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들리는 열띤 학생들이 라그니스에게 달라붙어 떠드는 것을 잠시 방관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딱히 나쁜 상황도 아니긴 할 것이다. 아무리 교육자가 교육에 열과 성의를 다 하더라도 배우는 입장에서 의욕이 없으면 효과는 기대미만일 수 밖에 없으니까.
십 수년을 더 살아온 이가 보인 것도 아니고 비슷한 또래의 마법사가 무영창을 시도한다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들의 의욕은 하늘을 찌를 게 분명하다. 한동안은 더욱 열심히 학구열을 불태우겠지.
저 용사라는 놈만 빼고 다 그럴 거 같다.
"이것들아! 굉장한 거 봐서 들뜬 건 알겠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다음은 엘드미아 경도 체험하셔야죠?"
"그냥 엘드미아로 충분합니다 교수님."
가벼운 걸음으로 대련장에 올랐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라그니스가 보여준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마법사가 아닌 애들은 내 쪽으로 신경을 옮겼지만, 그마저도 상당수의 남자들은 라그니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흥이다. 나도 사내놈들 시선 받고 싶지 않네요!
"그럼 엘드미아의 상대는 누가 해보는 게..."
"당연히 정해져 있잖아 선생."
그런 들뜬 분위기를 별 거 아닌 말 한마디로 좆창낼 수 있는 걸 보면 용사는 용사였다. 순식간에 주변이 정적에 휩싸이는 건 꽤나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마치 '저게 있었지.' 라는 분위기. 지들리는 난감한 기색을 겨우 숨기며 나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눈동자가 전달하는 바는 명확했다.
대체 쟨 뭘 어떻게 했길레 교수까지도 이런 반응을 하게 만드는걸까
"맞는 말씀입니다. 이티스엘에서 제국까지 왔는데 용사님과 검을 겨루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마 이마를 칠 수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하며 미간을 찡그린 지들리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난 용사 말고는 다른 애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생자끼리의 빅 매치잖아? 기대감에 몸이 떨릴 정도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어김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인 용사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서 대련장 위로 올라오더니 매우 능숙하게 무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건...검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거운, 그리고 조잡했다.
그건 말 그대로 철퇴였...아니, 씨발 저 새끼가?
"그거 참 거대한 검이군요. 제대로 휘둘러지기나 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용사가 좆으로 보이냐?"
"좆이 달린 것처럼 보이긴 하죠."
"허. 독특하게 웃긴 놈일세."
붕 붕 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제 몸만큼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용사 정도 되는 사람이 오러를 쓰면 기척은 느껴질텐데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거보면 저거 순수 근력이라는 소리다.
"오러조차 사용하지 않고 그런 게 가능하다니. 어이가 없군요."
"환상이니까 무게를 뺐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냐?"
"용사님 자존심에 그럴 거 같진 않아서."
"새끼. 처음 본 주제에 여기 놈들보다 날 더 잘 알아보네."
니놈 존심에 그런 가오 빠지는 짓을 할 거면 그냥 평범한 검을 꺼내들었겠지. 대뜸 용 잡을 때나 쓸법한 검을 꺼내들었을까.
아쉽게도 용사와는 달리 난 내가 쓸 검을 구현하는 것을 바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말고 그냥 쓰던 검이나 떠올려. 적당히 하면 나머지는 촉각이 알아서 맞춘다. 무기 강도 재질 이딴 거 생각해봤자 대장장이도 아닌데 뭐가 되겠냐."
보다 못한 용사가 조언을 던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조언만큼은 확 와닿는 부분이 있어서 듣자마자 제대로 된 롱소드 한 자루를 뽑아낼 수 있었다.
"과연. 굉장히 도움되는 조언이었습니다."
"흠...그래."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자리를 잡는 용사였지만 딱히 자세를 잡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긴, 예카트리나도 그렇고 거대한 무기를 롱소드마냥 휘두를 수 있으면 자세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을 거 같긴 하더라.
손에 쥐어진 롱소드를 몇 번 휘둘러보자 정말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드워프 장인에게 받은 롱소드와 똑같은 균형감이 느껴졌다. 이거 사실 대련장 외에서도 정보를 받아오고 있는 거 아닐까? 이렇게나 똑같다니 진짜 신기하네.
"와라. 선수는 양보한다."
어깨 위에 검을 걸치고 왼 손을 까딱이는 건방지기 그지없는 용사였지만, 그 호의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기에 난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럼 사양않고."
어디 한번 전력으로 가보자고.
◈
느껴지는 오러도 없는 놈인데 결국 수준이야 뻔하겠지.
으레 소설에서 본 것마냥 제 주인한테 알랑거리다가 주인공에게 쳐맞고 나가리 되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놈이다. 이세계인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큰 키에, 딱 봐도 단련 좀 한 몸을 보니 실력에 자신이 넘칠 게 뻔하지만, 그래봤자다.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해도 이제 15살인 놈이다. 아무리 이세계에서 강해지는 게 전생과는 다르다하더라도 결국 천재라는 것들도 부질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했다.
오러를 느낄 틈도 없이 정면으로 찔러 들어온 찌르기를 겨우 쳐낸 뒤에도 한동안 공세가 끊이질 않았다.
[지크! 정신 차려라! 아직 안 끝났다!]
[이 새끼 대체 뭐하는 놈이야?!]
