르는 일이 진행되는 것인지 따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가볍게 예를 취하자, 이번에는 여학생들이 반응했다.

"몇 살일까? 동갑? 아니면 연상?"

"진짜 엄청 크다..."

"야, 야성미가 느껴지는데...?"

"좀 멋있는 거 같기도 하고..."

크. 그래! 그거지! 그게 정상적인 엘드미아를 향한 평가지! 내가 현생은 잘 생긴 축에 속한다니까?

진짜 평생 살아오면서 엎드려 절 받는 수준으로 노력해야 가끔 들려왔던 칭찬에 귀까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정중한 옅은 미소로 바꾸면서 난 학생들과 한 번 주욱 아이컨텍을 시도했다. 가장 키가 큰 남학생도 170이 안 될 수준이라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모두를 둘러 본 나는 아카데미를 다니는 일주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혼신의 연기를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정중한 기사이자 여심 폭격기 엘드미아 에가가 되어주지. 평소엔 하지도 않는 목소리 톤까지 정돈해서 말을 꺼내자 여학생들이 한 번 더 술렁였다.

"모, 목소리 좀 봐! 미쳤어, 미쳤어!"

"임시 생도라고 했으니 나중에 이야기 할 시간이 있겠지?"

"자세 잡힌 거 봐...진짜 기사 아닐까?"

분명 평균 나이는 나보다 높을텐데, 어차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저들이 나라는 인물을 겉핥기로 보고 가진 환상이 중요한거지.

잘만 이야기하면 이것저것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을 거 같은 기분 속에서 난 여유로운 척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을 훑어보며 옅게 웃어주었다.

"쯧쯧. 조용! 아까도 말했지만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마라. 아카데미에서 신분의 차이는 없다한들, 그건 엄연히 생도끼리의 이야기다. 임시 생도라는 위치는 한 발 뺀 상태라는 걸 항상 명심해라."

들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퉁퉁 치며 주의를 주는 지들리에게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들떠 있는 학생들이었지만, 라그니스와 달리 그들을 대충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던 난 라그니스에게 살짝 속삭였다.

아까보다 더 경직되고 더 짜증나 보여서 솔직히 말 걸기가 겁났지만, 나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남자다. 일은 해야지.

"용사같은 사람은 안 보이는데?"

"......그래?"

"시선이나 반응이 다 비슷해. 딱히 뭉쳐 있는 느낌도 안 들고."

용사라는 것을 감추고 교육을 받지도 않을테니, 결국 그를 중심으로 파벌이 생기거나 알게 모르게 모여 있는 인물들이 나오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들리 선생님? 그러고보니 제국 신성회에서 용사로 지목된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라그니스의 질문에, 매우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며 지들리가 대답했다.

"아...그게, 좀 늦게 올 때가 있습니다."

"추가 지도라도 받는 건가요?"

"예...뭐..."

나도 모르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육성으로 쌍욕이 나올 뻔했다.

지들리의 반응은 대충봐도 내비치고 싶지 않은 치부를 얼버부리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는 라그니스만으로는 해답을 얻지 못할 거 같아서 나는 짐짓 쾌활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가장하며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환대해주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마족들과 항시 부딪치는 곳에서 태어난 몸인지라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더군요. 여러분들 중 제국 신성회에서 발탁된 용사님이 계신다고 들었는데...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나 군대 전역할 때 타 중대 아저씨를 전우님이라고 부르다가 막바지에는 용사님으로 부르라는 말까지 나와서 솔직히 입에 착 달라붙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용사는 용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당당하게 물어보며 좌중을 훑어 본 나는 돌아오는 반응에 속으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호의적인 반응이 없다.

"가끔 이렇게 늦게 올 때가 있습니다. 뭐, 화장실이라도 간 거겠죠."

남과 여를 불문하고 경계심 가득한 반응. 남자들에게서는 적대감과 조소를 읽을 수 있었고 여성들은 정말 미묘한 거리감 정도만 느껴진다. 이거 아무래도 단순히 용사라는 불세출의 천재를 시기해서 나오는 반응은 아닌 거 같다.

이상하다? 대외적으로는 멀쩡하다며? 이 새끼 안에서만 새는 바가지인건가?

"글쎄, 가끔 보면 화장실을 옆에 끼고 다니는 거 같던데."

"에테. 말 조심해라."

아까 지들리에게 농을 던지던 유쾌한 에테네라의 말에 옆에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학생이 조용히 경고하는 걸 보고 나서야 난 원치않게도 모든 상황을 이해해버렸다.

동시에 감탄해버렸다.

제국이라는 입지가 있음에도 아카데미 안에서 귀족과 평민이 이렇게나 싱글벙글 하하호호 하며 지낼 수 있는데, 거기서 좆침판이 가는대로 행동하며 고립되는 병신이 용사라고?

아니지. 어쩌면 저들이 그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제대로 정황을 살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직접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지. 그럼 그럼.

"뭐, 이젠 흔한 일이니 수업이나 시작하죠 선생님?"

에테네라는 행동도, 말투도 지극히 평민스러웠지만 소신있고 행동력이 넘쳤다. 심지어 귀족으로 예상되는 이들조차 그에게 별 다른 악의가 있어보이지 않는 걸로 미루어볼 때 인간관계조차 상당히 원만한 것이 분명하다. 사실 쟤가 용사인데 지금 몰래 카메라 같은 거 찍고 있는 거 아니야?

"어라? 처음 보는 얼굴이 있네?"

그렇게 의심만 깊어져 갈 때, 뒤 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지각생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용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무슨 왕국에서 교환학생이 온다고 했던가?"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나 하고...임시 생도로 참관하는 거라니까요. 뭘 교환한다는 건가요 당신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정형적인 구도의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엘프 하나, 사제로 보이는 여자 하나,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를 끼고 느긋하게 걸어오는 붉은 머리의 남자는 딱 봐도 옷무새가 흐트러져 있는 상태다. 저게 지금 수업에 늦었다고 서두르다가 흐트러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여자 셋 얼굴이 귀까지 뻘개져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수업과 수업 사이에 빈 짧은 휴식 시간동안 해면체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일하고 온 게 용사라는 현실이 나에게 알싸한 두통을 선사했다. 그게 지끈거리는 편두통으로 번지기 전에 난 최대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 힘썼다.

그래. 어차피 용사라는 게 잘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 아마 나도 여유롭게 강하고 삶이 윤택했으면 여자 꼬시고 다니느라 바빴을 거다. 무엇보다 저 녀석은 라그니스가 모은 정보에 의하면 충분히 생산적인 활동을 하며 제 능력을 발휘해주고 있지 않은가?

영웅호색이라잖아.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수긍하는 사이 난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며 어느새 내 뒤 쪽으로 살짝 다가온 라그니스에게 손을 내민 용사가 말했다.

"크. 전학생 클리셰는 못 참지. 반갑다. 난 용사 지크프리트라고 한다."

하지만 씨발 같은 환생자 입장에서 발정난 개새끼처럼 구는 거까지는 이해해줘도 그게 내 지인에게까지 지랄하는 꼴은 못 보겠다.

나는 최대한 웃는 얼굴로 용사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냄새납니다. 악수는 손을 씻고 나서 청해주시지요."

"...뭐?"

"밤꽃 냄새나는 손 치우라는 이야기입니다."

뒤에서 에테네라가 빵 터지고 용사의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옅은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체 그를 마주보았다.

뭐 씨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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