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놈은 분명 나와 같은 전생자다. 이 세계에서는 있지도 않은 개념인 교환학생을 운운할 때 이미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하지만 환생한 경위까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살아가던 이세계 인의 몸에 빙의를 한건지, 나처럼 환생을 한건지, 비슷한 나이 대로 육체를 재구성시켜서 던져진 것인지 너무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어서 짐작도 안 된다.
최소한 전생 어느 나라 사람들을 떠올려봐도 교집합을 찾아볼 수 없는 잘 생기고 인위적인 외모 덕에 차원이동으로 통짜로 끌려온 건 아닐 게 분명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넌 뭔데 감히 날 막냐?"
그리고 욱하는 반응과 자기과시 욕구가 짙은 말투. 용사라는 직위에 애착마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나처럼 나이 좀 먹고 온 놈이 아니라 예상 그대로의 나이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무엇보다 지 성욕 때문에 늦은 새끼가 존나 당당한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 새끼는 아직 머리가 덜 여물었어.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 변경백의 수행원이자 비서인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용사님.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냄새 나니 악수는 다음 기회로 미뤘으면 좋겠군요."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기세로 이를 갈며 내 손을 뿌리치려하는 용사보다 먼저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선 탓에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왕국의 입장? 용사에게 아쉬운 상황? 그런 거 하나도 없다. 아카데미 생도로 들어 온 이상 우리의 행동이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될 건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귀족과 평민이 하나되어 지낼 수 있는 저 학생들의 모습이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용사는 어떨까? 과시가 목적이던 존재가 순식간에 치부로 바뀐 뒤에도 과연 제국은 당당할 수 있으려나?
"좀 하나보다? 자신만만하네?"
"용사님만큼 자신만만하겠습니까."
솔직히 나처럼 아예 억울하게 죽었는데 제 2의 삶을 얻게 된 게 아니라면 삐뚤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멀쩡히 삶을 누리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누군가가 '세상을 구해주세요 용사여.' 라며 트럭으로 치여 죽이고 머리 끄댕이 붙잡아 강제로 정착시켰으면 세상을 구하기는 커녕 마왕과 손잡고 지옥의 끝자락까지 쳐 박아 줄 용의도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무례한 건 무례한거지 어린 놈의 새끼가 그냥.
"재밌네. 이번 과목이 실전인 건 알고 그러지?"
"안 그래도 그거 기대하고 용사님을 찾고 있었는데 공간이동하는 마족마냥 바로 나타나시더군요. 매우 기대됩니다."
옅게 웃고 있는 나와 달리 용사는 아예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지금 저 놈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한낱 엑스트라 1? 라그니스 앞에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할 수 있는 샌드백?
"간만에 재밌겠네. 여기 놈들은 죄다 좆밥새끼들이라서 흥이 안 나거든."
"지크! 단어 선택을 좀!"
"알았어 알았어."
이 새끼 한국인인 거 같은데. 어휘에서 같은 지옥불 반도인의 냄새가 난다.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의 지적에 사납게 웃어보인 거 치고는 순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발 물러선 용사는 라그니스에게 손을 들어 가벼운 인사를 건넨 뒤 학생들 쪽으로 다가갔다.
"경박한 남자네."
워매 씨벌! 진짜 목소리만으로 소름이 끼치는 건 처음인데 그게 라그니스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눈빛만으로 이미 용사를 다섯 번은 찢어죽인 거 같은 라그니스가 놈의 뒤통수를 뚫어버릴 기세로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변경백님. 표정 관리 하셔야합니다."
"크흠! 그, 그렇지. 그나저나 우, 우리 수행원이 일을 참 잘하네? 용사인데 눈치도 안 보고?"
얘도 은근히 셰릴 끼가 있는건지 아니면 귀족들은 다 그런건지 몰라도, 라그니스는 도무지 기복을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선보이며 헤벌쭉 웃어 보였다. 이럴 땐 참 언제나 알던 모지리 레비 같은데 말이야.
"이미 분위기 파악했지. 그래서 오히려 이상하네. 왜 제국은 자신들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를 데려온걸까?"
"거기까지 파악할 줄은 몰랐는데...당장 생각나는 경우의 수는, 오히려 용사의 실책을 만들어서 강제로 조종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 잡으며 인솔을 시작하는 지들리를 따라가며 소곤소곤 나눈 대화의 내용은 여러모로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목도 몰린 마당에 둘이서만 속삭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용사와 관련된 고찰은 다음 기회에 이어서 하기로 하고 우리는 임시 생도라는 신분에 맞게 행동하기로 했다. 각자 여학생과 남학생쪽으로 찢어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당연히 하이파이브를 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손 동작을 펼치며 다가 온 에테네라였다.
