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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73화 (73/412)

하지만 엘드미아 에가는 언제나 답을 찾아내는 사나이지.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로 맞이하는 점심 시간이 되고 난 뒤에야 나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단 하루만에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는 모든 여학생들은 동화 속 기사 엘드미아가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너...오가토르프 가문에 있는 동안 사교계만 끌려다닌 거 아니지?"

"그딴 곳을 내가 왜 가니? 안 그래도 빡빡한 인생인데."

내 환상적인 언변과 교묘한 사탕발림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그니스마저 감탄과 박수와 미소를 참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이게 1차 방어전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내 철옹성과 같은 태도에 어중간한 학생들은 싹 다 떨어져 나갔을테니 앞으로 오늘만큼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경백으로서 움직일 일이 있다며 라그니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전혀 다른 존재들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엘드미아 경. 꼭 한 수 겨뤄보고 싶습니다."

바로 환상 속 기사님에게 더더욱 열광하는 열성 검술종자들이었다. 처음엔 용사조차 못 이겨서 뒤에서 이를 갈고 있던 것들이 왜 나에게는 이렇게까지 득달같이 달라붙나 싶었는데, 의외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 비슷한 걸 알려준 건 지금 눈 앞에서 학식을 먹고 있는 지크프리트였다.

"쟤들은 나랑 붙어봤자 자괴감 밖에 못 얻지만 너하고 붙으면 기술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거지."

"기술이요?"

"당연하지 않겠냐? 대륙에 용사가 둘 있는 게 아닌 이상 넌 용사가 아닌 수많은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한데, 그럼 뭐라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잖아."

그것도 사실 마력 빨인데 말이지.

내 기술이라고 해봤자 아실리에에게 약식으로 배운 엘프 검술과 2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배운 오가토르프 검술이 전부다. 내가 비록 배움이 빨라서 같은 시간을 보낸 남들보다 많이 배웠을 지언정 무슨 비기를 배운 것도 아니니까 그들이 바라는 새로운 깨달음따위 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리지만, 동네방네 나 마력씁니다 라고 홍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왕국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이 고생은 이어질 것 같다.

요 근래에 어째 피곤한 일만 자꾸자꾸 쌓여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형이 이렇게 주변 날파리들을 치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주고 계시지 않냐. 형은 다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꽐라가 되었음에도 숙취가 없는 것처럼 말짱하기 그지없는 지크프리트가 내뱉은 말은 괘씸하면서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극한의 대련무새들은 절대 다수가 말이 통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지크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눈치만 보며 다가오는 걸 포기했으니까.

당장 저 식당 귀퉁이에만 하더라도 지크프리트가 사라지자마자 다가올 생각 만만인 놈들이 한 테이블을 가득 채운 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이다.

용사 성능 확실하구만.

"대체 뭘 얼마나 악랄하게 굴었으면 벌레 쫓는 약처럼 이렇게 효과가 끝내주는 겁니까?"

"너 임마 형한테 벌레 쫓는 약이 뭐야 짜식아."

말은 그렇게해도 지크프리트는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얼 타고 있을 거 같아서 도와줄 겸 괜히 요상한 곳에 코 꿰지 말라고 미리 언질과 정보를 주고자 온건데 임마. 그렇게 굴면 좋은 정보가 날아가요."

"제가 6일 뒤에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는 귀족의 일개 수행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거 아닙니까?"

정보고 나발이고 어차피 여기 살 것도 아닌데 제까짓 게 중요해봤자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내 시큰둥한 대답에도 지크프리트는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그 누구도 그걸 간과하지 않고 있다는 게 중요한거야 임마. 너나 변경백이나 여기 불려온 게 나 때문인 상황이잖아. 근데 제국이 과연 내 패배를 상정하고 너희를 불렀을까?"

"그건...아니겠죠"

그걸 상정했다면 나를 알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예지하는 수준이다. 나조차도 용사를 멀쩡히 이길 줄 몰랐는데 어떻게 그런 걸 예상하겠어?

"당연히 아니지. 제국은 날 데려온 그 순간부터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상당히 오랫동안 빌드업을...음. 계획을 세워 왔다. 나를 과시하고 제국의 입지를 다시금 확고히 할 뿐만 아니라 마왕을 물리친 뒤에 새로운 이권을 쥐기 위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지."

"뭔가 굉장히 긴 서론의 냄새가 나는데 오늘 주려고 한다는 그 정보랑 연관이 있는 이야기가 맞긴 합니까? 없어보이는데."

"내가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그런거야 임마. 일단 들어봐."

깨작깨작 식사를 이어나가면서 지크프리트는 내 핀잔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 계획의 첫 단추는 내가 제국이 하자는 대로 안 하는 바람에 좆박았지만, 제국 씩이나 되는 것들이 그거로 끝날리가 있겠어? 차선책으로 이번 기회에 외교적인 문제를 핑계 삼아 나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목적이 있었지."

"그걸 알고도 그냥 저한테 들이받은 겁니까?"

"당연하지 짜식아. 적당히 손대중으로 끝낼 자신도 있었고. 놈들이 원하는 외교 문제까지 안 갈 자신이 있었기도 했지."

