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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72화 (72/412)

용사와의 식사 겸 술자리는 그렇게까지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의외로 용사의 몸뚱이는 술에 약했다.

"너 임마아, 어? 하지말라면 하지마 씨발."

"돌겠네 진짜."

대체 뭘 하지 말라는건지 몰라도 정신머리가 멀쩡할 때는 나름 문장을 만들어 말하던 지크 놈은 이제 머릿속에서 내용을 생략하고 결론만 내뱉는 수준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지크. 이제 늦었어요. 돌아가도록 하죠."

"으어? 그래? 그럼 가야지. 여자애들이 이런 좆 같은 세상에서 밤 늦게 돌아다니면 안돼."

"어휴. 말 좀 예쁘게 하라니까요."

취하고 나니 아주 옘병 지랄 꼴값을 다 떠는 놈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나 라그니스와 달리 세 여자들은 그런 놈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한껏 표출하던 독기는 온데 간데없이 순둥이 같은 눈매를 하고 있는 탓에 나조차도 모자란 동생보는 기분이 든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꼴을 보며 혀를 차는 대신 아직 남아 있는 술을 따라 마시자 에셀루아가 지크의 잔을 빼앗으며 말을 건네왔다.

"에가 경은 술을 굉장히 잘 마시는군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도 이만큼 잘 마시는 분은 드문데 말이죠."

"그렇습니까? 평범하게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역시 예카트리나와 긴이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를 초월한 게 맞았나보다. 물론 여기 술이 맥주였으면 배불러서 못 마셨을 것이고 소주같은 거였으면 맛없어서 못 먹었겠지만, 맛도 세기도 위스키류에 가깝다보니 꽤나 즐겁게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생이라면 입에도 못 댔을 값 비싼 종류의 술들인데 이럴 때 먹어둬야지.

"어쨌든 에셀루아 씨의 말대로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죠 용사님. 내일은 휴일이 아니니까요."

"으어어. 내일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뭔 개소리입니까?"

"난 전설따위 믿지 않아..."

나름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진짜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써버리고 말았다. 이세계에서 처음 만난 꽐라가 용사라니 진짜 세상 언제나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그리고 임마. 어? 용사님이 뭐야 씨발. 지크 형이라고 불러 씨발."

"제가 뭐가 아쉬워서 사내놈을 애칭으로 부릅니까? 징그러운 소리말고 일어나기나 하십쇼. 용사가 쪽 팔리게 술 한 병에 맛이 갑니까?"

"나 멀쩡해 임마아아아."

당연히 지크놈은 멀쩡하지 못했다. 결국 에셀루아가 마법으로 그를 띄워 나를 수 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렇게 식당을 나와 헤어졌다.

"첫 날부터 용사와 술판이라니. 재주가 참 좋구만."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마차에 기댄 채 숙소로 떠나는 용사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라드넬반데스의 모습에 나는 적잖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이 양반이 여기 어떻게 있어?

"놀라기는. 4 황녀가 숙소로 연락해서 마차를 부탁했다길래 겸사겸사 따라왔네."

"4 황녀요?"

"음? 에셀루아 황녀 말일세. 몰랐나?"

저게 황녀라고?!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와중에 일단 마차에 오르자 라그니스가 옆에 앉으며 설명해주었다.

"말이 황녀지 사실 계승권이 없다시피해서 명예직에 가까워. 그거 때문에 용사랑 같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용사를 기회 삼아 계승권을 얻으려 한다고 수근거리는 거고."

"아니 그걸 떠나서. 그러면 지크 그놈은 아카데미 아무데서나 황녀의 엉덩이나 가슴을 주무르고 다녔던거야? 제국은 황실 모독죄 같은 게 없나?"

"그럴리가 있니. 그냥 그게 적용이 안 될만큼 아무런 권리도 없는거지. 황녀라고 불러 주고, 아쉽지 않게 자금도 지원해주지만 딱 거기까지인거야."

내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탓에 더 이상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일과를 적당히 라드넬반데스에게 설명해주는 라그니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크프리트와 나눈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놈도 정신머리가 아예 없지는 않은 만큼 첫 만남에 모든 것을 터놓지는 않았다. 결국 녀석도 나도 이번 식사는 탐색전에 가까운 거였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아무 생각없이 양아치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해졌다. 싸가지가 좀 없을 뿐이지 멍청하지 않은 지크프리트는 이 세계가 꿈과 낭만이 펼쳐지는 동화 속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가 보장하는 '평등'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최대한 자신의 보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모르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며 용사라는 타이틀 안에서 어디까지 자신의 자유가 허용되는지 꾸준하게 탐색 중인 것이다.

물론 그 사이사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용사는 결국 용사라고 봐도 될 거 같습니다. 엘드미아 덕이긴 하지만 첫 인상은 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번 제국 방문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부터 열까지 자네에겐 계속 빚만 지는 기분이로군. 보답을 해야하는데 말이지."