전력으로 시전한 횡베기의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놈이, 옛날에 유투브 같은 곳에서 서양 검술 영상이다 뭐다 하면서 보이던 상단 자세 비슷한 걸 잡고서 다시 한 번 뛰쳐 들어온다. 당연히 들어올 걸 예상했음에도 눈이 반응하지 못 하는 속도였다.
[네가 지금까지 겪었던 적수 중에서는 가장 실력자다! 정신 똑바로 차려!]
[난 정신만큼은 항상 똑바로 차리고 있다고!]
황급히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둘렀을 땐 이미 반 이상 파고 든 놈이 몸을 숙이며 거대한 칼날 아래로 숨어든 뒤였다.
이 새끼. 보자마자 검의 약점을 이해하고 쫄지도 않고 달려들고 있다!
"쥐새끼처럼 움직이는구나!"
몸을 뒤로 빼며 검의 경로를 꺾어 아래로 내려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가 용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오러로 강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고, 당연히 예상하는 건 더더욱 말도 안되는 갑작스러운 공격이어야 했다.
-콰아앙!
하지만 검은 바닥을 내려 찍었을 뿐. 그 산만한 덩치로 대체 어떻게 반응한 건지 몰라도 놈은 완전히 내 오른쪽으로 빠졌을 뿐만 아니라 검을 발판 삼아 내 머리를 노리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느냐! 진짜 실력자를 상대할 때 네 검은 너무 위험하다고!]
[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실전도 아니고 겨우 대련 가지고 정말 끝도 없이 빽빽거리기는!
[대검은 남자의 로망이라고 짜샤!]
[나 말고 저 소년에게 그렇게 말해봐라! 신나게 비웃을 거 같구나!]
멋도 모르는 정령의 말을 무시하며 그대로 놈을 대검과 함께 휘둘러 허공에 던지려고 했지만 어떻게 눈치 챈건지 귀신같이 내려와서는 내 뒤를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그래도 거기까지 당해줄 수는 없다. 대검을 휘두르며 황급히 자세를 바로 잡고 놈과 마주하자 영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놈이 입을 열었다.
"용사님의 검술이 근본이 없어서 그런겁니다. 그 좋은 신체능력을 너무 막 쓰시는군요."
분명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음에도 지치기는 커녕 한숨조차 내쉬지 않는다. 방금 전의 움직임 만으로도 아카데미에서 날고 긴다는 놈들은 싹 다 쓸어 담아버릴 수준인데 그게 전력의 일부 밖에 안된다고?
[이 새끼 사실 숨겨진 동료 같은건가? 존나 어이가 없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
"너 임마 지금 용사한테 근본없다고 한거냐?"
"아뇨. 용사님의 검술이 근본 없다고 한겁니다. 나머지 기량은 토나올 정도네요. 그 거대한 검 째로 사람을 들어서 휘두를 생각을 하다니."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눈치도 빠르고 움직임은 더 빠른 놈이었다. 정말 15살이라고? 저 변경백도 그렇고 왕국은 마족들과 부딪치면서 무슨 이상현상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거 아냐?
"용사님은 한 가지 놓치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널 놓치고 있기는 하지."
"그딴...흠. 그런 거 말고. 압도적으로 강하니까 검술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고 여기죠?"
저 놈 지금 그딴 거 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나?
[저 녀석은 독심술사인가? 아니면 네 지인이라도 되는거냐?]
[좀 닥치세요 정령아.]
질 거 같지는 않다. 그야 아직 난 오러도 쓰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무리 오러를 썼다고 하더라도 용사의 육체능력을 따라온다고?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내가 용사라고 우대받고 있지도 않았겠지.
뭔가 다르긴 다른 놈이다.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래서 용사님이 오늘은 저한테 지는 겁니다."
마치 이미 결정된 사항인 것처럼 얄밉게 지껄이는 놈이 다시금 자세를 잡는다. 그럼에도 오러가 느껴지지 않는다. 알다가도 모를 새끼다 정말.
"허! 오냐. 오러 좀 쓴다 이거지?"
명백하게 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 자신감을 무너뜨려주기 위해, 나도 오러를 일으켰다.
"지금 꼴에 좀 움직였다고 자만하는 거 보니 너도 혼 좀 나야겠구나."
어린 놈의 새끼가 뵈는 게 없어 아주.
"내가 왜 용사인지 뼛 속까지 느껴봐라."
그리고 정령의 도움을 받아 바람을 일으키고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동시킨다. 단축의 단축을 거듭해서 단어만으로도 완성되는 수준까지 이른 마법이 머리 위에서 마나를 먹으며 커지는 것이 느껴진다.
쏘아지는 것은 단순한 매직 미사일에 불과하지만, 개틀링 건처럼 쳐맞다보면 정신이 아찔해질거다.
"정령술까지 쓰는 겁니까? 어째 나 말고는 다 정령술로 잘 싸우는 거 같네."
하지만 그런 마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살짝 자세에 힘이 빠지며 뜬금없이 허탈한 표정을 짓던 놈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정령 친화력까지 있어?
"뭐 그건 어쩔 수 없는거니까 일단 마법부터."
대체 뭐하는 놈인지 궁금증이 다시금 일어나는 사이, 놈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뜬금없이 칼질을 했다.
[...!! 지크! 마법을 머..!]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머리 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