외형은 18살 청년일지라도 지크프리트 역시 전생자다. 아무 생각없이 움직이는 애라고 상정한 뒤 세워지는 계획에 휘둘릴 정도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발상이다.

"하지만 의도치않게 너한테 패배하는 형태로 제국의 차선책에도 똥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이건 단순히 내가 녀석들이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아서 조지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상황이야."

용사의 포크가 덤덤하게 나를 가리켰다. 세계를 구하기로 점지된 용사를 대련에서 이긴다는 게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진 않았으나, 막상 남의 입으로 들으니 감회가 남다른 기분이다.

"귀족들에게 하루란 존나게 긴 시간이야 엘드미아. 정말 존나게 긴 시간이지. 이미 놈들은 너도 노리고 있다."

"......겨우 한창 성장 중인 용사 한 번 대련으로 이겼다고 너무 열성적인 거 아닙니까?"

"넌 내 실력과 네 실력을 존나게 과소평가하고 있구만?"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온걸까 라고 중얼거리며 지크프리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말해서 뭐하겠냐? 그냥 받아들여. 넌 그 대련 한 번으로 네 몸값을 순식간에 떡상시킨...아이씨. 끌어올린거야."

매우 조심해야 하고 귀찮은 게 늘어났다는 소리지. 나직이 중얼거리는 지크프리트의 얼굴엔 미묘한 동정마저도 깃들어있는 듯 싶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경계할만한 일입니까?"

"뭐?"

사실 용사라는 조커를 쥘 수 있다면 어느 나라다 비슷하게 굴지 않을까 싶은데, 지크프리트에게는 제국을 향한 묘한 적의가 느껴진다. 딱히 푸대접을 하거나 강제적으로 행동에 제약을 두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럴까?

당장 왕국에서만 15년을 산 나이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제국은 제국이다.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들을 가볍게 씹어먹을 정도로 발전한 국가다. 아카데미에서는 평등을 언급하며 인재 등용에 힘쓰고 있고 어마어마한 기술력까지 동원한다.

어디든 결국 대우가 비슷하다면 일부러 제국을 걷어찰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 차이는 명확하다. 과장 좀 보태서 다른 곳이 중세면 여긴 수도만큼은 현대에 근접한 수준이니까.

평범하게 본다면 그런 제국이 날 등용하고 싶어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랄 일이다.

"솔직히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왕국과 비교했을 때 제국의 문물은 말도 안 되게 뛰어나더군요. 오히려 제국이 자리를 제안하면 보통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거참...이건 좀 말하기가 애매한 부분이라서 아직은 말 못해주겠다. 근데 일단 이게 보기 좋다고 해서 과정도 좋다고는 생각하지마라. 이유가 있어서 형도 여길 좆같이 여기는거야."

사람 사는 거 어디든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아직 지크프리트의 비밀을 알아내기엔 호감도 작업이 더 필요한가보다.

"아직이라고 말하시는 거보면 언젠가는 말할 기회가 있다고 보시나보네요?"

"그럴걸? 형이 이런 감은 잘 맞아. 넌 나랑 좀 오래 볼 관상이야."

"징그럽게 무슨 소릴..."

"진짜라니까 그러네. 설령 6일 후에 돌아갈 지언정 넌 나랑 징하게 볼 거다. 촉이 와."

나도 어차피 전생자인 마당에 15년만에 만난 동향사람 자주보면 나쁠 건 없다지만, 쟨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걸까.

...진짜 촉이 오나?

"그렇게 촉이 와서 이렇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겁니까?"

"어. 내가 괜히 내 여자들이랑 따로 움직이면서 사내새끼 만나는 게 흔한 일인 줄 아냐? 다 동생 신경 써서 그러는거야."

이젠 진짜 의형제라도 맺은 것마냥 동생 취급이군.

가장 열심히 말하면서도 지크프리트는 벌써 식사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아니, 정작 들으면서 밥 먹은 난 반도 못 먹었는데?

"대체 식사는 언제 다 끝내신겁니까?"

"형이 원래 밥 먹는 게 좀 빨라. 좆 같은 경험 때문에."

녀석. 군필인가? 나도 전생에는 밥 빨리 먹는 거 못 고쳤는데 말이지.

이젠 할 말 다 했다는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크프리트는 가볍게 목을 돌리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하려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건 그 정도였어. 나머지는...오늘부터 타 국가에서도 너희처럼 날 보러오는 관광객들이 생길터라 좀 복잡해질거라는 것 정도네."

"오히려 지금 알려준 그 이야기들이 더 궁금한데요? 저희만 오는 게 아니었습니까?"

"말했잖냐. 내가 너한테 지는 건 계획에 없었다고. 놈들은 좀 더 많은 국가에게 날 과시할 겸 내가 실수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 두려고 했다. 너희는 그 중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고 있을 뿐인거고. 뭐, 그 특별 대우를 통해 뭘 노리는지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마치 자신과는 연관없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지크프리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마쳤다.

"적어도 이제 그 노림수에 변경백 뿐만 아니라 너도 들어간다는 거 하나만큼은 확실하지. 다른 국가의 사절들도 이미 다 알고 올 걸?"

씨발.

저놈이 조금만 덜 싸가지없었더라도 그냥 대충 지고 끝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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