"어쩌다가 얻어걸린 것에 불과한걸요."

"남들은 작정해도 못 하는 것들을 어쩌다가 닿는 것만으로 해결 해주는 인재라면 더더욱 보상을 통해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하지 않겠나."

밤이라서 그런건지 평소보다 매우 조용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라드넬반데스는 역시 존경할만한 상식의 소유자였다. 잘 해주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 몰상식한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르신이다.

"뭐,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벤데 후작이 잡아 준 숙소는 꽤 좋은 곳이더구나. 겨우 일주일동안 체류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 해준 집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니, 하루종일 관심도 없었는데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보면 궁금증이 의혹으로 바뀔 정도일게다. 대체 제국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건지 감도 안 오더라."

겨우 집 하나로 거기까지 고민해야하는 상황인건가 싶으면서도, 아침에 있었던 마중과 용사의 일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라드넬반데스가 설레발이나 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평범한 서민에 불과한 나와 달리 그와 라그니스는 왕국에서 입지부터가 남다른 이들이니까.

나랑 연관없을 뿐이지 이번 방문은 둘에게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일임이 분명했다.

"왜 너랑 연관이 없어 바보야."

"엥?"

"레비엥 변경백을 보좌하는 집사이자 수행원이 아무리 대련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용사를 이겼는데 그게 정말 오늘 하루의 깜짝 사건으로 끝날 거라고 믿는거야?"

"헛헛. 설마 그럴리가 있겠느냐. 이미 숙소에서 짐을 풀던 우리 사용인들에게마저 소문이 쫙 퍼져 있는 사실인데."

"에?"

제국은 인터넷이라도 연결되어 있는건가? 이게 말이 돼?

"심지어 오늘 용사랑 식사까지 같이 했잖아. 제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나보다 네가 더 정신 없을 수도 있어."

코웃음을 치며 설명해주는 라그니스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겨우 지어놓은 집을 부숴 버리는 사육사를 바라보는 비버와 같은 표정으로 라그니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라드넬반데스의 말대로 벤데 후작이 마련해준 숙소는 범상치 않았다. 마치 우리 머릿수에 맞춰 준비한 것처럼 너무 크지 않은 별장같은 느낌의 저택은 멋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엄청 고급진 물건들로 이미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술기운도 오르고 라그니스에게 들은 충격적인 사실로 혼미해진 난 그런 거에 감탄할 틈도 없이 씻고 잠들 수밖에 없었다.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든 나는, 잠깐 졸았던 거 같은데 이미 밝아온 아침을 맞이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숙취는 없었다. 그저 기도따위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어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게 숙소에서 사용인들이 마련해주는 식사를 하고, 등교 준비를 하고, 라그니스와 함께 마차에 올라 영겁과도 같은 등교길을 지나 아카데미에 도착한 순간.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엘드미아 경!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검술에 대해 진중한 대화를 나눠보시지 않겠습니까!"

"에가 경! 제국에 얼마나 머무실 예정인가요? 7일 뒤에 저희 가문에서 작은 만찬회가 열릴 예정인데 혹시...예? 6일 뒤에 돌아가신다구요? 작은 만찬회라서 일정을 앞당기는 건 매우 손 쉬운 일이랍니다! 부디 방문을...!"

"엘드미아 씨! 부디 저희에게 검술 지도를!"

슈퍼 루키를 선점하려는 동아리 활동도 아니고 정말 지랄맞게도 많은 학생들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며 접촉해왔다.

처음엔 당연히 라그니스도 나처럼 시달릴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정작 그녀에게 말을 거는 년놈들은 하나도 없는 게 아닌가?

"우리가 아카데미의 교칙에서 한 발자국 뺀 상태잖아. 난 변경백. 넌 용사를 이겼더라도 변경백의 수행원. 즉 다가가기 쉬운 평민인거지."

마도학개론 시간에 간결하게 내 의문을 해소해준 라그니스는 마치 날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웃어? 이게 웃겨?

"넌 웃음이 나오냐?"

"그럼. 웃음이 나오지. 수행원의 실력마저도 출중한 이티스엘의 레비엥 변경백. 무영창도 쓸 줄 아는 이티스엘의 레비엥 변경백.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내 평가는 솟구쳐 오르는 걸?"

"웃음이 나올만한 상황이군."

듣고나니 내가 좀 귀찮을 뿐이지 그녀에게는 꽤나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기에 독기가 조금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남은 6일 동안 이런 거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아찔하기 그지없는 건 변함 없고, 울고 싶은 내 심경에도 변화는 없다. 나는 죽상을 썼고 라그니스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렇게 좌절감 속에서 마도학개론 수업이 끝났을 때.

"엘드미아 씨! 사랑해요!"

"부디 저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 가문에 오시면 당장 기사 작위를 준비해드릴 요량이 있습니다만..."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여학생 집단을 목도한 라그니스의 표정이 얼음장마냥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쟤 왜 또 손톱 깨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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