"이야! 왕국 기사님! 강단이 제법이더라! 존나 멋지던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호감이라서 하이파이브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화 속 기사님을 연기하는 것에 어울리지는 않는 모습이었기에, 난 슬램덩크의 한 장면처럼 하이파이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른 뒤 어색하게 받아주는 척하며 웃어 넘겼다.
"그저 해야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야, 기사도 아닌데 그렇게 당당하다고? 그래도 역시 변경백님의 수행원을 할 정도면 한 실력하는 거겠지? 몇 살이야? 난 17살인데."
"15살입니다. 형이시네요."
"미친 진짜?! 이보쇼 나리들! 얘들아! 이 친구 15살이래! 사실 거인 아니야?"
그야말로 분위기 메이커라고 해야하나, 귀족들과 평민들을 아우르며 사람을 모이게 만드는 에테네라는 그야말로 슈퍼 인싸 그 자체였다. 덕분에 순식간에 대화의 물꼬가 터버린 우리는 연병장 한 켠에 있는 돌로 된 대련장까지 가는 동안 꽤나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정말 나이 티를 벗지 못한 애들이 맞다는 것을. 심지어 상대적으로 성숙하다 할 수 있는 귀족들조차 앳된 기색을 벗지 못한 상태로 평민들과 섞여 대화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왕국에서도 이런 모습은 볼 수 없었는데, 제국은 원래 다 이런건가? 정말 그런거라면 좀 대단한데.
"아하. 우리 왕국기사 친구는 이런 자리가 어색한가보군? 감히 평민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니 건방져?"
그런 내 속 마음을 읽어 낸 에테네라였지만 난 당연히 귀족이 아니었기에 대놓고 웃을 수 있었다.
"저도 평민입니다."
"하하하......진짜?"
"거짓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뭐, 내가 좀 귀티나는 척을 잘하긴 해. 누가 뭐라해도 정신 연령 30세를 초과한 엘드미아 에가 아니겠는가? 좀 오글 거리는 것만 참으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남학생들이 모두 적잖게 놀라는 사이 우리를 인솔한 지들리가 대련장 위에 올라서서 말했다.
"너희들은 항상 하던 거지만 오늘은 대충 한 번 더 설명한다."
당연히 나와 라그니스 때문이겠지. 그걸 알고 있기에 장난기 넘치는 에테네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태클을 걸지 않고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내 수업은 철저한 실전 위주다. 내 스승이시자 배틀메이지 라드넬반데스의 가르침이 그래 왔고, 내가 가장 잘 하는 것도 그거니까. 나는 아무것도 제약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다가 학생을 죽게 만들 수는 없기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도서관장들이 모여 머리를 싸매고 만든 게 바로 이 대련장이다."
그냥 단순한 대련장인 줄로만 알았던 돌더미들이 지들리가 마나를 불어넣자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련장 한 가운데의 돌이 마치 하늘로 녹아내리는 것처럼 방울져서 떨어져 나가더니 투명한 수정구가 되어 3층 정도 되는 높이에서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정구가 튀어나온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매끈한 돌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도의 환각 마법과 빛 마법을 통한 왜곡 및 굴절을 통해 무기부터 상처까지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환상 마법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별 거 아닌 것 처럼 보이는 대련장이다. 단순히 사용자만의 지식과 체험 뿐만 아니라 저 위에 떠 있는, '촉각'이라 명명된 수정구에 기록된 수많은 기록들이 상황을 읽고 해석하여 환상을 더더욱 견고하게 만들기에 어지간한 상황은 다 구현 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거 참 엄청나네라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이 옆에서 다른 남학생이 낄낄 거리며 말했다.
"저걸 성性적으로 사용해보려던 선배들도 있었다는 게 믿어져?"
"그거 참...병신 같지만 일리가 있는 발상이군요."
"끌끌끌. 아쉽게도 그런 정보는 들어있지 않아서 쓸모는 없었다지만 정말 사람의 상상력이란 대단한 거 같단 말이지."
어쩌면 그 놀라운 시도를 한 친구는 졸업한 뒤 저기에 쓰인 마법으로 가상의 이상형을 구현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마법을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언젠가 '환상 속의 여친이 단 돈 금화 3개!' 라는 문구로 무언가가 팔리고 있다면, 그 친구라고 생각해야지.
"수업은 평소와 같다! 가장 상성이 좋지 않은 생도들끼리 싸우는 것. 물론 오늘은 새로운 두 사람이 있는 만큼 약간의 조정이 있을 것이다. 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순서도 조금 변경할테니 그리 알고 있도록!"
그렇게 말하며 학생을 호명하는 지들리에게서 눈을 돌려 용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자,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용사와 눈이 마주쳤다. 세 명의 여자들 사이에 껴서 엉덩이를 주무르며 뭐라 소근거리고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으면서도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 시선은 존나 아니 꼬왔지만 저렇게나 당당하게 풍기문란한 행동을 한다는 점만큼은 진심을 담아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